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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둘째 주, 마음의 상처와 마주한 나에게(사 45:18-25; 롬 15:4-13; 눅 1:26-38)대림절 둘째 주일(12월6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0.12.04 16:48

1. 회개와 평화의 촛불을 밝히며

▲ 대림절 둘째주, 회개와 평화의 촛불

대림절기에는 다섯 개의 초를 사용하여 순서대로 주일마다 불빛을 하나씩 늘려가면서 밝힙니다. 이 촛불은 세상의 빛(사랑)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계시기 때문에, 초의 색깔이 점점 밝아집니다(1. 진한 보라색 촛불 → 2. 보라색 촛불 → 3. 연 보라색 촛불 → 4. 분홍색 촛불). 그리고 마침내 성탄절에는 하얀색 촛불을 켭니다. 오늘 대림 둘째 주일의 촛불은 회개와 평화의 촛불입니다. 아기 예수께서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돌이켜 회개하고 예수께서 오셔서 만드실 ‘혁명’인 사랑과 정의, 그리고 평화의 하나님 나라 촛불을 켜는 것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모두 상처를 입은 이들, 혹은 민족과 백성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은 바벨론 포로 살이를 하는 유다 백성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또한 서신서 말씀은 로마 교회 내에 바울의 사도직에 불만을 가진 이들 때문에 상처 받은 바울의 이야기이고, 복음서 말씀도 로마 제국 치하, 식민지이자 남쪽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받던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사는 처녀 마리아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곧 아기 예수의 잉태를 예고(수태고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시대를 통해, 상처와 마주한 이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이 오늘 세 본문 말씀입니다. 이것은 민족의 상처든, 개인적 상처든 자신의 마음의 상처와 마주한 이들에게 아기 예수님께서 이 추운 겨울날 우리들에게 오신다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2. 마음의 상처와 마주한 나에게

오늘 설교 제목에 힌트를 얻은 책이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와 마주한 나에게: 피하고 싶지만 마주해야 하는, 상처 셀프 치료 심리학』 (나무생각, 2019)이라는 책입니다. 독일 최고의 관계 심리학자인 ‘롤프 젤린’의 책인데,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상처를 주는 행동을 한다. 마치 자기가 자신의 적이라도 되듯이 말이다. 자기가 자신의 적이 되면 외부의 여러 적보다도 더 위험해질 수 있다. 내면의 공격자로부터는 쉽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내면의 공격자는 우리 마음속의 모든 움직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더 정확하게 가격할 수 있다. 자신에게 상처 주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매일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상처와 고통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수한 충돌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대나 요구와 충돌하는 타인의 말이나 행동으로 인해 상처를 입습니다. 때로는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로 가벼운 상처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아주 깊고 오래 지속되는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자세히 보면,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반응은 저마다 흥미롭습니다. 어떤 사람은 상처를 입는 순간 혼자 뒤로 물러나서 화를 삭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하소연을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신을 책망하고, 다른 사람은 상처받은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모두 상처에 대한 반응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상처를 외면하고, 묵과하려는 우리의 오랜 습관이 우리 스스로를 더 상처 입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젤린은 이렇게 말합니다. “상처를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제대로 마주하고 관통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상처는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고 그것을 뚫고 지나가야하는 것입니다. 특히 젤린은 상처를 ‘능동적인 정신적 상처’와 ‘수동적인 정신적 상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능동적인 정신적 상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시당하거나 따돌림 당할 때입니다.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소외당하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식민지배 하의 갈릴리 나사렛이 그랬고, 바벨론에서 포로살이를 했던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수동적인 정신적 상처’는 좀 다릅니다. 젤린의 말을 들어 볼까요?

“수동적인 정신적 상처는 이를테면 감사나 칭찬을 받지 못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예를 들어 온갖 노력을 쏟았는데도 기대했던 존중이나 사랑을 보답으로 받지 못하는 사람은 실망하게 된다.”

이것은 바울에게 해당되는 것이죠? 로마 교회를 위해 애정과 관심이 있었지만, 존중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수동적인 정신적 상처가 되었습니다. 아무튼 돌보지 않은 상처는 점차 고약해집니다. 흉터가 되어,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합니다. 따라서 마음의 상처와 고통은 무시하거나 외면한다고 해서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상처와 고통은 우리가 받아들이고 느낀 것만 소멸됩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감지한 상처와 고통만이 소멸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정체 모를 두려움이나 분노가 우리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면, 도망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하여 그 정체를 분명하게 파악해야 고통이 해소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통은 사는 동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 삶을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것도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젤린의 말을 들어볼까요?

“그럼에도 고통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정신적 고통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의 고통, 나아가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 모든 생명체의 정신적 고통이 우리에게 뻗쳐 있다. 이러한 고통은 현재 모습의 지구가 우리의 고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정신적 고통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현실이라고 정의한 것의 편협함 속에 갇히지 않게 해준다. 정신적 상처는 언제 어디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는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동시에 더 많은 인간성을 실현하고 우리가 상황의 힘에 굴복하지 않도록 지속적인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동경과 바람을 일깨우고 우리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것, 이로 말미암아 발전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바로 고통이다.”

지금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 주는 긴장과 고통이 없는 삶이 아닙니다. 그러한 고통과 긴장을 직시하고, 공감을 통해 따뜻한 배려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상처를 주는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새롭게 만들어 가는 삶인 것입니다. 따라서 상처는 피하고 싶지만, 그 상처를 주는 사람들과 마주해야 하는 세상입니다.

구약 시대 강대국 바벨론이나 신약 시대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유다민족과, 또한 같은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지만 바울에 대한 믿음이 없는 교인들에게 느끼는 바울에게, 그리고 마음의 상처와 마주한 저와 여러분들에게 오늘 세 본문 말씀은 놀라운 깨달음을 던져 줍니다. 결국 아기 예수께서 오시면 이렇게 마음의 상처와 마주한 이들의 아픔과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림 둘째 주, 마음의 상처와 마주한 여러분들에게 아기 예수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3. 너희는 모여 오라! 함께 가까이 나아오라!

▲ 고레스 대왕과 이란 파사르가데에 있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왕의 무덤

먼저 구약의 말씀을 볼까요? 오늘 구약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도구인 바사제국 황제 고레스(키루스 2세)의 등장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레스는 바벨론에 의해 포로 된 유다민족을 본국으로 귀환하도록 조서를 내립니다. 곧 바사 왕 고레스를 통해 하나님은 마음의 상체를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18)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그곳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하시고 또한 정의와 정직을 그 속성으로 하시는 하나님께서 야곱 자손을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감추어진 곳과 캄캄한 땅에서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야곱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혼돈 중에서 찾으라고 이르지 아니하였노라. 나 여호와는 의를 말하고 정직한 것을 알리느니라.”(사 45:19)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살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아, 너희는 모여 오라! 함께 가까이 나아오라!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들이니라. 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0-21)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전능을 세우십니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사 45:22-23)

하나님은 스스로를 공의의 하나님으로, 전능하신 분으로 소개하십니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를 마주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사 45:24-25)

4. 서로 뜻을 같게 하여 주사

서신서 말씀을 볼까요? 서두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본문 말씀인 로마서 15장은 바울이 로마 교회 내에,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불신이 있기에 자신의 이방인 사도직에 대한 변호를 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교회 공동체 내에 이러한 불협화음은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따라서 바울의 마음 속 상처를 엿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상처를 극복하고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 뜻을 같이 하자고 권면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4-7)

특히 자신의 이방인 사도직에 대한 변론으로, 로마 교회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며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할례의 추종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육신의 할례나 규약의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강조한 바울이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받았으면 이렇게 말했을까요? 그러나 이방인들의 사도답게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곧 화해와 사랑이, 자신의 교리나 사상보다 중요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말씀이니, 말씀을 꼼꼼하게 보겠습니다.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롬 15:8-9)

이렇게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열방 중에서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실 로마교회는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이방인과 유대인의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결국 이새의 뿌리에서 나오는 메시아는 유다뿐만이 아니라, 열방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롬 15:10-12)

자신이 받은 마음의 상처를 예수께 소망을 둠으로 화합의 장을 열었던 바울의 믿음의 경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5.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복음서 말씀도 만찬가지입니다. 사실 본문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예고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눅 1:26-30)

갈릴리 나사렛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요 1:46)”라고 할 정도로 별 볼일 없는 동네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마 2:1),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유년 시절부터 예수께서 생활하셨던 곳이 나사렛이었기 때문입니다(마 2:23).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마 26:71, 요 18:5)’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자신의 고향으로 나사렛을 생각했습니다(막 6:1-6).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사렛 출신이라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으셨습니다(요 1:46, 7:52). 아니, 나사렛뿐만 아니라, 갈릴리 전체가 업신여김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남쪽 유다 지역의 유대인들에게 갈릴리는 이방 지역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갈릴리를 ‘이방의 갈릴리(사 9:1, 마 4:15)’라고 부르며 멸시했던 것입니다(요 7:52). 아무튼 이러한 갈릴리 나사렛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눅 1:31-33)

여기서 큰 자가 된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로마 제국 치하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민족과 또한 같은 동족들로부터 멸시를 받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소식이 된다는 것 아닌가요? 그러나 마리아는 그것을 믿지 못합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4-35)

사실 지역적으로 갈릴리 나사렛도 이방의 도시였지만,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의 결혼 전 잉태도 유대 율법에 의하면 ‘돌에 맞아 죽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이 일이 가능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우리를 덮으시면 가능합니다. 천사는 그 예를 지난주 말씀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예를 들어 이렇게 설명합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 1:36-38)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습니다. 결국 마리아는 말씀에 순종합니다. 바울도 서신서 본문 말씀인 로마서 15장 13절에서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성령의 능력을 고백했죠? 마리아도 성령의 능력에 순종했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경험과 능력 밖에 있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불안하지만 받아들이고 수용하여 이렇게 새 역사를 여는 마중물이 되는 것입니다.

▲ 카라바지오의 <수태고지> 16세기

위 그림은 16세기 카라바지오의 <수태고지>입니다. 발견 당시 원화가 훼손된 것을 오랜 시간에 걸쳐 복구한 그림입니다. 카라바지오의 이 작품은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어둡고 강렬한 흡인력이 돋보입니다. 기묘한 자세로 공중에 떠 있는 천사는 몸의 절반, 즉 왼편이 짙은 어둠 속에 묻혀 있습니다. 천사의 표정이나 눈빛을 확인할 수 없는 까닭에 전체적으로 불안한 분위기가 엿보입니다. 또한 천사의 맞은편 아래쪽에 무릎을 꿇고 있는 마리아의 겸허한 자세와 마리아를 향한 천사의 무언의 손짓에는 거부할 수 없는 권위가 엿보입니다. 이렇게 말씀에 순종하는 마리아의 겸손한 자세와 대비되는 천사의 압도적인 분위기가 눈길을 사로잡는 <수태고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느덧 겨울바람이, 두툼한 옷을 입고 있어도 날카롭게 옷 사이를 파고들어 속살을 차갑게 찌릅니다. 이제 제법 많이 추워졌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들의 마음에 따뜻한 봄날의 햇살이 비춰지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의 상처를 마주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그 상처가 ‘능동적인 정신적 상처’든, ‘수동적인 정신적 상처’이든,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는 이 대림절기에 그 모든 상처를 보듬어 주신 성령의 위로와, 지극히 높으신 분의 능력과 아기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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