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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랑의 한 가운데를 지나는 방법두 마음이 빚어낸 혼돈을 넘어서(마태복음 14:22~33)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2.02.09 14:37

본문말씀은 격랑의 한 가운데서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와 현실의 격랑 가운데 있는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진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세례 요한이 처형된 이후 예수께서는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그 놀라운 일이 있고 난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보내십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당신은 남아 따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예수께서 군중들 가운데 계시다가 따로 떨어져 기도하는 모습은 일관된 행동 패턴입니다. 기도하며 성찰하는 모습입니다.

그 즈음 제자들이 탄 배는 육지로부터 멀어지면서 풍랑에 시달립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있는데, 새벽녘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을 향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 “유령이다!” 하고 외칩니다. 깜짝 놀라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물 위를 태연하게 걷는 이가 예수님이라니 제자들은 일단 안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하게 확신하고 있지는 못한 상황입니다. 베드로가 확인하려고 듭니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를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말씀하십니다. “오너라!”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께로 향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무서움에 사로잡혀 물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살려 달라 외치고,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그때서야 제자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고 외칩니다.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성서의 기적 이야기는 그저 초자연적 사건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서야 믿으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단지 과시적으로 기적을 행함으로써 사람들을 믿게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에는 항상 그에 관여된 주인공들이 있습니다. 기적은 예수님과 그 주인공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이지, 그 관계를 떠난 객관적인 초자연적 사건이 아닙니다.

본문말씀이 전하는 기적 이야기의 초점은 무엇일까요? 본문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분열된 두 시선입니다.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을 향하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는 순간 물에 빠져듭니다. 예수님을 향하던 시선이 풍랑으로 향하게 되면서 베드로는 위기에 처합니다. 예수님을 향하던 믿음이 주변의 불안정한 상황을 보면서 혼란에 빠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수도 있고 풍랑을 바라볼 수도 있는 두 가지 시선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한 인간이 다양한 시선을 가진다는 것은 오히려 인간의 훌륭한 능력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목표에 시선을 맞춰야 하지만 동시에 그 목표를 이루는 데 고려해야 할 현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 두 가지 시선이 균형을 이뤄야 우리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가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신문!”이라고 한 것은,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가운데서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베드로가 위기에 처한 것은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불가피한, 아니 풍요로운 두 가지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위기는 목적을 상실한 방황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했을 때, 여기서 ‘의심’은 두 마음을 품는 것을 뜻합니다. 한 마음으로 집중하지 못하고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두 가지 방향으로 동시에 가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시선은 요동치는 풍랑 앞에서 혼란을 겪고 그 혼란에 휘말리고 맙니다. 요지부동 평안하게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이 아니라 현실의 격랑에 휩쓸려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평범한 인간들의 실존일 수도 있습니다. 본말의 전도라고 할까요? 품고 있는 꿈을 이루기 위해 현실적인 조건을 헤아리려는 태도가 아니라, 이런저런 현실적인 조건에 매여 꿈을 접어버린 인간의 상황입니다.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다가 목표를 상실해버린 경우입니다.

본문말씀이 전하는 상황설정과 차이가 있지만 오히려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이야기를, 복음서는 전하고 있습니다(마태 8:23~27; 마가 4:35~41).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는데 바다에 풍랑이 일었습니다. 바다가 요동을 치고 따라서 배가 요동을 쳐서 결국 그 배에 탄 사람들도 안절부절 요동을 치는 상황입니다. 제자들은 다급하게 살려달라고 호소할 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배가 요동치는 대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며 허둥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태연스럽게 주무시고 계십니다. 요동치는 바다 한 가운데 떠 덩달아 요동치는 배, 그 배 밖에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과 똑같은 배 위에 계셨습니다. 한 배를 탔는데도 모든 사람들은 허둥대고 있는데 반해 단 한 사람 예수께서는 평안하게 주무시고 계십니다. 요동치는 바다를 잠잠케 하시기 전에 그 요동과 상관없이 스스로 잠잠한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놀랍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이 이야기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지나치고 있는 중요한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요동치는 바다 한 가운데 요동치는 배 안에서 허둥대는 것으로 사태가 수습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잠잠함으로써만 그 사태를 수습할 수 있습니다. 격랑 한 가운데서 중심을 잡을 때 비로소 요동치는 상황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허둥댔고 예수님은 잠잠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세태를 따랐고 예수님은 중심을 지켰다는 것을 말합니다.

▲ Rembrandt van Rijn, 「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 (1633) ⓒWikipedia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변하는 것을 대처한다(以不變 應萬變).” 본래 불교의 화두로, 역사적으로 해방정국의 혼란기에 김구 선생이 그 의미를 다시 새기기도 하였고, 베트남의 호치민이 자신의 정치철학을 나타내는 좌우명 삼은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변화를 외면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지혜를 말합니다.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사태에 매몰되고, 즉각적으로 솟구치는 욕망에 매달리면 전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면 움직이는 사물만 볼 수 있을 뿐 전모를 볼 수 없습니다. 마음에 변하지 않는 중심이 있어야 변하는 사태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밭갈이를 배우던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처럼 이랑을 반드시 일굴 수 있습니까?” 아버지가 말하기를 “앞을 똑바로 보고 가라!”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들이 일군 밭의 이랑은 삐뚤빼뚤했습니다. 아버지가 반문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했느냐?” 아들이 답하기를 “앞을 똑바로 보고 갔습니다.” 했습니다. “앞에 뭐가 있었느냐?” “바로 제 앞 소 엉덩이만 바라보고 좇아갔습니다.” “바로 저 앞에 나무를 기준으로 삼았어야지!” 같은 이치입니다.

오늘 우리 상황에서 절실하게 다가오는 말씀의 진실입니다. 엊그제 어렵사리 대통령 후보 방송토론회가 열렸지만, 누가 잘했고 못했고 하는 것을 떠나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대통령 후보 토론회인지 특정분야 전문가 선발하는 토론회인지 헷갈렸습니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그와 관련된 의제를 선도하는 정책이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크게 봤을 때 후보자의 정치철학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공약도 도토리 키 재기와 다를 바 없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경제적 성장이 일정 궤도에 올랐지만 동시에 그 폐해가 심각한 상황에서 모두가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전망하는 정치적 비전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후보자 각 개인의 역량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방송 조건의 문제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 코앞에 닥친 선거에서의 승패에만 집착하는 정치세력의 구도 탓일 겁니다. 주권자가 주권자로서 역할하지 못하고 정치세력의 구도에 포획되어버린 지형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래도 그나마 더 나은 선택을 해야 하겠지만, 국가를 운영하겠다는 대통령 후보의 정책적 비전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 비전과 정책이 끝까지 그렇게 불분명하다면 각 후보가 어떤 세력을 대변하고 있는지 잘 헤아려 선택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영욕이 얽혀 있습니다. 분단과 전쟁, 그리고 빈곤과 독재를 딛고 경제적 발전과 민주주의를 일궈냈습니다. 역사란 그저 우연의 결과일 수는 없습니다. 고난의 역사를 딛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분명한 어떤 내적 동인이 있습니다. 긴 역사를 일일이 되돌아볼 겨를은 없고, 현대사의 향방을 결정한 해방정국만을 돌이켜보더라도 오늘 한국사회를 결정지은 동인들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해방정국은 그저 극심한 좌우 갈등의 혼란기만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한국사회를 결정지은 중요한 동인들이 이미 그때 배태되어 있었습니다.

좌우를 막론하고 공감하는 공통의 의지와 비전이 있었습니다. 간략히 말하면 절대적 빈곤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경제의 발전, 더불어 모든 사회구성원의 평등 보장이라는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평등은 그저 경제적 차원에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 실질적 보장 요건이자 동시에 기회의 평등을 함축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정신의 밑바탕이 된 조소항의 삼균주의(정치ㆍ경제ㆍ교육에서의 평등)는 그 평등의 정신을 함축합니다. 제헌헌법은 일찍이 노동자 경영참여권과 이익균점권을 두고 논란한 끝에 이익균점권을 보장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때 그 조항이 사라져 오늘 낯선 것이 되었지만, 제헌 헌법은 일찍이 그 정신을 반영할 만큼 진취적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사회구성원들의 의식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지표로서 1946년 미군정청이 여론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선호하는 체제에 대한 지지율이 사회주의 70%, 자본주의 13%, 공산주의 10%였습니다. 여기서 물론 사회주의는 그 폭이 넓지만 크게 봐서 오늘날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내지는 사회국가를 포괄하는 의미로 보면 됩니다. 그만큼 평등에 대한 열망이 높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를 보고 미군정청은 사회를 안정시키는 최우선의 급선무로 토지개혁을 꼽았습니다. 그 농지개혁은 이승만 정권에서 완료되었고, 그 시기에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그 절대빈곤의 상태에서도 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스란히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현실적 조건이 되었고, 더불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동인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국민적 의지라 할 수 있는 공통의 비전을 국가정책에 반영한 결과입니다. 역사의 질곡을 헤쳐 나오게 만든 동인입니다.

오늘 그 비전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경제적 성장을 이뤘지만 그 어두운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한국사회에서 그 난국의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비전이 이제는 제시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 비전이 없는 게 아닙니다.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 생태적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 평화의 위기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구현하여야 할지 집요하게 그 길을 찾는 정치세력이 미약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당장 표를 얻기 위해 근시안적인 정책을 두고 편 갈라치기를 하는 바람에 그 정책적 비전은 자리할 틈이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고 헷갈린 채 지엽적인 문제에만 몰두한 탓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어디에 시선을 두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깨어 판단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그 길을 바라보며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그 길에서 진정한 생명을 누리고 평화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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