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의미를 아는가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예수(요한복음 13:12~15)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1.02.24 15:26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수요일(2/17) 곧 재의 수요일에서 시작하여 부활주일(4/4) 전날까지 주일을 뺀 40일간의 기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은 고난의 의미를 새기며 우리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절기입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첫 주일 우리는 인상깊은 요한복음서의 말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식사하는 자리에서 일어난 일화를 전하는 말씀입니다. 공관복음서에도 병행되고 있는 유사한 이야기(마태 26:17~25; 마가 14:12~21; 누가 22:7~14)는 이른바 최후의 만찬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앞둔 시점에 이뤄진 식사 장면이고, 또 바로 그 자리에서 유다의 배반이 예고되었다는 점에서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유사하지만, 꼭 그렇게 일치하지만은 않습니다. 공관복음서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 날, 곧 유월절 전날 일어난 것으로 전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은 그 전이기는 하되 조금 더 막연하게 그 시점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차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그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데, 요한복음서에서만 그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모여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한 제자의 배반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죽음을 앞둔 시점의 긴장감을 전해주고 있는 점은 비슷하지만, 요한복음의 이야기가 훨씬 극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당신의 삶과 죽음을 응축하는 상징적 행위와 한 제자의 배반을 극적으로 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이야기의 한 대목,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바로 그 다음에 제자들에게 전하는 말씀만 함께 읽었지만, 그 이야기 전체를 환기해볼까요? 이 이야기의 첫 대목은 유월절 전 어느 날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야 할 때를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전합니다. 그 이야기와 더불어 곧바로 가룟 유다의 배반을 예고합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사랑을 베푸셨지만 그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성취되지 않은 현실을 예고하는 서설적 이야기입니다. 이로써 이야기는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그 다음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행동을 개시합니다.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후,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깜짝 놀랍니다. 당연했을 것입니다. 관례상 누군가의 발을 씻겨주는 일은 아랫사람들의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종이 주인의 발을 씻겨준다든지 아내가 남편의 발을 씻겨준다든지 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종과 자유인의 구별이 없고, 철저한 성평등이 이뤄져야 한다는 오늘의 관념과 달리 명백한 위계질서가 당연시되던 세계 안에서의 통념이이요 관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지엄하신 주님이요 선생님인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다니 베드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만류하는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알지 못하나 그 뜻을 알게 될 테니, 받아들이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지금 이 행위보다 더 철저하게 자신을 내려놓는 당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자신을 내려놓는 모습을 예고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사코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그때서야 베드로는 그렇다면 자신의 온 몸을 씻어달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는 듯합니다. 발을 씻겨 주는 행위가 특별한 관계의 형성을 뜻한다면 더 찐하게 해달라는 요구입니다. 여전히 베드로는 그 진정한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그렇게까지 해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며 다시 긴장감을 자아내는 말씀을 하십니다. 누군가 당신을 배신하게 될 것이라 예고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래저래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발을 씻겨준 것도 놀라운데, 그 누군가 당신을 배신한다고 하니 잔뜩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모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옷을 입고 식탁에 다시 앉으셔서 말씀하십니다.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내가 사실로 그러하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주었으니,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말씀은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에 충분히 그 요체가 드러나 있습니다. 섬김의 요체를 일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일관된 섬김의 길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그 행위는 세상의 질서를 완벽하게 뒤집어버린,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길을 보여준 상징적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펼치신 사랑의 방식이었습니다. 그저 주어진 조건 안에서 적당히 상대를 존중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역할을 전도시켜버린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그 점에서 일관됩니다. 성육신에서 십자가에서의 완전한 자기비움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일관된 것입니다. 그 점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것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온전히 응축해서 보여준 극적인 상징 행위였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의미를 알겠느냐 묻고, 나아가 당신을 선생으로 주로 고백한다면 마땅히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베드로에게 말했던 말씀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그렇게 동일한 삶을 산다면 당신과 상관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그 진실을 오늘 우리가 깨닫는다면, 여기에 달리 다른 해석을 덧붙일 필요가 없지만, 한두 마디만 첨언하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예수님의 행위는, 우선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성격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일관된 섬김의 길이 갖는 철저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William Hole(1846-1917), 「Jesus, with the twelve, partaketh of the passover feast in an upper chamber, washing the disciples' feet」 ⓒWikidpedia

죽음을 예고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미 앞서 말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철저한 자기비움을 뜻합니다. 지난 주간 우리 시대 또 한 분의 위인 백기완 선생께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분이 남긴 유산이 많지만, 널리 알려진 노랫말 가운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그것이 뜻하는바 아닐까요? 자신을 드러내 줄 수 있고, 자신에게 안온함을 주는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은 채 철저하게 자기를 비워버린 상태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렇게 완전하게 비워버린 그것이 곧 완전하게 사랑을 이룬 사건이라는 역설의 진실을 따릅니다.

세상 만민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내세울 수 있는 것 가운데 털끝만한 것 하나라도 완전하게 버리는 가운데 가능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완전히 벌거벗은 존재, 완전히 무력한 존재의 상태에서 세상을 인식할 때 세상의 진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들어온다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그 진실을 뜻합니다. 그 수난의 극치가 구원의 영광이 되는 역설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의 행위는 장차 이뤄질 그 십자가 사건이 지니는 의미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지금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입장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이지만, 그 진실을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다면 우리도 그와 같이 살라는 것인데, 우리들에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과연 어떻게 가능할지, 그것은 우리 안에 물음으로 안은 채 오늘 말씀이 주는 의미 가운데 또 하나의 측면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행위는 삶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섬김의 길이 갖는 철저성을 일깨워줍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평소 무리들 가운데서의 삶,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 자신을 완전히 비워버린 그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낸 공적인 성격을 지닌다면, 제자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발을 씻겨준 행위는 보다 내밀하고 친밀한 사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할 것입니다. 만천하에 드러난 공적 차원에서의 모습과 내밀한 사적 차원에서의 모습이 철저하게 일치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이 이야기는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공적 대의를 위해 내부의 희생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거나 얼버무리는 태도, 또는 극단적으로 표리부동한 태도가 아니라 철저하게 안팎으로 일치된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이야기의 서두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철저하게 섬김의 자세로 사랑을 완성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권위였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역시 설교자의 입장에서 모종의 어떤 가책을 느낀다 하더라도, 그 진실만큼은 분명히 선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그 말씀의 진실을 오늘 우리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이 이야기가 계속해서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는 것과 더불어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는 까닭이 바로 그 물음과 관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 아니 본보기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서도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줌으로써 섬김의 본을 보여주고 있는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배반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 성공과 실패의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입니까? 열두 제자 가운데 11:1이니 성공의 확률이 실패의 확률보다 높습니다.

그런데 잘 유의해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처음에 가룟 유다가 언급되었지만, 그것은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話者)의 입장에서 전하는 것일 뿐 그 사건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배반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유다 자신은 알고 있었겠지만, 다른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혹시 자신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뒤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래서 서로 얼굴을 바라다봤다고 되어 있습니다(요한 13:22). 모든 제자가 내면의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베드로에게서 보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준 그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처음부터 분명하게 인식되지도 않았습니다. 모두가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매달린 이후에도 도망갔다고 모든 복음서가 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갈등과 동요가 컸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그 점에서 베드로와 유다는 한 끗 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배반자 유다에 대한 예고는 유다만을 낙인찍어 도려내려는 의도라기보다 누구나 처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가볍게 이야기했지만 그래도 성공의 확률이 높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예수께서는 가룟 유다 때문에 당신의 사랑의 완성, 섬김의 길이 실패했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위기가 있을 수 있지만 끝내는 당신의 언행의 진실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내 밖에 내쳐진 어떤 존재가 아니라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갈등의 실체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스스로를 성찰하게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끊임없이 결단하게 합니다. 스스로 섬김의 본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누군가는 그 길을 따르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있는 예수님은, 실패를 강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따르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지는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진정한 섬김의 길, 거기에 진정한 구원의 빛이 있습니다. 그 진실을 믿고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그 진실을 믿고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1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