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문화 칼럼
영화 <자산어보>, 윤리학자와 생물학자, 그리고 양성균형론자최병학 목사의 <인문학으로 영화 읽기>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 교회) | 승인 2021.05.24 16:26

1.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역사평론가 이덕일 선생의 책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다산초당, 2012)은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의 삶과 죽음을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정조의 개혁 정책의 큰 힘이 되었던 이들 형제는 정조가 승하(昇遐)하자 곧 당쟁의 희생으로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둘째 정약전은 시대의 절망을 딛고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사물(해산물)에 관한 관심을 키워나갔고, 셋째 정약종은 고문 끝에 목이 잘리면서도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약용은 닫힌 시대에서 열린 사회를 지향했다는 이유로 유배를 받았지만, 많은 저술로 조선 시대 실학의 완성자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개혁과 수구 세력의 싸움은 끝이 없습니다. 옛날에도 그랬습니다. 그 싸움이 처절했던 조선 후기, 열한 살 때 부친 사도세자가 노론 벽파에 의해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정조는 반란과 암살의 위협 속에서도 초계문신(규장각에서 특별교육과 연구 과정을 밟던 문신) 제도 신설, 규장각 설치 등을 통해 신진 세력을 양성하며 사회경제적 개혁과 문예부흥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조심스레 관철해 나갔습니다. 이덕일 선생은 그 부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열한 살 때 부친 사도세자가 노론 벽파에 의해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본 정조는 서두르지 않았다. 부친을 죽인 세력에 둘러싸인 외로운 국왕이지만 미래는 그들의 것이 아니라 자신과 출입 금지에 물들지 않은 청년들의 것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그를 인내하게 했지만, 이는 부친의 원수와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맞대고 웃어야 하는, 인간의 한계를 넘는 일이었다. 그런 인내 속에서 정조는 신(新)세력이 성장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그런 정조의 기다림 속에서 정약용 형제가 자라고 있었다.”(제1장 ‘인연의 사람들’)

따라서 이렇게 힘든 개혁을 완성해 나갈 때 용상에서 정조가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 바로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입니다. 이들은 새로운 사상과 지식으로 무장한 청년들이었습니다. 막내 다산 정약용은 개혁 군주 정조의 오른팔로 500여 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을 완성해 낸 집념의 지식인입니다. 문학, 역사, 철학, 과학기술 등 모든 학문 분야를 섭렵하였으며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행정의 최일선에서 노력한 실천적 지식인입니다. 그러나 성리학의 틀 위에서 사고한 윤리학자입니다.

둘째 손암 정약전은 『자산어보(玆山魚譜)』(1801~1814) 서문에 나와 있듯, “자신은 흑산이다. 나는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어서 흑산이란 이름이 무서웠다. 자(玆)자는 흑(黑)자와 같다.”라고 쓸 정도로 시대의 어둠을 두려워했던 인물이었지만, 아우 정약용의 질문을 받으면 참고서적 하나 없는 흑산도에서 놀라운 수준의 식견을 보여주었던 든든한 형이었습니다.

약전은, 동생 약용은 물론 모든 사대부가 경전 연구에 매진하는 현실에서 오히려 민중의 삶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어류 생태 연구서인 『자산어보』나 정부의 소나무 정책을 비판한 『송정사의(松政私議)』 등을 집필하며 실학자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또한 정약전의 호기심은 끝이 없습니다. 우이도에서 살다가 홍어잡이 갔다가 표류하여 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 북경을 거쳐 귀국한 문순득(윤경호 분)을 만나 『표해시말(漂海始末)』(1805~1816)(1)도 씁니다.

약전과 약용이 제사 문제 등 성리학과 충돌되는 면 때문에 천주교를 버렸지만, 셋째 아우구스티노 정약종은 끝까지 신앙을 고수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조선 최초로 영세(세례)를 받은 이승훈은 정약용 형제의 매형이었고, 조선 천주교회를 창립한 시조로 꼽히는 이벽(李檗, 1754∼1786)은 그들의 큰형 부연 정약현의 처남이었습니다. 약종은 양반 지식인 신자로서 자신의 역할이 교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일임을 깨닫고 조선 최초의 천주교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집필합니다. 주자학의 한계와 고정관념의 세계관을 타파하고 서구의 종교사상을 새로운 의식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였던 남인신서파(南人信西派)의 대표적 저술입니다.

아무튼 주자학 유일사상과 노론 일당 독재의 폐쇄 체제에서 이들 정 씨 형제들의 미래와 선택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정씨 집안뿐 아니라, 조선 민중과 백성들의 미래도 그러했습니다. 결국 큰형인 정약현은 온갖 굴욕 속에 묵묵히 집안을 지켰지만, 둘째인 정약전은 피안의 장소로 사물(해산물)을 선택했고, 셋째인 정약종은 천주(天主)를 택했으며, 넷째인 정약용은 학문을 통해 세상을 바꾸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2. 영화 <자산어보>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는 유배지인 흑산도로 가는 배 안의 정약전을 비춰주며 시작합니다. 서학인 천주교를 탄압하는 조정을 고발하는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2)를 쓴, 맏형 정약현의 사위 황사영(김준한 분)이 체포되고, 정약전(설경구 분), 정약종(최원용), 정약용(류승룡 분) 삼 형제는 하루아침에 명문가에서 역적의 가문으로 내몰립니다. 역사는 이것을 신유박해(辛酉迫害)(3)로 기록합니다. 결국 셋째 정약종은 참수되고, 둘째 정약전은 흑산도로, 막내 정약용은 강진으로 귀양살이를 떠나게 됩니다. 물론 약전은 “끝까지 견디라. 살아남으라.”라는 정조의 말을 기억합니다. 그럼에도 흑산도 가는 길은 두렵습니다.

강진으로 귀향 간 정약용은 그곳에서 『목민심서』(1818)와 『경세유표』(1817)를 저술하며 후학들을 가르치고,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은 어부 창대(변요한 분)를 만나 그의 해박한 해산물에 대한 지식을 도움받아서 『자산어보』를 씁니다. 영화는 여기서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창대의 캐릭터를 발견하여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아무튼 영화 속 약전에게 도움을 준 창대는 진사의 서자로 태어나 학문을 배워 출세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어부입니다. 유배지에 오며 호기심을 잃어버렸던 약전은 흑산도에서 창대를 만나 다시 호기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창대를 통해 두 번이나 목숨을 건진 약전은 창대와 친구가 됩니다.

약전은 애매하고 끝 모를 사람 공부 말고, 자명하고 명증한 사물 공부에 눈을 돌리는데, 사물로 자신을 잊어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내 지식과 너의 물고기를 바꾸자”라는 약전의 말에 글공부하고 싶은 창대는 약전에게 때로는 스승이 되기도 하고, 제자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창대는 약전으로부터 학문을 터득합니다. 마침내 문리(文理)가 트여 출세하고자 아버지 장진사(김의성 분)를 찾아갑니다. 창대는 약전에게 “저는 자산어보 보다, 목민심서의 길을 택허겠습니다.”라며 진사 아비 품과 임금 품에 안기려고 약전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시험에 응시하지만 떨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실력보다는 당시 사대부 자제들이 뇌물을 주고 벼슬을 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대의 아버지 장 진사는 나주 목사에게 창대를 소개해 주며 귀띔합니다. “양반은 걸음걸이가 쌍놈들과 다르다”, “목사 양반 밑에서 시상 물정부터 배워.”라며 세상을 살아가는 양반의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나주 목사 밑에서 글에서 배운 대로 정치를 하려고 했으나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백성들이 고통받는 시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습니다. 특히 영화는 조선 후기 당시 부패한 관료들의 등쌀에 고통받는 백성들의 모습이 많이 나옵니다. 죽은 자와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세금을 거두는 횡포에 항의하는 한 백성은 자신의 성기를 낫으로 자르고 자신을 저주하며 죽어갑니다. 그 세상을 감당할 수 없었던 창대는 “배운 대로 못 살면, 생긴 대로 살아야지요.”라고 말하며 벼슬을 버립니다.

결국 영화는 우이도에서 세상을 떠난 약전을 조문하고, 흑산도로 돌아오는 창대의 가족을 비추며 끝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리고 흑산도 섬이 흑백에서 칼라로 바뀌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3. 윤리학자 약용과 생물학자 약전, 그리고 페미니스트 가거댁

『자산어보』에는 물고기 도해나 그림(해족도설)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동생 약용과 소식을 주고받았던 약전이 동생 약용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약용은 윤리학의 입장에서 생물학을 지향했던 약전을 경계했습니다. 약용에게 중요한 것은 물고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아니라, 그 지식이 현실의 성리학 질서에 어떤 교훈을 주고, 또한 이바지할 수 있는가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조선 시대는 ‘문자(文子) 우위의 문화’입니다. 약용은 ‘해족도설’을 구상했던 약전에게 학문의 종지(宗旨)를 지키라고 충고했습니다. 여기서 학문의 종지는 ‘효제충신(孝悌忠信)’이라는 유교 덕목을 근본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농포(農圃)‧의약(醫藥)‧역상(歷象)‧산수(算數)‧공작(工作) 등에 활용되어야 하며, 이것을 벗어난다면 책을 쓸 가치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약전은 동생의 이런 생각에 수긍은 하지만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윤리학자이기보다는 생물학자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동생의 충고를 완전히 무시하지 않았던 것은 두어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홍어가 교합 중에 한 쌍으로 올라오는 것을 설명하면서, “암컷은 먹을 것 때문에 죽고 수컷은 음탕함 때문에 죽는 것이니, 음란함을 탐하는 자들에게 경계가 될 만하다”라고 했습니다. 전복을 설명하면서도, 전복을 노리던 쥐가 전복에게 붙잡혀 밀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면서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도적에게 경계가 될 만하다”라고 했습니다.(4)

이 두 사례를 제외하면 정약전은 자연과학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그림에 부정적이었던 동생의 충고를 받아들여 해족도설을 포기했던 점입니다. 문자(譜)라는 ‘청각’에서 도상(圖)이라는 ‘시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갈림길에서 멈춰버린 것입니다. 그림으로 나가지 않은 글로 끝난 것입니다.

▲ 양성균형론자 가거댁

물론 영화는 이렇게 윤리학자와 생물학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페미니스트, 아니 양성평등이 아니라, 양성균형론자도 나옵니다. 바로 약전의 부인이 되는 가거댁(이정은 분)입니다. 가거댁은 성리학과 물고기 공부에 빠져 있는 약전과 창대에게 한 소리칩니다. “종자(씨)만 좋고 밭 귀한 줄 모른다. 씨만 뿌리면 뭐 하냐? 밭이 좋아야지! 자식들은 어미 귀한 줄 알아야 한다. 남자도 여자 귀한 줄 알아야 한다.” 이후 깨달음을 얻은 창대는 부엌일을 하게 되고, 약전과 가거댁은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4. 글과 말, 말과 글

이 영화의 로즈버드(영화의 핵심 사물)는 ‘글’입니다. 그림이 없는 글, 편지도 되겠고, ‘시(詩)’도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 ‘글’은 성리학의 사상 체제를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새로운 서학의 사상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글을 통한 말의 힘을 잘 보여줍니다. 대본을 읽어 보고 싶을 정도로 명대사가 끊임이 없습니다. “주자(朱子)는 참 힘이 세구나”, “한문 말고도 배울 게 천지다”, “홍어 댕기는 길은 홍어가 알고 가오리 댕기는 길은 가오리가 안다”, “외울 줄밖에 모르는 공부가 나라를 망쳤어.”

약전은 성리학으로 서양 기하학과 수리학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성리학과 서학이 결코 적이 아니다. 함께 가야 할 벗이지.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 또한 과학과 신학의 조화를 이미 알았습니다. “서양 사람은 지구가 둥근 걸 알면서도 천주를 받아들였다.”

물론 가장 큰 말의 힘, 곧 글은 글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날 창대가 약전이 책을 쓰지 않는 이유를 묻습니다. 동생 약용은 많은 책을 쓰는데 스승님은 왜 그런 책을 안 쓰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약전이 글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혁명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천주교의 가르침입니다. 동생 약용이 『목민심서』를 통해 지방 수령인 목민관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지역을 관리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처럼 성리학은 임금의 소리를 백성에게 어떻게 잘 들려주어야 하는가에 관심합니다. 이러한 성리학의 가치관에 대한 약전의 반박입니다. 약전의 쓰여지지 않은 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말은 이렇습니다.

양반, 상놈이 없는 세상, 주인과 노비가 없는 세상, 곧 임금이 필요 없는 세상입니다. 서학은 로마 황제가 주님이 아니라, 인간 예수,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약전보다 1,800여 년 전에 살았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따라서 배교했지만, 참된 예수의 제자인 약전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서학이든 성리학이든 좋은 것 받아써야지. 이 나라는 나 하나도 못 받아들인다. 이 나라의 주인이 성리학이냐? 백성이냐?”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약전이 창대에게 남긴 편지입니다. 창대가 세상에 나가 실망하고 돌아올 것을 알았던가요? 아무튼 혁명을 꿈꾸었으나, 글로 표현하지도 못하고 말로 외치지도 못한 호기심 많은 약전의 외로웠으나, 올곧은 삶을 잘 보여줍니다.

“창대야, 나는 흑산이라는 이름이 무서웠다. 너를 만나 귀향길에서 잃어버렸던 호기심을 되찾았다. 음험하고 죽은 검은색 흑산에서 그윽하고 살아 있는 검은색 자산을 발견하게 되었다. 창대야, 학처럼 사는 것도 좋으나, 구정물 흙탕물 다 묻어도 마다치 않는 자산 같은 검은색 무명천으로 사는 것도 뜻이 있지 않겠느냐?”

▲ 약전과 창대

미주

(미주 1) 1801년 12월 우이도(牛耳島 : 지금의 소흑산도)에서 문순득과 그의 작은 아버지 호겸(好謙)과 마을 사람인 이백근(李白根)·박무철(朴無碃)·이중원(李中原), 나무꾼 아이 김옥문(金玉紋) 등 6명이 흑산도 남쪽 수백 리에 있는 태사도(太砂島)로 홍어를 사러 갔다. 이듬해 1월 18일 돌아오는 길에, 우이도 서남 수백 리에서 표풍(飄風)을 만나 표류하다가 2월 2일에야 유구국(琉球國) 큰 섬의 양관촌(羊寬村)에 닿았다. 10월 7일 3척의 배로 중국을 향하여 출발하였으나 10월 7일 또다시 서풍을 만나 표류하였다. 11월 1일 여송(呂宋 : 지금의 필리핀)에 닿아 머무르다가 1803년 3월 16일 다른 사람들은 먼저 출발, 문순득과 김옥문은 남은 복건인(福建人) 25명과 같이 광둥(廣東)·아오먼(澳門)·북경(北京)·의주(義州)를 거쳐 서울에 도착하였고, 1805년 1월 8일 귀가하였다. 이 작품에는 중국·안남·유구·여송 등의 언어·풍속 등을 많이 소개하고 있다. 이 작품은 해양문학 자료로서 가치가 있으며, 한 사람의 경험을 듣고 자기의 체험처럼 사실화(寫實化)한 실기(實記)라는 점에서 기록문학적(記錄文學的) 가치가 있다. 부록으로 있는 112개의 유구어와 여송어는 귀중한 언어학 연구자료로 평가된다.
(미주 2) 황사영 백서는 조선에서,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信者) 황사영이 중국 로마 가톨릭교회 북경 교구 주교에게, 현재 혹독한 박해를 받는 조선교회 상황 보고와 그 대책을 흰 비단에 적은 밀서(密書)이다. 그러나 백서는 관헌의 손에 넘어가 조정을 아연케 하고, 천주교 탄압은 한층 심해졌다, 이 백서는 신유박해에 대한 귀중한 사료로 인정되었다.
(미주 3) 1801년(순조 1년)에 일어난 한국천주교회에 가해진 최초의 대대적인 박해이다. 일찍이 정조는 “사교(邪敎)는 자기자멸(自起自滅)할 것이며 유학의 진흥으로 사학을 막을 수 있다.”라고 생각해 적극적 박해를 회피하였다. 또한 천주교를 신봉하는 양반, 남인 시파(時派)의 실권자인 재상 채제공(蔡濟恭)의 묵인도 있었다. 그러나 정조와 채제공이 죽자, 정계의 주도 세력이 노론+벽파(僻派)로 바뀌면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가 어린 순조를 수렴청정하게 되자, 벽파는 남인 시파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대왕대비를 움직여 남인 시파와 종교적 신서파(信西派)에 대하여 일대 정치적 공세를 취하게 되었다. 벽파는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멸륜지교(滅倫之敎)로 몰아붙여 탄압을 가하였다. 또한 그의 배후 정치세력을 일소하고자 1801년 대왕대비 언교(諺敎)로 박해령을 선포, 전국의 천주교도를 수색하였다. 신유박해의 대표적 순교자로는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신부와 초대 교회의 창설자인 지도적 평신도들이었다. 주문모는 한때 피신하였다가 스스로 의금부에 나타나 취조를 받은 뒤,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그리고 초기 교회의 지도자이던 이승훈(李承薰)·정약종(丁若鍾)·최창현(崔昌顯)·강완숙(姜完淑)·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김건순(金健淳)·홍낙민(洪樂敏) 등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斬首)되었고, 왕족인 송씨(宋氏)와 신씨(申氏)도 사사(賜死)되었다. 한편, 지방교회 지도자들도 다수 순교하였다. 내포교회(內浦敎會)의 사도로 불리던 이존창(李存昌)은 공주에서, 전주교회의 지도적 교인이던 유항검(柳恒儉)·관검(觀儉) 형제는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그러나 살아남은 교도들은 위험을 피하여 경기도의 야산지대나 강원도나 충청도의 산간지방, 태백산맥·소백산맥의 심산유곡에 숨어, 천주신앙의 전국적 확산을 촉진하였다. 따라서 종래 지식인 중심의 조선천주교회가 신유박해를 전후하여 서민사회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미주 4) 김문기, 「『玆山魚譜』와 『海族圖說』- 근세 동아시아 어류박물학의 갈림길」, 『역사와경계』, 101권, 2016, 107 참조.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 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 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