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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와 제사장들이 의인의 피를 흘렸도다!(애 4:7-16; 고전 12:12-27; 마 14:1-12)주현절 다섯째 주일/해외선교주일(2월6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2.02.04 15:12

1.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오늘은 주현절 다섯째주일이자 해외선교주일입니다.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시작됩니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이를 물리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교사역인 것입니다. 특별히 해외선교주일을 맞아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우리 지역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증거하시는(비록 직접 나가지는 못하지만, 기도와 선교헌금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을 지켜본 분봉 왕(한 나라의 1/4을 통치하는 왕) 헤롯은 이전에 자신이 죽였던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마 14:1-2).” 헤롯이 요한을 죽인 일은 이렇습니다.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마 14:3-7)

여기 나오는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통치 기간 B.C.4-A.D.39)를 말합니다. 원래 헤롯이라고 하면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그 또래를 다 죽였던 헤롯 대왕(헤롯 1세, B.C.37-B.C.4)을 뜻합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유대 땅의 왕이었으나, 실제로는 로마의 위임을 받아서 통치하니, 총독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헤롯왕은 바벨론과 로마 등에 의해 파손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예루살렘 성전은 세 차례 지어졌습니다.

제일 처음에는 솔로몬 왕에 의해 지어졌는데 바벨론에 의해 불타 없어지죠? 두 번째는 스룹바벨 총독에 의해서 재건되게 됩니다. 수룹바벨은 바벨론 포로 귀환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합니다(스 5:2). 이를 제2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헤롯은 이 성전이 낡고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중건하였습니다. 물론 헤롯이 유다인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중건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제2성전은 기원후 70년 경에 로마에 의해 완전히 파괴됩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통곡의 벽’은 이 성전의 일부입니다.

아무튼 헤롯 대왕은 죽기 전 유언장에 유대왕국을 넷으로 쪼개서 그 중 2/4인 유대와 사마리아를 아들 헤롯 아켈라오(아켈라우스, B.C.4-A.D.6)에게 주었고, 1/4인 갈릴리와 요단과 사해 동편은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헤롯 안티파스에게 줍니다. 그는 세례 요한을 처형한 장본인일 뿐만 아니라, 나중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인물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땅인 이스라엘 북쪽의 가장 높은 산인 헬몬산 자락은 헤롯 빌립(빌립2세, B.C.4-A.D.34)에게 줍니다. 빌립은 이곳에 도시를 만들고 ‘가이사랴 빌립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이방 땅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베드로는 그 유명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 헤롯 왕가

 

아무튼 이렇게 헤롯 대왕의 세 아들이 로마의 위임을 받아, 팔레스틴을 통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 아켈라오가 유대와 사마리아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자, 로마는 직접 총독을 파견하여 이스라엘에 총독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본디오 빌라도나 바울의 재판을 맡은 벨릭스와 그의 후임 베스도(행 24:27)가 바로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들입니다. 아무튼 로마의 총독들은 가이사랴를 행정 수도로 삼아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됩니다.

도시 이름을 보니, 유대 이름이 아니죠? 로마 황제 이름을 딴 로마식입니다. 이렇게 분봉 왕들은 로마의 눈치를 보고, 아부하며 이스라엘 민중들을 탄압하였던 것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불의한 왕과 그 권력을 비판했던 세례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 왕에게는 눈에 가시와도 같았을 것입니다.

다시 본문 말씀의 배경으로 돌아가 볼까요? 동생 빌립이 죽자, 헤롯 안티파스는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것도 불의하다 여겼습니다. 이렇게 불의한 권력에 요한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헤롯은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기 때문에 죽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알았던 아내 헤로디아가 꾀를 냅니다. 바로 딸, 살로메로 하여금 헤롯의 마음을 사서 요한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헤롯의 생일 잔치때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한 살로메는 왕에게 어머니의 말대로 소원을 말합니다.

“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마 14:6-11)

 

▲ 세례 요한과 살로메의 춤

 

이렇게 당대 최고의 종교 지도자인 세례 요한이 죽임을 당합니다. 불의한 권력은 민심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광기의 폭주를 계속합니다. 그리고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마 14:12)”게 됩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요한이 잡힌 후에 비로소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다고 합니다(마 1:14). 어둠의 권세는 빛을 싫어합니다. 따라서 참된 종교 지도자는 진리 때문에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의 빛은 꺼지지 않습니다. 비록 의인들이 피를 흘리고 고난을 당하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피값을 되찾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 복음을 전파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기에, 하나님 나라를 향한 의인들의 빛은 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구약의 말씀은 놀랍게도 의인들의 피를 흘린 종교 지도자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죽였던 헤롯왕과 같이, 예레미야 당시 불의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의인들의 피를 흘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을 죽였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종교 지도자들이 악한 어둠의 세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때문에 예루살렘 성이 불탔다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2. 선지자와 제사장의 죄로 의인들이 피를 흘렸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분을 내시며 그의 맹렬한 진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지르사 그 터를 사르셨도다.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의 모든 왕들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었도다. 그의 선지자들의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그들이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함이여! 그들의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그들이 만질 수 없도다.”(애 4:11-14)

결국 선지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결국 유대 백성들은 사람들에게 부정하다 취급받았고 고향 땅을 떠나 도망하여 방황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기를, 저리 가라! 부정하다, 저리 가라, 저리 가라, 만지지 말라 하였음이여. 그들이 도망하여 방황할 때에 이방인들이 말하기를, 그들이 다시는 여기서 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노하여 그들을 흩으시고 다시는 돌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으며 장로들을 대접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애 4:15-16)

따라서 불의한 종교인들은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이들 때문에 전에는 눈보다 희고 청옥 같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은 멸망을 당해 자기 자녀를 삶아 먹을 정도로 고통이 심각해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 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 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애 4:7-10)

기가 막히죠? 한 나라의 영적 중심인 종교 지도자가 제대로 서지 못하면 나라가 멸망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3. 봉이 김선달과 문화재관람료

지난 2022년 1월 21일(현지 시간) 베트남의 승려 틱낫한 스님이 열반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숭산 스님과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그리고 캄보디아 어린이들의 아버지이자 살아있는 국보라 불리는 평화중재자 마하 고사난다와 함께 4대 생불, 곧 살아있는 부처였습니다. 틱낫한 스님은 1960년대 ‘참여불교(Engaged Buddhism)’를 통해 내세론에 기댄 기존 불교의 빗장을 열고 사회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것을 기본정신으로 삼아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분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몇 번 왔었죠?

그런데 한국 불교계를 보니 안타깝습니다. 최근 코로나 상황에 개신교가 영적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해, 사회적으로 지탄받고 있는데, 이제 한국 불교계가 그 전철을 밟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 10월, 문화재 국정감사에서 정청래 의원은 해인사의 문화재 구역 입장료를 두고 ‘통행세’, ‘봉이 김선달’이라는 표현을 쓰며 문제를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불교계가 반발하며 사과를 촉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정청래 의원은 왜 ‘봉이 김선달’이라고 표현을 하며 불교계를 비난했을까요? 그 배경을 살펴보면 충분히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국립공원 입장료는 2007년에 폐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찰은 이것을 ‘문화재 관람료’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버젓이 징수하고 있었습니다. 절 구경이 아니라, 등산만을 원했던 시민들이 꾸준히 민원을 제기하였습니다. 따라서 국회 국정감사를 통해 조사를 했던 것인데, 불교계는 정의원의 발언에 나오는 ‘봉이 김선달’이라는 말에 분노하여 정의원의 사과와 사퇴를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2022년 1월 2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소재 조계사에서 ‘종교편향 근절과 한국불교 자주권 수호를 위한 전국승려대회’를 열었죠? 반대하는 승려들도 많았지만, 일부 강성파들에 의해 개최되었습니다. 자신들의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는 국민의 불편과 원성에는 관심 없다는 태도입니다. 자비의 종교인 불교의 본래 정신과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들어오는 문화재 관람료라는 불로소득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겠죠?

전남 구례 화엄사 주지 덕문 스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문화재관람료를 징수하는 사찰과 스님들을 국민적 비난거리로 만들었다. 사찰과 스님들을 ‘통행세’를 받는 산적 취급을 하고, ‘봉이 김선달’에 비유해 사기꾼 집단으로 몰고 있다.” 사실 다른 종교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은 같은 종교인으로서 예의와 품위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불교계는 한국 개신교회처럼 맘몬과 탐욕의 시험을 극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쓴소리를 합니다.

한국불교계가 먼저 문화재관람료를 받지 않겠다고, 봉이 김선달이 되지 않겠다고, 산적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하여야 합니다. 전라도 남원에 천년고찰 실상사가 있는데, 주지인 도법스님이 주지승으로 온 뒤, 곧바로 입장료를 없애버렸다고 합니다. 따라서 누구나 편히 실상사를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법 스님과 실상사가 귀농학교, 환경운동에 앞장서고 지역과 함께하니, 사람들도 절을 많이 찾게 되었습니다. 눈앞의 이득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과 함께 하여 절 소문도 좋게 나게 된 것입니다.

분명 화엄사 주지인 덕문 스님도 화엄불교의 경지인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경지, 곧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는 경지, 대립하지 않고 서로 융합하여 무한하면서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진리를 본질을 알터인데, 불교계가 개신교회와 같이 맘몬과 물욕에 넘어지지 말기를 소망합니다. 반드시 욕심은 화가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불교인이라면 잘 아실 유마 거사의 말을 들려드립니다.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 이것이 불교의 원래 자비심입니다.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6-27)”

4.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따라서 이제 정말 정신 차려야 합니다. 무속과 미신, 사이비 이단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전통 종교들이 우리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욕망과 맘몬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타락하고 불의한 종교 지도자들로 말미암아 의인들이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개신교회가 정신 차리고 영적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같이 또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정의와 그리스도의 평화를 부르짖어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일을 하기 때문에 불의한 권력에 의해 어느 한 지체가 고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같이 전합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2-13)

바울의 지체론이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힘써 싸우는 이들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민족적인 구분, 신분적 차별, 성별의 차별이 없습니다. 나아가 지체끼리는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지체를 그 용도대로 의미 있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고전 12:14-21)

특별히 바울은 지체 가운데 약한 것들이 더 중요하고 요긴하다고 말합니다.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여 분쟁이 없이 하나가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전 12:22-2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서로 돌보며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힘써 싸우시기 바랍니다. 그때 한 지체가 고통을 받더라도 함께 그 고통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어도 함께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으로 좋은 일, 옳은 일을 행하시고, 특별히 해외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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