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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봉건주의 시대에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아 5:8-16; 롬 15:1-6; 마 1:18-25)성탄절 첫째 주일/송년주일(12월26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1.12.24 14:47

1. ‘기업 신봉건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형태의 연대?

오늘은 성탄절 첫째주일이자 2021년 마지막 주일인 송년주일입니다. 한 해를 보내며 저는 꼭 확인해 보는 것이 있는데, 바로 <교수신문>이 꼽은 그해의 사자성어입니다. 왜냐하면 사자성어를 통해 그해의 성격과 특성을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수신문>이 뽑은 2021년 올해의 사자성어는 ‘묘서동처(猫鼠同處)’입니다. “고양이와 쥐가 함께 있다.”라는 뜻인데, 쥐(도둑)를 잡아야 할 고양이가 쥐를 잡지 않고 한패가 된 상황을 말합니다.

사법부와 검찰, 언론과 지식인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부패한 적폐 정치권과 결탁한 지금의 상황을 잘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가오는 2022년에는 이제 고양이는 고양이 자리에, 사람은 사람의 자리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제대로 돌아가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사실 지금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종교 뭐 하나 할 것 없이 속 시원하게 돌아가는 것이 없습니다. 그나마 K-문화와 코로나 대응에 있어서 성과가 있었지만, 최근 감염률이 심각한 10대 자녀들의 접종률이 미비하고, 또한 백신 효력이 다했지만 추가 접종을 하지 않는 어른들 때문에 방역과 백신 접종에 심각한 위기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백신이 남아도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 맞으려고 하고, 백신이 부족한 국가는 백신이 없어서 많은 사람이 죽어갑니다.

사실 감염병은 쉽게 뿌리 뽑을 수가 없습니다. 온 세계가 하나가 되어 서로 협력하고 연대해야 하는데, 백신이 넘치는 곳은 안 맞아서 죽어가고 백신이 없는 곳은 맞지 못해서 죽어갑니다. 기가 막힙니다. 심각한 방역과 백신 불평등입니다. 이것이 전 지구적 팬데믹을 맞은 우리 인간의 상황입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이 시대 가장 위험한 사상가로 손꼽히는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이 지젝은 현재 오미크론 변이의 확산에 관해 세 가지 원인, 곧 세 가지 태만에 관해 이렇게 분석합니다.

“첫째, 전 세계의 백신 접종률 격차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은 이들의 태만이다. 둘째, 백신 연구개발을 위해 엄청난 공적 자금을 지원받고도 로열티를 지불할 수 없는 가난한 국가의 치료 약 복제를 무상으로 허용하지 않은 제약회사들의 태만이다. 셋째, 감염병 극복을 위한 협력 모색을 어렵게 하는 감염병 국가주의의 태만이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했던 일을 하지 않은 대가라고 지젝은 덧붙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제삼 세계에만 가둬두려고 했던 재앙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우리를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바이러스는 중국만 봉쇄한다고 되는 게 아니죠? 아프리카나 인도, 남미에만 가두어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이 죽어가도 자본은 증식하고 자본가는 자신의 배를 불립니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세계적인 위기를 이용해 자기 배를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현실 자본주의는 현재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넘어 ‘기업 중심의 신봉건주의’(야니스 바루파키스, 조디 딘 등)로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봉건 영주는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일론 머스크 등이죠? 물론 우리나라는 삼성의 이재용 부사장입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요? 지젝은 메타버스와 같은 기술혁명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연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지젝의 말을 들어 볼까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이미 죽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전투는 신자유주의와 그 너머 사이의 전투가 아니다. 앞으로의 전투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열이 만든 여파의 두 형태 사이의 싸움, 즉 ‘메타버스’와 같은 보호 풍선을 제공해 우리를 위기에서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하는 기업 신봉건주의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발명해야 한다는 불편한 각성 사이의 싸움이 될 것이다.”

특별히 그리스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재무부 장관이었던 야니스 바루파키스는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삼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좌파 정치학자 중 한 명인 미국의 정치 이론가인 조디 딘 교수도 “자본주의가 우리의 주체성을 잠식한 결과,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마저도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라고 지적하고, 새로운 대안적 정치적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러한 대안, 곧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는 성탄절의 참된 의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을 통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분으로 예수님의 성탄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구약의 말씀은 목동(솔로몬)을 사모하는 술람미 여인이 사랑함으로 병이 난 것처럼, 신랑 되신 예수님(하나님)을 사모하는 신부 된 교회(인간)와 성도들이 사랑함으로 병이 나야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반 위에 서신서 말씀은 새로운 세상의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위해 먼저 믿음이 강한 이들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업 신봉적주의의 영주가 약자를 집어삼키는 약육강식의 세상에 억강부약(抑强扶弱,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도움)의 대동세상(大同世上), 곧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모습입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2.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오늘 복음서 말씀에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18-21)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 1:22-25)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찾아볼까요? 남 유다의 12대 왕인 아하스 당시,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 유다를 침략했습니다. 아하스 왕은 기원전 735년부터 16년간 유다를 통치한 왕으로, 아들을 우상 제물로 바치고 성전을 훼파하고 앗수르와 동맹하는 등 유다 열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되는 왕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아하스 왕에게 두려워 말며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사 7:6b). 말씀을 볼까요?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 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사 7:8-9)

이후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사 7:12). 물론 표현은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경건한 이유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겠다는 불신앙의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아하스 왕은 이미 앗수르에 도움을 요청했고(왕하 16:7), 나름대로 수로를 정비하는 등 대책을 세워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왕 때문에 백성도 고통을 당하고 하나님도 힘듭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징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הָעַלְמָ֗ה)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사 7:14-16)

14절 말씀에 나오는 처녀(하-알마)는 ‘한-젊은 여자’라는 뜻입니다. 누구인지 밝히고 있지 않지만, 이사야의 아내일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8장을 보면, 이사야의 아내가 아들을 낳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내(이사야)가 내 아내를 가까이하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겨질 것임이라 하시니라.”(사 8:3-4)

‘마헬살랄하스바스’는 ‘빠르게 노략질 당한다’라는 뜻입니다. 곧 한 아이가 태어나 말을 시작할 때, 이스라엘과 아람이 망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유대의 아하스 왕의 불순종과 죄에도 불구하고 한 아이를 통해 그들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징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계속해서 불순종하고 강대국 아수르를 의지하죠? 결국이 ‘한 아이’에 대한 갈망은 메시아 대망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마태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도 우리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신 예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고, 우리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아가서 말씀이 그 신부의 간절한 사모함과 기다림을 잘 보여줍니다. 말씀을 볼까요?

3.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

▲ 술람미 여인과 목동의 사랑

“예루살렘 딸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아 5:8).

이 말씀은 술람미 여인이 사랑하는 자인 목동(솔로몬)을 찾는 이야기죠? 상황은 이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여인과 목동 사이에 위기가 생깁니다. 사랑하는 목동이 찾아왔지만, 여인은 너무 늦게 일어나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목동은 떠난 후입니다. 그러자 여인은 목동을 찾아 헤맵니다. 예루살렘 온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목동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의 딸들이 묻습니다.

“여자들 가운데에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아 5:9)

이에 술람미 여인은 사랑하는 자의 모습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 가운데에 뛰어나구나. 머리는 순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 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는구나.”(아 5:10-13)

사랑에 눈먼 이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 다리는 순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생김새는 레바논 같으며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입은 심히 달콤하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아 5:14-16)

어떤가요? 놀라운 사랑의 고백이 아닌가요? 오늘 묘서동처의 시대에, 기업 신봉건주의 시대에 우리 죄를 구원하실 주님을 이러한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며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영적으로 나태하고 방종하여 한번 기회를 놓쳤지만 술람미 여인처럼 찾고 부르짖으면 다시 목동을 만나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가서 8장 말씀을 볼까요?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 8:6-7)

이렇게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한 해를 보내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우리에게 본격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연대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사도 바울이 로마서 말씀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말씀을 볼까요?

4.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1-2).

그렇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세 가지를 말합니다. 먼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 둘째 이웃을 기쁘게 하라. 셋째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라 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세상의 연대 방식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루파키스는 이러한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기 위해 좋은 예를 제시하였습니다. 바로 경제에도 ‘1인1표제’를 시행하자는 것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잘 아시다시피, 민주주의는 천부인권 사상을 원칙으로 합니다. 따라서 모든 국민에게 한 표의 같은 권리를 부여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1인1표제’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어떤가요? 1주1표제입니다. 따라서 주식이 많은 사람이 의결권을 가지는 것입니다. 결국 민주주의의 원칙인 1인1표제와 자본주의의 원리인 1주1표제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사실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은 자신들이 더 많은 권한을 당연히 행사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혐오하죠? 그렇다면 이러한 자본주의라는 경제 시스템을 그대로 놔둔 상태에서 민주주의는 발전 가능할까요? 아닙니다. 다시 봉건영주제나, 고대 노예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루파키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국가와 경제학자 사이의 관계는 마치 중세 시대 국가와 성직자 사이의 관계와 같으며 은행은 이 둘의 사이에서 이득을 얻고 때로 지배하는 기생충과도 같다.”

이렇게 돈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오래전에 무너뜨린 자본주의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바루파키스는 과감하게 경제적 영역에도 민주주의를 도입하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기업 신봉건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형태의 연대는 세상의 가치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세워진 제대로 된 교회 공동체가 그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일, 이 일을 위해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날’ 정도로 갈망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15:3).” 그럼에도 우리는 이 일을 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예수를 본받는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4-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므로 병이 나야 할 것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신부 된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가 이러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기 예수께서 오신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참된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약한 자의 짐을 나눠서 져야 합니다. 2021년 한 해를 이렇게 마감하고 다가오는 2022년 새해에도 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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