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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하지 말고 똑바로상관없는 사람들(요4:7-10)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04.03 22:52
▲ Angelika Kauffmann, 「Christus und die Samariterin am Brunnen」 (1796) ⓒWikipedia

1.

지난 주 말씀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를 만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문답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무엇인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앙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란 인간의 능력이나 인간의 업적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빛으로 이 땅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런 그리스도와 삶 속에서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며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구원이고 그것이 신앙입니다. 요한복음의 첫머리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핵심 주장입니다.

2.

그리고 난 후 예수님의 첫걸음은 사마리아를 향합니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 아닌 이스라엘입니다. 지도를 보면 이스라엘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는 곳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남북이 분열되었을 때,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그래서 한때 북왕국 이스라엘을 사마리아 왕국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721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나서, 이 사마리아에 불행이 닥칩니다. 정치적인 불행이면서 종교적인 불행입니다. 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시리아는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추방했고,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을 이주시켰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사마리아는 정치적으로는 물론 종교적으로 이방 나라인 앗시리아와 혼합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수백년이 흐릅니다. 그 사이 앗시리아가 망하고 바벨론이 지배하고, 바벨론도 망하고 페르시아가 지배하고, 페르시아도 망하고 헬라가 지배하고, 다시 로마가 지배하는, 식민지의 역사가 예수님 시대까지 이어집니다.

그렇게 사마리아는 외세에 의해 통치 받는 곳이었습니다. 밖에서 들어온 낯선 것과 혼합되어 버려서 오랜 전통이 무너져 버리고 뒤섞여 버린 곳입니다. 종교와 문화는 물론 혈통마저도 다 섞였습니다.

독립을 쟁취하고 옛날 전통과 종교와 신앙을 회복하기 위한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합니다. 정치적으로는 급진적이고 종교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점령한 지배세력들은 이스라엘을 자기네 나라로 동화시키기 위한 작업을 특별히 이스라엘의 중심지인 사마리아에서 더욱 활발하게 하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일제 시대로 비유하자면, 독립운동의 와중에 사마리아는 내선일체가 되어서 일본과 완전히 동화되어버린 동네, 그런 이미지가 굳어져 버린 것입니다.

‘나라의 독립을 외면하는 사람들이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이야, 자기네들끼리 우상을 믿는 사람들이야, 혈통적으로도 순수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이방인들하고 완전히 뒤섞여버린 사람들이야.’ 사마리아는 이런 곳입니다.

3.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손가락질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앞서 말한 그런 역사가 있으니까요. 나름의 정당한 이유가 있으니까요. ‘뭘 그렇게까지 심하게 그러냐?’ 할 수 있겠지만,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그 감정을 사소하게 무시해 버릴 수 없지요.

손가락질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와 상종도 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손가락질하고 정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을 끊임없이 핍박하고 저주합니다. 문제는 이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 이웃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저기 먼 곳에 사는, 평생을 만날 일도 없는 그런 사람들을 미워하고 백안시하는 것이 아니라, 눈만 돌리면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끼리 그런다는 겁니다. 오히려 멀리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손가락질이 너무나 흔하게 존재합니다. 나름 이유 있는 손가락질이 늘어납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럴 듯합니다.

지난해 아프가니스탄에서 387명의 ‘특별기여자’들을 데려왔습니다. 논란이 많았습니다. 이뿐입니까? 요즘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인 코로나19는 어떻습니까? 확진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이미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차별금지법도 논란입니다. 성소수자들이나 장애인들을 대하는 시선은 어떻습니까? 그 중심에 있는 정서는 ‘너는 우리와 다르다. 너는 우리와 같을 수 없다’ 아닙니까? ‘우리와 다른 너희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싫다’는 겁니다.

상관없는 사람들이 아닌데, 바로 곁에 이웃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그런 이들과 상관없이 살고 싶다는 겁니다. 분명히 내 곁에 있는 사람이지만, 내심은 내 곁에 없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나도 너를 없는 사람 취급할 테니, 너도 없는 듯이 있으라’는 겁니다.

4.

오늘 우물가의 여인은 이런 손가락질을 이중으로 당하는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어서 이스라엘 사람에게 손가락질 당하는데,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서도 따돌림을 당하는 이중으로 핍박받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지금 일부러 이런 핍박과 멸시당하는 사람들, 선 긋고 구분 짓는 사람들, 없는 듯이 있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도 ‘구원받은 것이 무어냐? 거듭나는 것이 무어냐?’ 하는 가르침 뒤에 첫 이야기로 말이지요.

‘새롭게 산다는 것이 뭐냐? 사람을 봐라. 네 곁에 있는 사람을 봐라. 인간의 기준으로 인간의 시선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봐라. 특별히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고 자녀 삼으시는 어버이의 시선으로 봐라. 뭐가 보이느냐?’

여러분은 뭐가 보이십니까? 거듭난 우리의 눈에는 뭐가 보입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받고 뜨거운 눈물 흘렸을 때, 새사람이 되었을 때, 그때 우리는 무엇을 봤습니까? 혹시 행복한 나만 보였습니까? 예전에 힘들고 어려웠던 것이 해결된 것만 보였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실 무한한 복, 그것만 보였습니까? 앞으로 얼마나 행복하게 살까? 그 생각만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건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아도, 하나님 만나지 않아도, 구원받지 않아도,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겁니다. 내 욕심이 채워지면 기뻐하고 삶의 형편이 나아지고 행복해지면 즐거워하는 건 누구나 다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안 믿는 사람도 일이 잘 풀리면, ‘아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빈말로라도 말할 줄 압니다.

그런 일차적인 행복 뒤에, 그 행복이 실제적인 행복으로서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을 봐야 합니다. 그걸 보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의 성육신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고 그것이 구원의 진짜 정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 못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여주십니다. ‘자, 봐라! 이 여인을 봐라. 이 여인과 내가 어떻게 만나는지를 봐라. 어떤 관계를 맺어가는지 봐라.’

여인은 바짝 긴장합니다. 주눅 들어 있습니다. 세상이 자신을 손가락질하는데,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냐고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합니다. 우리 이러지 말자고, 다 같은 사람 아니냐고, 이제라도 우리 평화롭게 사이좋게 살자고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저는 천한 사람입니다. 나 같은 것이 뭐라고 물을 달라 그러십니까?’ 이러고만 있습니다.

‘나는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외치고 항변해야 할 사람이 도리어, ‘나는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하고 스스로 주눅 들어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안다면, 그리스도가 누군지 안다면, ‘저는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하지 말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할 겁니다. ‘우리 상관있는 거 맞죠? 나 없는 사람 아니죠? 나도 살아 있다고 말해도 되죠?’”

하나님의 선물이 뭡니까? 그리스도의 정체가 뭡니까? 나에게 주신 것, 내가 원하던 것, 그것이 선물입니까? 그리스도의 정체가 그 선물 들고 온 산타 할아버지 같은 겁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정체는 새로운 삶을 보여주고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그렇게 이 땅에 생겨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곁에서 영광스럽게 계시지 않고, 세상을 보고 세상의 아픔을 보고 내려오신 분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렇게 오셔서 함께 아파하시고 함께 고난당하시고 함께 죽으신 분이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그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나를 보셨다는 것이 구원이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뭘 받았지?’ 하고 내 손을 펼쳐보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손 내미신 것, ‘너는 내 아들이다’ 말 걸어 주시는 것, 내 삶의 옆에서 미소 지으시며 격려하시는 것, 힘들 때 꼭 안아주시는 것, 기쁠 때 함께 기뻐해 주시는 것, 때로는 질책하시고 혼내주시는 것, 그렇게 나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나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주신 것이 가장 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어렵죠. 내 삶을 살아내기만도 어려운데 이웃을 보라니 어렵죠. 그런데요. 뭐 대단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 재산을 팔아서 이웃들에게 나눠줘라.’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면 참 훌륭하다고 칭찬하시겠지만, 그런 엄청난 경지를 강요하시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오늘 말씀은 일단 보라는 것입니다. 보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뭘 어떻게 하는 건 나중 일이고, 보라는 것입니다. 보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구별 지으면서 적대시하지도 말고, 있는 듯 없는 듯 투명인간 취급하지도 말고,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일단 바라보라는 겁니다.

길거리에 수 많은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면 그만인 사람들로 보지 말고, 나와 똑같은 뜨거운 피를 가진 사람, 저마다의 고민을 붙들고 힘겨워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로, 한 번 씩 그 얼굴을 주의 깊게 바라보라는 겁니다.

특별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 곁에 오셔서 ‘너는 나와 상관없지 않다’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그 마음을 상기시키면 됩니다. 할 수 있다면 조금씩 키워나가면 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선물이 우리의 삶 속에서 비로소 생명력을 가지고 꿈틀대기 시작할 것입니다.

5.

본문에는 이상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는데,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실 수밖에 없었다.’ 이 말씀은 참 이상합니다. 유대와 갈릴리를 오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도 갈 수 있었어요. 요단강 건너편으로 빙 돌아서 가는 길이 있어요.

그런데 사마리아가 싫어서 상종도 하지 않는다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제로 유대와 갈릴리를 오갈 때는 굳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을 다닙니다. 아이러니하죠? 하지만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현실을 폭로해줍니다.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을 드러내 줍니다.

우리는 외면하고, 상종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실제 우리의 삶은 그들을 통과해야만 이루어집니다. 나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우리의 삶은 서로의 삶으로 엮여 있습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해야만 합니다. 빙 돌아 살 수는 없습니다.

아직은 억지로 눈감고 ‘우리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라고 도리질을 하는 우리이지만, 그 사마리아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조금씩 눈을 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물가에 앉아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주님의 길을 한걸음 씩 따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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