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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사 42:18-43:7; 롬 10:5-17; 막 7:31-37)성령강림 후 열둘째주일(8월15일) 평화·통일주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1.08.12 21:02

1. 남과 북, 한국과 일본, 북한과 미국에 참된 소통이 시작되기를!

성령강림절기 마지막까지 예수님과 제자들의 치유 사역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나음을 받고, 자신이 구걸했던 이들이 있는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했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치유의 시작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로 이야기하면 교회에 사랑이 넘쳐 그 사랑이 세상으로 흘러가 세상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도 치유 사건이 계속되는데, 못 듣는 자의 귀가 열리고 맺힌 혀가 풀리는 치유 사건입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은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구약 말씀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잘 듣고 잘 보아도 귀머거리와 소경이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봐도 못 보는 것이고, 들어도 못 듣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제대로 봐야겠죠?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서신서인 로마서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먼저 제대로 전하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죠? 제대로 전해야 제대로 부르고, 올바로 증거 해야 올바로 듣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세 본문 말씀은 단순히 귀가 열리고 맺힌 혀가 풀리는 치료 사건을 넘어, 제대로 된 소통과 치유 사건을 통해 참된 회복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교단 총회가 지정한 평화·통일주일인데, 남과 북이, 또한 북과 미가 서로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기를 바랍니다. 제대로 들어야만 제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소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때 한반도에 전쟁이 없는 참 평화가 임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한일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 8월 15일 광복절입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분단의 씨앗이 잉태된 날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일본의 침략과 패망, 그리고 그 이후 신탁통치로 인한 비극이 6·25전쟁의 원인이 되었고, 지금까지 전쟁의 아픔과 분단의 비극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신탁통치(信託統治)란 ‘유엔의 신탁을 받은 국가가 유엔 총회 및 신탁통치 이사회의 감독을 받아 일정한 지역이 자체 통치 능력을 갖출 때까지 대신 통치해 주는 제도’입니다. 따라서 미국은 남한을, 소련은 북한을 대신 통치하게 된 것입니다. 남한의 경우,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제헌국회를 구성하고,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죠. 미군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로 권력이 이관되었습니다. 물론 전시작전통제권은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있습니다. 현재도 그렇습니다. 아직 온전한 주체적 국가 권력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 신탁통치 반대 운동

아무튼 분단 상황에서 좌우 이념 갈등, 그리고 남북 갈등은 고조되었고, 주변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에 의해 비극적인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전쟁 당사자인 미국과 북한, 중국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체결하여 지금까지 그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끝까지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휴전협정이 속히 종전 선언과 더불어 평화협정 체결로 전환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일본의 침략과 민족의 분단은 상대방의 아픔에 공감하는 참된 소통이 없어서 일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간 소통의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남과 북, 한국과 일본, 그리고 북한과 미국에 참된 대화의 장이 열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먼저 복음서 말씀을 볼까요? 예수님의 전도 여행과 치유 사역이 국내외 할 것 없이 온 지역에서 계속됩니다.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막 7:31-34)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그는 귀가 들리지 않아 사람들의 입 모양으로 소리를 흉내 내기에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습니다. 귀에 뭔가 막혀 있는 것이죠? 서로 소통이 안 될 때의 상황도 이와 같습니다. 현재 남북과 한일, 북미의 관계가 이런 모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죠? “에바다!”, 곧 “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막힌 것을 뚫고 소통하고, 교류를 통해 왔다 갔다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나요?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막 7:35).” 귀가 열렸습니다. 잘 들리게 되었습니다. 잘 들으니, 혀도 풀렸습니다. 서로서로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못 듣는 사람이 듣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한다!’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말 못하는 억압된 분위기를 깨뜨리고, 들을 수 없는 소외된 상황을 극복하고, 말하고 듣게 하셨다는 말씀이죠? 이것은 차별을 극복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먹고 마시고 듣고 보고 하는 모든 감각적인 것들을 골고루 나누는 평등 세상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3. 봉준호 감독, 세상의 모든 차별을 영상 이미지로 보여주다!

조금 지나간 이야기지만,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을 잠시 소개하고자 합니다. 사회학과 출신인 봉준호 감독은 세상의 모든 차별을 영상 이미지로 보여줍니다. 가령, <살인의 추억>(2003)이 국가의 차별이라면, <괴물>(2006)은 미국의 차별이고, <마더>(2009)가 모성의 차별이라면, <옥자>(2017)는 동물에 대한 차별입니다. 그리고 <설국열차>(2013)가 수평적인 차별이라면, <기생충>(2019)은 수직적인 차별에 관한 영화입니다.

물론 <기생충>에서는 ‘냄새’라는 아비투스(Habitus, 특정한 환경에 의해 형성된 성향이나 사고, 인지, 판단과 행동 체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계급 구성원들의 문화적 상징이나 행동 특성을 의미)를 사용하여, 전작들보다 좀 더 상징이 풍성해졌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만, 전작들에 나타나는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한 따스함 대신, <기생충>에서는 차가운 현실주의자의 냉소적인 시선으로 영화를 이끌어 갑니다. 물론, 여기서도 코믹적 요소는 빠뜨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양극화 되는 우리 사회에 대한 분노는 영화 미장센(Mise-en-Scène, 등장인물의 배치나 역할, 무대 장치, 조명 따위에 관한 총체적인 계획)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영화는 시퀀스(sequence, 몇 개의 관련된 장면을 모아서 이루는 구성단위)가 변할 때마다 ‘시의적절한’ 상징을 넣어주고, 공간의 변화(반지하와 높은 곳 박사장 댁, 1층, 2층, 지하, 거실, 산, 다시 반지하)를 통해 친절하게 희화화된 대한민국의 현실을 꼬집는데, 각 씬(scene, 장면)마다 봉준호 감독의 디테일은 기막히게 살아 있습니다. ‘악마’가 아니라, ‘의미’가 디테일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영화는 4년 3개월간 ‘박’사장이 지배했던 우울한 한국 사회를 축약해서 보여준 것입니다.

영화의 핵심 사물을 로즈버드(rosebud, 장미꽃 봉오리)라고 하는데, 봉준호 감독의 로즈버드는 단순합니다. ‘비’와 ‘(동)굴’이 꼭 나옵니다. <살인의 추억>에서 <괴물>, <마더>에 이르기까지! 비와 굴을 통해, 곧 ‘비굴한 한국인의 초상’을 봉준호 감독만큼 잘 보여준 감독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설국열차>와 <옥자>를 통해서는 한국인의 비굴함이 ‘세계인의 비굴함’으로 확장되었고, 이제 ‘보편적 비굴함’의 한계에서, 다시 <기생충>으로 새로운 로즈버드를 추가합니다. 그것은 바로, ‘냄새의 아비투스’입니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박 사장(이선균 분)과 그의 부인 연교(조여정 분)는 기사인 기택(송강호 분)과 기택의 가족에게서 나는 냄새를 맡습니다. 박 사장의 말대로, “노인 냄새도 아니고, 오래된 무말랭이? 행주 삶을 때 나는 냄새, 지하철 타면 나는 냄새 말이야.” 그런데 이 냄새가 선을 넘습니다. “김 기사가 선을 넘을 듯 말듯하며 선을 안 넘어. 그런데 냄새가 선을 넘어!”

▲ 박 사장의 말, “냄새가 선을 넘어!”

퇴근길 만원 버스 안이나, 심야의 지하철 안에서는 온갖 냄새가 다 납니다. 견디기 힘든 우리네 아버지들의 노동에 찌든 땀 냄새와 하루하루 버텨나가는 사람들의 술 취한 입 냄새, 경쟁에 짓눌린 학생들의 욕구불만의 냄새 등. 봉준호 감독은 영화 간담회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냄새를 맡을 기회가 없다. 동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행기만 해도 퍼스트와 이코노미로 나뉜다. 가정교사(운전기사, 가사도우미-필자 첨가) 등 이 영화에 나오는 상황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유일한 상황이다.”

특목고를 통해 아이들도 자본의 힘으로 서로의 냄새를 맡을 수 없도록 만든 우리 사는 세상에, 냄새의 아비투스는 더욱 강화됩니다(따라서 특목고 폐지, 서울대 폐지로 교육 정책이 바뀌어야 합니다). 아무튼 지하철을 타면 나는 냄새, 곧 대다수 한국인들의 냄새인 그 냄새에 박 사장 부부는 불쾌감을 느끼고, 멸시합니다. 왜냐하면 성향 체계, 곧 아비투스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4. 정치는, 배제된 자들에게 그들의 몫을 주는 것!

프랑스의 철학자인 자크 랑시에르(J. Ranciere)는 『감성의 분할: 미학과 정치』(도서출판 B, 2008)라는 책에서 민주주의와 평등 개념을 둘러싼 ‘정치’의 개념을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가령 ‘치안’(la police)과 ‘정치’(la politique)를 구분하며, 치안은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이해가 상충하는 개인, 집단 사이의 조정을 통해 합의를 끌어내는 것으로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는 아니라고 봅니다.

반면,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는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 즉 지배 질서 안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와 존재를 보이게 하고 들리게 하는 것입니다. 곧 정치적 대화와 권력의 행사에서 정당한 상대자(파트너)로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감성의 분할’(‘감성/le sensible’보다는 ‘감각적인 것’으로, ‘분할/le partage’보다는 ‘나눔/share’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불어의 원래의 뜻에 더 가깝습니다)이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이 분할되어 배제되는 것을 말합니다. 수도 서울의 부동산, 곧 아파트 문제는 바로 이러한 측면입니다. 서울에 있는 아파트에 입주하지 못한 이들을 배제된 존재로 만들고 비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한 대형들이 누리는 정치권력, 종교 권력에 ‘분할’, 곧 양질의 삶을 나눠 갖자는 것, 말 그대로 감성을 분할하자는 것이 참된 정치라는 것입니다.

결국 랑시에르에 의하면, 미학과 정치는 이러한 비존재로의 배제를 뚫고 일어서서 자신의 언어를 되찾고 보이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각자의 몫을 주장할 때, 즉 기존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뒤흔들어, 배제된 자들이 더 많은 몫을, 더 많이 공유하려고 할 때 비로소 진정한 정치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인 성령강림절 열한째 주부터 계속되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못 걷는 자, 못 듣는 자, 못 보는 자, 병든 자들이 걷고, 듣고 보고 치유함을 입는 것이 바로 ‘감성의 분할’이며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감각적인 것인,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것을 배제당한 이들에게 다가가 새 세상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복음을 ‘들려주고’, 생명의 떡을 ‘맛보게 하며’ 사랑의 연대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정치, 곧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정치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의 ‘치안’을 넘어, ‘제국의 힘에 의한 평화(Pax Romana)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반으로 한 평화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물론 영화 <기생충>은 안타깝게도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판타지로 보여주며, 다음을 약속합니다. 따라서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이 기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볼까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막 7:36)”, 지난주 말씀처럼 아직 예수님의 때가 아니기에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갑니다.” 경고하면 할수록 이 놀라운 치유 사건은 더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막 7:37).”

5.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

이렇게 예수님의 치유 사건은 못 듣는 자의 귀를 열게 하고, 맺힌 혀를 푸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구약 이사야 말씀은 잘 듣고, 잘 보아도 귀머거리와 맹인이라고 책망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개역개정이 어렵게 번역이 되었는데, 공동번역은 반어법 의문문을 써서 잘 번역하고 있습니다.

“귀머거리들아, 들어라. 소경들아, 눈을 똑바로 뜨고 보아라. 내 종과 같은 소경이 또 있으랴? 내가 보낸 심부름꾼과 같은 귀머거리가 또 있으랴? 나의 사명을 띠고 가는 자와 같은 소경이 또 있으랴? 야훼의 종과 같은 귀머거리가 또 어디 있으랴? 너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다.”(사 42:18-20)

사실 오늘 이사야 본문 전반부 말씀은 메시아로 인한 구원의 사건을 끝까지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이들, 곧 죄악을 일삼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자요, 종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못 듣는 자와 맹인이라고 부르며 탄식하고 계십니다. 영적인 무지와 완악함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구원의 사건을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그 결과 심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분노를 반어법 의문문을 써서 잘 표현하고 있죠? 결국 심판을 받아 노략을 당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구할 자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의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하게 하려 하셨으나, 이 백성이 도둑 맞으며 탈취를 당하며 다 굴 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 노략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 탈취를 당하되 되돌려 주라 말할 자가 없도다.”(사 42:21-22)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결과가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뒤에 올 일을 삼가 듣겠느냐? 야곱이 탈취를 당하게 하신 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약탈자들에게 넘기신 자가 누구냐? 여호와가 아니시냐?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 그들이 그의 길로 다니기를 원하지 아니하며 그의 교훈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을 이스라엘에게 쏟아 부으시매, 그 사방에서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사 42:23-2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의 구원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집념과 구원의 계획을 이사야 선지자는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이스라엘의 타락상을 책망하는 동시에 죄인이 회개하면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말씀을 볼까요?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네가 물결을 헤치고 건너갈 때 내가 너를 보살피리니, 그 강물이 너를 휩쓸어가지 못하리라. 네가 불 속을 걸어가더라도 그 불길에 너는 그을리지도 타버리지도 아니하리라. 나 야훼가 너의 하느님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내가 너를 구원하는 자다. 이집트를 주고 너를 되찾았고 에티오피아와 스바를 주고 너를 찾아왔다.”(사 43:2-3)

▲ 함의 후손

구스(에티오피아)는 함의 아들이죠? 스바는 구스의 아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셈의 자손입니다. 모두 노아의 자손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여 제사장의 나라로 삼고, 그들로 하여금 세상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계속해서 소개됩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4-7)

주변 강대국에 의해 노예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불러 모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래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보냄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6.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오늘 서신서에 나오는 바울 사도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복음을 거부하고 율법의 행위를 통한 자기 위를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구원하고자,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대조시키며 기독교의 구원론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론의 핵심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믿음의 의’이며 그것은 차별이 없습니다. 공동번역 말씀으로 볼까요?

“모세는 사람이 율법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그것을 지킴으로써 생명을 얻는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통해서 얻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누가 저 높은 하늘까지 올라갈까 하고 속으로 걱정하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기 위해서 하늘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누가 저 깊은 땅 속까지 내려갈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죽음의 세계에서 모셔 올리기 위하여 땅 속까지 내려갈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롬 10:5-7)

사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차별합니다. 자신들을 선민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율법주의에 빠집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다름을 틀림으로 이해하고, 서로 다른 차이를 차별하는 것에 익숙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북한과 북한사람들에 대한 선입견과 차별 의식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분단과 전쟁의 아픔이 자연스럽게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 도쿄 올림픽 한일 여자 배구 시합의 한 장면

2020년 도쿄 하계 올림픽(2021년 7월 23일-8월 8일) 이 끝이 났습니다. 김연경이 이끄는 한국 배구가 한일전을 통해 감동을 주었습니다만, 야구는 일본이 우승으로 우리는 노메달이라 실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아무튼 일본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지배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을 무시하죠?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계속 우깁니다. 따라서 우리도 일본을 무시합니다.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광복절을 앞두고 1990년 이후 한일 간 경제·경쟁력 격차 변화를 비교한 결과를 지난 8월 12일 발표했습니다. 전경련에 따르면, 거시경제 등을 분석해 국가경쟁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IMD(국제경영개발대학원) 순위를 살펴본 결과 1995년 각각 26위와 4위였던 한국과 일본의 순위가 2020년 23위, 34위로 바뀌며 한국이 역전했다고 밝혔습니다. 물론 지난 30년간 주요 경제지표에서 일본을 추월했지만, 기술경쟁력은 여전히 일본에 뒤져있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러나 S&P, 무디스, 피치 등 3대 국제신용평가기관에서 현재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은 일본보다 2단계 높다고 나왔습니다. 또한 물가와 환율 수준을 반영해 국민의 구매력을 측정하는 1인당 경상 국내총생산(GDP)도 구매력평가(PPP) 기준으로 2018년 한국(4만3천1달러)이 일본(4만2천725달러)을 추월했습니다. 이렇게 경쟁 관계에 있지만, 가까고도 먼 일본은 선의의 경쟁 상대로 중요한 대화의 파트너가 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8-10)

사도 바울은 구원에 관하여,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으로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1-13)

이 구원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여자나 남자도,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한 분이신 주님을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고 부요함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은 저 북녘 동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사람도, 중국 사람도, 미국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도 차별 없는 구원의 은총이 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차별 없는 구원의 은총은 전하는 이가 없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

전하는 자가 없으면 복음을 들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나아가 바울은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라고도 합니다. 곧, 복음 전파자를 보내야 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평화·통일주일을 맞아, 저 북녘 땅과 아직도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 선교사와 일꾼을 보내,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발걸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차별은 조건을 달 때 시작됩니다. 나 혹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구별함으로 차별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말씀이 우리에게 가까이 있고, 우리 입에 있고, 우리의 마음에 있으면, 차별을 넘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된 믿음으로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 말씀에 순종하여 참된 믿음으로 하나가 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6-17)

따라서 잘 들어야 합니다. 무엇을 잘 들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여 잘 증거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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