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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근본적인 변화의 첫 걸음나눔 가운데 깃든 삶의 신비(고린도후서 9:6~15)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1.10.06 01:00

사도 바울의 선교활동은 매우 복합적인 성격을 띱니다. 그저 복음의 진리를 선포한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잘 아는 대로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처하는 목회적 차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와 교회를 연결하는 사랑의 연대 또한 중요한 활동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바로 그 사랑의 연대를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가 유대 땅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헌금을 독려하고 이를 전한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그것이 갖는 의미를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그저 헌금이 갖는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바람직한 교회의 상, 나아가서는 장차 세상에서 이뤄져야 할 바를 선취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교회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또한 한편으로 유대 땅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유념하고 있어 교회 안에서의 상호관계 차원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교회들 간의 유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른바 교회적 교훈으로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관계 안에서 이뤄져야 할 보편적 교훈으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베푸는 이와 베풂을 받는 이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전망하며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인간의 행위가 초래하는 놀라운 결과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이야기는 교회내적 사건으로 한정되지 않고, 장차 세상에서 이뤄지기를 바라는 일이 교회 안에서 미리 선취된 모습을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인 고린도후서 9장의 내용은 바로 앞 8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헌금의 정신을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8장에서는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회, 곧 빌립보교회의 모범을 강조하고 있다면 여기서는 고린도교회에 대한 권면이 초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열성을 다하였지만, 각각의 지체가 어울려 하나의 몸을 이루는 교회의 정신에 철저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유대 지역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을 알고 그들을 돕기 위해 자신이 적극적으로 관여한 교회들에 헌금을 독려했습니다. 이미 빌립보교회는 그 모범을 보여줬습니다. 이제 고린도교회가 그 선한 일에 동참하기를 사도 바울은 바라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요점은 이러합니다. 적게 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 각자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하고,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온갖 은혜를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일에 여러분이 쓸 것을 언제나 넉넉하게 가지게 되어서, 온갖 선한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에 기록한바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뿌려 주셨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있다’ 한 것과 같습니다.”(9:6~9)

헌금의 근본 자세와 그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뜻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다시 반복됩니다.

“심는 사람에게 심을 씨와 먹을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씨를 마련해 주시고, 그것을 여러 갑절로 늘려 주시고, 여러분의 의의 열매를 증가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모든 일에서 부요하게 하시므로, 여러분이 후하게 헌금을 하게 될 것입니다.”(9:10~11)

이 말씀은 종종 오용됩니다. “적게 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라는 첫머리 말씀, 그리고 계속 반복되는 말씀으로 “넉넉하게 될 것이다.” 하는 말씀 때문일까요? 헌금을 일종의 투자행위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풍토가 있습니다. 당연히 많이 투자하면 많은 배당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이 헌금하면 역시 많은 보상, 그것도 물질적인 보상을 충분히 받는 것으로 여기는 풍토가 한국교회 안에는 만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첫머리에서 “각자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하고,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라고 한 말씀이 핵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외적인 동기가 우선되어서는 안 되고 그야말로 순수한 내적 동기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를 과시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누군가를 지배하기 위한 것이 베풂의 동기, 헌금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까워하면서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어떤 체면 때문에 하는 상황을 말합니다. ‘마지못해 하면서 한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키지 않지만 어떤 의무감 때문에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은 스스로 기쁜 마음으로 베푸는 것, 헌금하는 것을 말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렇게 하는 사람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많고 적음의 양적인 차원이 개재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기쁜 마음으로 하느냐 아니면 어떤 외적 동기를 따르거나 또는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느냐 하는 차이의 문제입니다. ‘넉넉하게 된다’는 것이 단순히 양적인 보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바울 자신의 경험(11:23~33)을 통해서도 알 수 있거니와, 바로 앞의 8장의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자기의 형편에 맞게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까지 바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그 대신에 여러분을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형을 이루려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넉넉한 살림이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면, 그들의 살림이 넉넉해질 때에는, 그들이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하기를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한 것과 같습니다.”(8:12~15)

▲ 나눔을 통한 연대는 인간의 근본 변화이다. ⓒGetty Image

이 말씀의 뜻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경쟁적 투자의 법칙 또는 투기의 원리와는 상관없습니다. 다른 사람이야 어찌되었든 내가 많은 보상을 받으면 된다는 법칙과는 상관없습니다. 이 말씀은 나눔의 법칙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 나눔의 법칙이 실현됨으로서 불공평함이 사라지고 그 결과 모든 사람이 넉넉하게 누리는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방적일 수 없고 상호적이며 관계적입니다. 이번에는 이 사람이 더 많이 베풀었다면 다음에는 다른 사람이 더 많이 베풀 수 있습니다.

상호간에 그런 기쁜 일이 일어나는 것, 곧 관계의 변화가 일어나는 현실입니다. 물질이 인간관계를 갈등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공평하고 평화롭게 하는 현실에 대한 전망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 나눔의 기적을 몸소 보여주셨다면, 사도 바울은 그 사건이 갖는 의미를 당대의 교회 현실에서 설파하고 설득하고 있다고 할까요? 헌금은 투자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눔의 정신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8장은 헌금이 가져오는 물질적 효과에 그에 직결된 인간관계의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면, 오늘 본문 9장의 말씀은 물질적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더 놀라운 결과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헌금을 전달하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수행하는 이 봉사의 일은 성도들의 궁핍을 채워 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를 넘치게 드리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 봉사의 결과로,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하고, 또 그들과 모든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게 도움을 보낸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보고, 여러분을 그리워하면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9:11~15)

누군가가 기쁨으로 베푼다면 수혜를 누리는 사람은 베푼 사람에게 감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하며 감사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베푸는 일, 헌금을 하는 일은 누군가의 물질적 궁핍을 해결하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기쁨과 정성으로 드린 물질이 물질적 차원의 어떤 효과를 넘어 인간들 사이의 상호신뢰와 연대를 이루어내고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전망입니다. 이것은 값없이 받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누린다는 인의론의 정신과 그대로 통합니다. 물질적 삶의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온전한 인간관계의 실상입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교회간의 연대 차원을 넘어 인간과 사회의 변화에 대한 전망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본문말씀은 인간존재에 관한 근본적 인식을 그 밑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인간은 과연 이기적인 존재일까요, 아니면 이타적인 존재일까요? 성악설이 맞을까요, 아니면 성선설이 맞을까요?

인류 정신사의 오랜 물음이지만, 오늘날 지배적인 삶의 법칙은 매우 자명한 가설에 기초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전제입니다. 예컨대 현대 주류 경제학은 경제적 법칙을 불가항력적인 자연법칙으로 간주할 뿐 아니라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인간의 동기를 전적으로 이기적이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전제에 부합하는 것을 합리적이라 간주하고, 그에 따른 여러 제도와 관행을 정당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경쟁을 강화해야 사회가 발전한다든지, 기업의 이윤추구를 보장해야 경제가 활성화되고 사람들이 나눠먹을 떡고물이 늘어난다고 생각하는 믿음이 모두 그런 전제에 기초해 있습니다.

종종 성서 또한 그러한 인간 이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성서는 인간의 죄를 강조하고 있고, 그 죄란 결국 인간의 자기중심성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도리 없이 성서 역시 이른바 성악설과 통하는 맥락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원죄를 강조하면 더더욱 그렇게 보입니다. 성서 역시 도리 없이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성서가 끊임없이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 질책하고 있는 내용을 훨씬 많이 증언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보는 견해가 정당해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 이해가 과연 정당할까요? 그 이해는 매우 피상적인 견해일 뿐, 성서는 원죄에 앞서 원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범하기 이전의 인간은 아름다운 동산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고 하나님과 더불어 그 동산을 일구는 존재였다고 성서의 창세기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다음부터 성서는 죄를 범한 후 인간의 실상을 증언하는 데 압도적인 비중을 할애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사실 성서가 끊임없이 죄를 범한 인간 사회의 실상을 전하는 것은, 인간이 죄의 굴레에 그대로 매여 있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 그 뜻이 있지 않습니다. 본래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이 세상을 본래의 그 아름다운 동산으로 회복하게 하려는 데 그 뜻이 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성서는 인간이 범한 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대목에서조차도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희망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눔의 기적을 통해 이미 인간사회 안에 내재된 놀라운 가능성을 드러나게 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헌금을 역설하면서 그 가능성을 다시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성으로 드리는 물질, 헌금은 그 놀라운 가능성에 대한 신실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것이 신비 아닙니까? 어떻게 이기적 계산을 떠나 공동체적 삶을 위하여,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내놓을 수 있습니까? 신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알 수 없는 신비가 아니라 이미 드러나 알려진 진실일 뿐입니다. 우리가 그 진실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선물”을 누리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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