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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신학의 본질: 육화(肉化)-가난과 선(善)의 상관성을 중심하여팬데믹 시대의 프란치스칸 작은형제회 ⑵
이정배 교수(顯藏아카데미) | 승인 2020.10.23 17:45
▲ Bartolomeo Della Gatt, 「Stigmata of St. Francis』 (1336) ⓒGetty Image

한 프란치시칸 신학자는 13세기 성인의 신학을 ‘육화신학’이라 정의했고 그 핵심을 ‘하느님은 선(善)이시고 창조된 모든 것은 선이다’는 말로 풀어냈다.(미주 ) 여기서 가난은 위대한 선으로 묘사된다. 왜냐하면 독생자 예수가 죽기까지 가난한 자로 세상에 왔던 까닭이다. 따라서 가난의 절정은 의당 ‘내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예수의 십자가 일 것이다. 뜻마저 자신의 것일 수 없다는 것이 프란치스코가 말한 가난이었다.

하여 선(善) 즉 가난의 이름으로 신학적 삼위일체가 성립된다.(미주 2) 하느님과 예수와 세상이 결국 선이고 가난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예수의 가난 속에서 하느님 선함을 보았고 피조물을 통해 하느님을 접할 수 있었다. 여기서 육화(肉化)는 지고선이 피조물 되었기에 세상에 제 것 없고 모든 것이 하느님께 속했다(시편24:1)는 믿음의 근거이겠다. 머리 둘 곳 없는 예수, 자기 뜻조차 제 것이라 주장치 않는 십자가, 바로 그것이 가난의 신비이자 기쁨이었다.

가난에의 동화가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그리스도 신비주의였던 것이다. (원)죄란 이점에서 하느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행위이겠다. 하느님 것인 선악과의 열매탈취가 바로 그 원초적인 행위이다. 반면 이렇듯 사취한 것을 공적인 것으로 돌리는 일이 구원임을 프란치스칸 소속 해방신학자들이 가르쳐 주었다. 프란치스칸 수도원이 당대의 그것과 크게 달라지는 근거도 여기서 찾을 일이다.

그리스도의 육화사건 계획, 창조와 타락 이전부터

프란치스코 사상을 후세에 전한 보나벤튜라는 하느님의 삼위일체를 ‘하느님의 자기 증여’ 혹은 ‘자기 확산적인 선(善)’으로 재개념화했다.(미주 3) 지고선인 하느님이 자기 속에 함몰되지 않고 세상에로 자신을 증여, 확산하는 행위가 바로 삼위일체의 본뜻이라 한 것이다. 개신교 신학자 콕스(H. Cox)는 이를 하느님의 통교적인 권력분화라 명명하였다.(미주 4) 자기 창조능력을 순차로 흙과 자연 그리고 사람에게 나눠 주었다는 것이다. 후술할 주제이지만 자본주의 한계극복을 위해 회자되는 순수증여란 말이 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의 것을 나누는 경제행위를 뜻한다.

이점에서 하느님은 순수증여 행위의 원조라 할 것이다. 이는 결국 하느님이 가난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여 그는 온갖 피조물을 이 행위에 참여시키고자했다. 피조물 속에 내주한 선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믿었던 까닭이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다시 육화(肉化)였다. 이것은 피조물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일로서 개신교 신학이 전제했던 피조물의 전적 타락이란 개념과의 결별 내지 무화를 뜻한다. 오히려 이들의 고유함, 독특(다양)성을 그리스도의 우선성과 연결시키는 신학적 통찰은 지금껏 개신교 신학에서 부재했다. 생명외경의 신학자 알버트 슈바이처가 자연의 능동(생명)성을 말하지 않는 신학과 철학과는 상종치 않겠다고 말한 것(미주 5)도 아직 이 통찰에 이르지 못한 채 한 말이겠다.

그렇기에 보나벤튜라는 그리스도 육화를 창조 이전의 사건으로 보았다.(미주 6) 원죄사건 이전에 그것이 이미 계획되었다는 것이다. 주지하듯 개신교 주류 구속사 신학은 타락한 세상을 위한 존재사건으로서 예수 출생을 가르쳐왔다. 하지만 원죄 탓에 육화를 요청하지 않았기에 타락과 죄의 우선성은 여기서 포(파)기 될 수밖에 없다. 둔스코투스 말대로 육화가 원죄 탓이라면 그리스도가 오히려 빚 진자 되는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미주 7) 그리스도가 자유의지로 우리를 구원했기에 우리가 빚진 자 된 것이다. 우리는 그의 사랑에 끌려진 존재일 뿐이다. 이는 기독교 신학의 출발점을 원죄가 아닌 원(原)축복에서 찾자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일체 하느님 구원 사역에 우선하는 육화, 이것이 바로 인간을 포함한 온갖 피조물을 하느님의 선함에 참여케 할 근원적 힘인 까닭이다. 하느님은 예수에게 자신과 일치된 본성을 허락했고, 그것이 바로 가난과 겸손(순수증여) 인바, 그것으로 피조물을 돕고자 한 것이다. 일체 피조물에게 그리스도 인간성을 덧입히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었다. 여기서 마리아는 이런 인간성의 모상(Image)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피조물 역시 자신을 그리스도로 채웠기에, 즉 육화의 실재(Reality)인 까닭에 각기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고 선(善)을 이룰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잉태할 수 있다. 물론 지금처럼 인간이 지질학적 홀로세 시기를 살며 자신의 과도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점에서 기억과 지성 그리고 의지를 지닌 인간이 여타 피조물 보다 우월하지만 자신과 그들을 더 타락시킬 수 도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럴수록 피조물간의 유대를 가난과 겸손의 관계로 봤던 프란치스칸의 유산이 중요하겠다.(미주 8) 바로 이점을 ‘태양형제의 노래’가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피조물 속의 神의 육화, 그로인한 이들의 창조적 활동을 프란치스칸 전통은 ‘핵체이타스’란 말로 정의했다.(미주 9) 피조물들 각자의 개별화 원리를 뜻하는 말이다. 모든 개체가 밖과 구별되는 자기 고유한 정체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하느님에게만 온전히 알려지는 개체만의 본질적인 것이 사람뿐 아니라 자연 피조물에게도 있다고 했다. 인격/비인격의 경계를 뛰어 넘는 발상이다.

이에 더해 자기 개별화 과정 속에서 다른 존재들에게 도움을 주는 여여(如如)한 자연활동을 육화된 그리스도의 행함이라고 봤다.(미주 10) 자연의 창조성에 대한 대 긍정이라 할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돕듯이 자연 역시 인간에게 유익을 선물할 수 있으니 말이다. 마치 이타자리(利他自利)를 말한 불교의 연기설을 상기시키며 세상에 관계 아닌 것이 없다‘는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하늘로 하늘을 먹는다는 이천식천(以天食天)개념과도 유사하다.

신유학의 격물(格物)을 달리 표현한 진물성(盡物性)에 터해 자연계에 대속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한 다석 유영모의 생각과도 잇대어 있다. 자연을 그리스도의 육화로 봤기에 이처럼 동서 자연관의 회통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천지자강불식(天地自强不息)이란 『주역』의 말은 육화된 그리스도의 활동의 다른 표현이라 해도 좋다.

가난을 통한 세상의 완성

결국 삼위일체 신학, 선과 창조와 구원을 하나로 본 육화 신학은 ‘가난’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었다.(미주 11) 완벽한 가난, 곧 선이신 하느님이 세상에서 인간이 어찌 살아야 하는가를 적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세상을 치유하고 완성하는 길이 가난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이는 죄의 극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창조의 완성으로 이뤄진다. 물론 그 시대에 만연된 요아킴 피오레의 천년왕국설에 대한 응답일 수도 있겠다. 가난을 복원시켜 나름 종말의 때를 준비코자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종말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현 세상의 완성, 곧 피조물 전체를 하느님 목적(善)으로 이끄는 일이었다. 세상 끝(밖)을 세상 안에서 이루고자 한 것이다. 이점에서 프란치스칸에게 있어 가난은 세상을 완성시키는 길이었다. 가난을 통해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을 살릴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여여한 자연이 하느님 선을 드러내 세상을 유익하게 하듯 인간 또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내어 줘야 마땅했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행함’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따라서 프란치스칸에게 사(私)적인 것이란 존재치 않는다. 본래 존재하는 것 모두가 선물인 까닭이다. 만약 사적인 것을 취했다면 다시 공(公)적인 것으로 돌릴 책임이 우리들 몫이다. 필요를 위해 피조물을 만들지 않았고 사랑과 자유로 세상을 지었기 때문이다.(미주 12) 모든 존재가 신적 사랑의 대상인 바, 그럴수록 그것을 느껴 아는 은총의 감각이 필요하다.

여기서 은총이란 최상의 것을 값없이 얻었다는 삶의 고백일 것인 바, 공적인 것과 선물(은총)은 동의어가 된다. 프란치스코는 이를 무상의 감사(미주 13)라 일컬었다. 아무 것도 한 것 없으나 모든 것을 받았으니 말이다. 그럴수록 개인적 가난은 사회경제적 측면과 불이(不二)적 관계 속에 있다. 사적 가난과 사회적 가난이 동전 양면처럼 상호 공속(共續)적 관계를 지닌 것이다. 가난으로 세상을 치유, 구원해야 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인간에겐 가난이자 선이신 하느님 창조의 목적에 상응토록 피조된 세계를 만들 책임이 있다. 이 일을 위해 수도회가 생겼고 그를 ‘작은 형제회’라 칭했으며 수도자들을 양육한 것이리라.

필자는 프란치스코 신학과 영성 속에서 빈부 격차를 야기한 자본주의 문명의 치유 내지 교정자의 역할을 보았다. 지금 인류가 당면하는 팬데믹(Pendemic) 상황은 자연과 인간을 약탈한 인류문명의 귀결일 것이다. 백신을 만들어 바이러스를 이겨 보겠다는 과학기술적 시도는 결코 전리(全理)일 수 없다. 변종된 인수(人獸)공용의 바이러스가 거듭 생겨나는 탓이다. 하여 학자들은 근본적 치유책으로 생태백신과 행동백신을 말하기 시작했다.(미주 14) 종래와는 다른 인간 행동으로 자연을 살릴 때 비로소 이 상황을 종료시킬 수 있다는 발상이다.

여기서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인간과 자연을 복원시키는 최적의 백신이라 말 할 수 있다. 가난이 육화된 하느님의 존재양태이기에 인간 역시 이에 합당한 존재가 되어야 옳고 이런 인간 행동이 결국 자연의 독자성, 고유성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탐욕이 자연서식지를 빼앗고 그의 변별성을 훼손했기에 팬데믹 세상이 도래했다면 이제 신의 존재양태인 가난을 통해 인간과 자연을 상생시켜야 할 절대 절명의 시간에 이른 것이다. 더구나 종교들마저 자본주의 탐욕의 늪에 빠져 있기에 프란치스칸 영성의 재(再)점화가 여실히 요구된다.

탈인간, 탈성장, 탈서구, 탈종교

이점에서 학자들 중에는 다음 4가지 ‘탈(脫)’-탈인간, 탈성장, 탈서구, 탈종교-개념을 갖고서 인류 역사를 팬데믹 이전과 이후로 나누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런 역사 구별이 이론이 아니라 실제가 되려면 반듯이 하느님과 선(善), 가난을 함께 보는 프란치스칸 육화 신학이 작동되어야 옳다. 이점에서 프란치스칸 영성은 오늘 인류에게 4개의 ‘脫’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추동하고 있다. 필자가 16세기 종교개혁이 2세기 앞서 프란치스코에게서 일어났기를 바랐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먼저 탈(脫)인간은 인간중심주의와의 결별을 뜻한다. 지금껏 인간이 자연에 대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역할을 했었다. 일체 자연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이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탄생, 작동되어 과학혁명의 근간을 이룬 것이다. 자연을 ‘마녀’로 은유했던 중세, ‘창녀’로 비유했던 근대 모두 자연을 지배대상으로 본 이념의 표현들이었다. 인격을 지닌 인간만이 하느님 모상이고 자연은 하느님의 흔적일 뿐이라 본 신학도 인간중심주의를 강화시켰다.

하지만 팬데믹 시대는 이런 견해로부터의 ‘탈’(脫)을 요한다. 더 이상 이런 이데올로기가 작동하지 않는 세상을 희망하고 있다. 이점에서 프란치스칸의 육화신학은 수 백 년을 앞서 탈인간중심주의를 표방했다. 저마다 고유성을 지닌 하느님의 육화라 보았고 각각의 모든 피조물을 선(善)이라 보았던 까닭이다. 태양을 비롯한 온갖 자연을 하느님을 표현하는 신적 계시로 격상시킨 것은 놀라운 발상이었다.

최근 동물신학이 출현한 것도 이런 선상에서 이해해도 좋겠다. 하느님은 인간과 인격적으로 관계하듯이 모든 피조물과 각기 그들 방식으로 교제하시는 분이란 사실을 각성할 때가 된 것이다. 그동안 수없이 인간중심주의의 종언을 말해왔으나 이제는 정말 그 말 속에 담기 뜻을 실현시켜야만 한다. 인간 종 자체가 지구상에서 멸종치 않으려면 말이다.

‘탈’(脫)인간은 자연스레 ‘탈’(脫)성장을 요구한다. 주지하듯 성장은 욕망의 다른 표현이다. 주지하듯 자본주의는 인간 욕망을 추동하여 GDP 위주의 성장을 도모하는 근자에 생겨난 서구 이념이다. 자연을 물질(수단)로 여기며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할 뿐이다. 욥기 서문에 언표 되었듯이 물질로 물질을 바꾸다가 자신들 생명을 물질을 교환시키는 마(괴)력을 지녔다. 성장(시장)신화가 이 시대의 하느님이자 종교가 된 결과였다. 이 땅의 욕망지수-물질욕망, 성적 욕망, 성형욕망-가 OECD가입국 중에서 가장 높다하니 결코 예사롭지 않다.

하지만 금번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류가 자신도 멸망할 수 있는 하나의 생명 종에 불과한 사실을 깨닫게 했다. 지속된 성장이 아니라 지구 생태계에 적응하는 것이 우선 과제인 것을 환기시킨 것이다. 그래서 세계적 차원에서 그린 뉴딜이 언급되었다.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자본주의, 그 멸망을 지연시키기 위해 ‘기본소득’이란 개념도 등장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자발적 가난을 촉발, 심화시키는 신인류의 출현, 단순성을 최고 가치로 삼는 공동체가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이유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칸에게 있어 ‘작은’이란 말이 지닌 뜻이 중요하다. 필자 역시 동일 차원에서 ‘개신교 내에서 ’작은교회‘ 운동을 펼친바 있다. 여하튼 탈(脫)성장을 위한 노력은 지금 자본주의 경제체제와의 영적 투쟁의 의미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탈(脫)서구는 탈(脫)세계화와 같은 의미이겠다. 주지하듯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시작된 신자유주의 체제는 세계를 단일 시장체제로 편입시켰고 지역(local)을 붕괴시켰다. 여기서 세계화는 서구화와 뜻이 같았고 이것은 결국 다양성을 멸(滅)하는 획일화 문명을 초래했다. 이와 맞물려 생태계의 붕괴도 가속화 되었다. 지역 문화의 다양성과 생태적 다양성이 한 몸을 이뤘기 때문이다.

금번 코로나 사태로 세계화 시대가 막을 내렸다. 정확히 말하면 서구의 종말을 알린 것이다. 서구는 노동집약적인 제조업을 3세계 국가들에게 내맡긴 채 자신들은 무기 산업을 비롯한 소위 4차 산업에 주력했다. 그 결과가 선진국들의 마스크 대란이었고 상대적으로 큰 희생을 야기, 가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서구가 쌓고자 했던 바벨탑이 졸지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평등의 가치를 삼킨 자유는 결국 탈(脫)서구의 길로 인류를 나서게 했다. 더 이상 서구가 ‘노말’(Normal)일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한 것이다.

서구 개신교가 자본주의를 잉태했으나 종교마저 삼켜버린 자본주의적 서구는 미래를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개인화된 서구는 마스크를 거부했으나 이 땅의 사람들은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위해 마스크를 착용했다. 이로써 동양열등주의는 더 이상 자리할 여지가 없어졌고 아시아적 가치가 다시 소중해졌다. 가톨릭교회가 가난과 생태 문제와 함께 토착화를 21세기 최대 과제로 여기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프란치스칸 작은 형제회 또한 자신들 영성의 토착화를 중심 과제로 내걸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탈(脫)종교, 곧 제도종교로부터의 일탈이다. 제도로서의 종교시대는 갔으나 영성으로서의 종교성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가 되었다. 물론 제도 없는 종교는 위험할 수 있겠으나 추세는 멈출 수 없다. 예수 사후 성전휘장이 찢어진 사건 이래로 중개자의 종교는 사라졌어야 했다. 하지만 2천년 그리스도교회는 동학 식(式)의 표현대로 향벽설위(向壁設位)의 종교로 존재해왔다. 하지만 인간 속에 내주하는 하느님, 곧 향아설위(向我設位)의 영성이 더 없이 중요하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음을 잊고 사람을 안식일(종교)의 종삼은 현실을 팬데믹 시대의 개신교회를 통해서 여실히 경험할수록 말이다.

종교는 일종의 삶의 양식으로서 일상 속에서 진가를 발휘해야 옳다. 하지만 제도로서의 종교는 성도를 조직의 일원이자 자신들 신조의 충성자로 이해할 뿐이다. 하지만 지속적인 비대면 예배양식으로 인해 제도로서의 종교는 점차 힘을 잃어 갈 것이다. 이점에서 가난이란 삶의 양식을 가르쳐 전한 프란치스칸 영성은 종교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창립 이후 프란치스칸 형제회는 교황청으로부터 인가 받지 않는 수도회 회칙을 갖고 자신들 공동체를 이끌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으나 종교를 제도가 아닌 삶의 양식으로 이해한 결과가 아닐 듯싶다. 시대적 한계로 교황청과 결별이 어려웠고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었으나 루터 훨씬 이전에 그 맹아를 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루터가 설한 3개의 ‘오직’(Only)교리가 인간 욕망을 부추겨 자본주의와 짝한 현실에서 프란치스코의 ‘가난’ 영성은 그리스도교 자체를 해방시키는 신(新)동력이 되었으면 좋겠다.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지닌 가톨릭교종의 저서 『복음의 기쁨』과 『찬미 받으소서』(미주 15) 속에 이런 희망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가톨릭 성도들 모두가 같은 소망을 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미주

(미주 1) 윌리함 쇼트, 『가난과 기쁨- 프란치스칸 전통』, 김일득 모세 역 (서울: 프란치스코 출판사, 2017), 60 이하.
(미주 2) 『가난과 기쁨』, 61 이하.
(미주 3) 김일득, 『프란치스칸 경제』 (서울: 프란치스코 출판사, 2016), 39.
(미주 4) H. 콕스, 『신이 된 시장』, 김창락 역 (서울: 문예출판사, 2018). 본 책 결론 부분을 보라.
(미주 5) A, Schweitzer/F. Buri, Existenzphilosophie und Christentum, Briefe 1935-1964, C.H. Beck Muenhen 2000, 90-92.
(미주 6) 『프란치스칸 경제』, 61.
(미주 7) 『가난과 기쁨』, 83.
(미주 8) 『프란치스칸 경제』, 50.
(미주 9) 『프란치스칸 경제』, 61.
(미주 10) 『프란치스칸 경제』, 61-62. 이 책 각주 111을 보라.
(미주 11) 『프란치스칸 경제』, 46.
(미주 12) 『프란치스칸 경제』, 54.
(미주 13) 『프란치스칸 경제』, 166.
(미주 14) 이 말은 우리나라 최고 생태학자로 알려진 『통섭』의 번역자 최재천 교수의 증언이다.
(미주 15) 교황문헌, 『찬미 받으소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2015.

이정배 교수(顯藏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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