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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 연못, 살인적인 이기심으로 가득찬 곳가짜 희망을 놓아버리세요(요한복음5:1-9)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04.17 21:29
▲ Palma il Giovane, 「Christ healing the paralytic at Bethesda」 ⓒWikipedia

1.

코로나 중에도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여러 가지 논란도 있었지만, 올림픽을 통해서 코로나로 지친 국민들이 많은 위안을 받고 기쁨을 얻었습니다. 저는 올림픽을 통해서 확실히 우리 국민들의 수준이 많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정말 옛날에는 금메달에만 환호하고 금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을 비난하던 시절도 있었죠.

그런데 이제는 경기결과와 상관없이 진심으로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고 부딪히는 모습 자체에 열광합니다. 메달은 못 땄어도, 메달과 상관없이 멋진 스포츠맨쉽을 보여준 선수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응원하는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올림픽이라는 특별한 이슈 때만 아니라, 이런 모습이 우리의 일상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올림픽이 끝나고 또 다른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패럴림픽입니다. 장애인올림픽이죠. 이 장애인올림픽도, 예전에는 ‘장애가 있는 분들의 인간승리’ 이런 관점으로 많이 봤습니다. ‘아이고, 저렇게 불쌍한 사람도 저렇게 도전하네 …’ 하는 그런 식의 관점으로, 인간극장 보듯이 짠하게 말이죠.

그런데 장애인들을 보는 눈길도 바뀐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극장이 아니라, 그냥 스포츠 자체인 것입니다. 유도, 레슬링이 체급을 나눠서 몸집이 큰 사람은 큰 사람끼리, 작은 사람은 작은 사람끼리 게임을 하듯이, 다리가 불편한 사람은 다리가 불편한 사람끼리, 손이 불편한 사람은 손이 불편한 사람끼리. 장애인들의 인간승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형편이 여러 가지로 서로 다르구나’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과 우리의 태도가 성숙해져 가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달란트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열 달란트, 한 달란트 제각각입니다만, 달란트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 달란트를 나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뜻을 고민하는가? 그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는가?’ 그것이 중요한 일이지요.

다리가 불편하거나 아예 없으신 분들이 수영을 하는 것을 봤습니다. 금메달을 따고 환호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기록이요? 웬만큼 수영 잘한다는 일반인들보다 느립니다. 그런데 스스로 수영 좀 한다는 사람이 그 기록을 보고서 ‘저런 기록으로 무슨 금메달이냐? 나보다 느린데’ 이럴 수 있나요? 아니라면, 왜 그렇죠? ‘얼마를 남겼느냐’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달란트에 얼마나 충실하냐’를 보기 때문인 것이죠.

패럴림픽을 보면서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상황이 서로의 형편이 똑같지 않다는 것이고, 그 똑같지 않은 서로 다른 형편을 인정해주고 그 형편을 고려해주는 것이 오히려 공정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키가 2미터도 넘는 거구의 장사와 이제 고작 10살짜리 꼬마 아이를 세워놓고, ‘자, 이제 둘이서 공정하게 일대일로 싸워봐’ 하면 그게 공정합니까? 아니죠. 서로의 형편을 고려해서, 그렇게 차이 나는 둘을 일대일로 싸우도록 하지 않는 것이 공정한 겁니다.

서로의 형편을 고려한다는 말 속에는 우리의 이런 성찰이 있는 겁니다. 키가 2m도 넘는 골리앗 같은 거구의 장사가 있는데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고 그 누구랑 싸워도 다 이깁니다. 참 대단합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자기 힘으로 자기 노력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거꾸로 열 살짜리 꼬마가 골리앗에 비해 힘이 없고 미약한 것은 꼬마의 잘못이 아닙니다.

나의 모습, 나의 형편, 나의 능력, 나의 부족함, 이 모든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물론 아쉬운 것도 있을 테고, 흡족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골리앗은 스스로의 힘을 자랑할 것이 아니요, 꼬마 역시 스스로의 약함에 주눅 들어 있을 필요 없습니다.

2.

문제는 스포츠의 세계에서는 이런 공정함에 대한 고도의 성찰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런 깊은 성찰이 우리 삶의 현장에까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거기에 우리 인간의 한계가 있습니다.

정의에 대해서 말하는 ‘존 롤즈’라는 학자가 있는데요. 이 사람이 평생을 정의에 대해서 연구하고 나서, 마지막 결론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 세상에서 진짜 공정한 정의의 규칙을 만들어내려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있는데, 그게 뭐냐? 그것은 바로 그 규칙으로 인해서 내가 얼마나 이익을 얻고 또는 손해를 입게 되는지를 아무도 모르게 해야 된다는 겁니다. 인간사회의 본질이 거기에 있다는 겁니다. 좀 씁쓸하죠?

공정과 정의의 문제는 단순히 규칙 규범의 문제가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의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뭐가 공정하고 뭐가 정의로운지 압니다. 모르는 게 아닙니다. 스포츠 규칙을 만드는 걸 보면, 정말 세세한 것까지 살필 줄 압니다. 그러나 나의 삶의 문제가 되면, 공정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의 이익이고, 정의로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의 행복이 되어버립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는 규칙, 규범만을 향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사회질서를 세워라. 법질서를 확립해라. 그 법을 잘 지켜라’ 물론 그것도 중요하고 좋은 말입니다만, 하나님의 정의는 한 걸음 더 나갑니다. ‘근본적으로 의로움 마음을 가져라.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마음을 버려라. 내가 이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이기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노력해라. 혼자는 힘드니까 함께 노력해라.’ 하나님의 정의는 사람들의 마음의 중심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정의로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믿고 그 믿음대로 살아가는 거지요. 그런데 그 신앙은 철저하게 개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착각합니다. 신앙은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 잘 믿으면 되고, 내가 예수님 잘 믿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짜로 하나님을 잘믿고 예수님을 잘 믿으려면, 나 혼자서 믿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율법대로 잘 살아왔다고 자부하던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말합니다. ‘나 잘하고 있지요? 이렇게만 하면 영생을 얻고 구원 받는 거 맞죠?’ 그런데 예수님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네가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줘라.’ 구제, 선행을 해야 한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너의 선함이 너 자신에게만 한정되어 있으면 안 된다. 너의 선함은 이웃과 함께 이루어가는 선함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관계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관계적인 사랑입니다. 그 정의와 사랑이 우리 인간들의 관계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 진리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 치유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나 좀 고쳐주세요’ 하고 예수님께 간청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또 다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백부장이 자기 종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딸을 살려달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딸을 고쳐 달라고 매달립니다. 친구들이 중풍에 걸린 친구를 고쳐달라고 침대를 통째로 들고 와서는 지붕을 뚫고 내립니다.

온 동네사람들이 이 사람 꼭 고쳐달라고 귀신들린 이를 데리고 옵니다. 나는 괜찮은데 이 친구 좀 살려달라고, 내 딸을, 내 아들을, 내 종을 살려달라고 주님 앞에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기꺼이 고쳐주십니다. 흐뭇해하시며 고쳐주십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적고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다’고 말입니다.

3.

여기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습니다.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휘저어 놓으면 물이 막 흔들리는데, 그때 제일 먼저 연못 속으로 뛰어 들어가면 어떤 병이든지 씻은 듯이 낫는답니다. 그 소문을 듣고 베데스다에 찾아온 지 오랜 세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연못에 와 보니 내 생각과 다릅니다. 경쟁자가 너무 많습니다. 체급별로 공정하게 게임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위중한 사람, 혼자서 못 움직이는 사람, 곧 죽을 것 같은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기회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대일밴드, 후시딘만 발라도 나을 사람,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게 멀쩡하게 기운 펄펄 넘치는 사람도 넘쳐납니다.

또 돈이 많은 누군가는 건장한 청년들을 고용해서 언제라도 들쳐 업고 뛰어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패럴림픽에서 볼 수 있는 공정함과 아름다운 경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현실은 지독하게도 냉정합니다. 베데스라라는 이 이름은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라는데, 자비와 은혜는커녕, ‘너를 이겨야 내가 산다’고 하는 살인적인 이기심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이 38년 된 병자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아십니까? 성서는 그 병이 무엇이었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3절에 나오는대로 그저 눈먼 사람들, 중풍병자, 다리 저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 병이 무슨 병이었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그의 병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관심가지고 있는 것은 지금 그의 상태입니다. 마음의 상태, 영혼의 상태죠.

이 병자의 마음의 병, 영혼의 병은 무얼까요?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찾아온 자비의 집, 그러나 그곳에는 자비는 온데간데없고, 이기심만 가득합니다. 서로를 시기질투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네가 없어야 내가 산다’ 하고서 ‘어떻게 하면 저놈을 제칠까’ 하는 생각만 가득합니다. 사랑과 평화의 집이 아니라, 미움과 폭력의 집입니다. 행복이 가득한 평온한 집이 아니라, 원망이 가득한 절망의 집입니다. 지금 이 병자를 아프게 하는 것은 오랫동안 낫지 않는 육신의 병을 넘어서, 인간세상의 적나라함이 주는 존재의 고통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낫고 싶으냐?’ 하고 물으십니다. 예수님도 이 병자도, 서로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진심이 교감하는 순간, 육신의 질병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들의 삶의 모습 자체가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그 병자가 오랜 세월 그렇게 지낸 것을 보셨다고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누워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물음도 질병에 대한 물음이 아니고, 병자의 대답도 질병에 대한 대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라고 하는, 거짓된 희망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추악한 인간의 욕망이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곳, 하나님의 나라와는 정반대되는 이 곳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일어나라. 네 자리를 걷어 치워라. 걸어가라.”

이 곳을 떠나라. 하나님의 정의가 없는 곳,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 인간의 탐욕과 인간의 불의만 가득한 곳,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움으로 바라보고 나의 이익을 위해 네가 망해야 하고,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곳,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놀기는커녕, 양들끼리도 못잡아 먹어 안달하는 곳. 그 곳을 떠나라. 헛된 희망에 미련을 두지 말고 떠나버려라.

하나님이 만드시는 새 세상으로 가자. 하나님의 정의가 있는 곳, 사랑이 있는 곳, 인간의 탐욕과 불의가 사그러지는 곳,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곳, 나를 낮춰서 너를 섬겨주는 곳,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마음이 충만한 곳, 그런 세상을 만들자. 그 세상으로 함께 가자. 주님의 말씀입니다.

4.

9절 말씀이 참 중요합니다. 무슨 말씀이죠?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안식일이 어떤 날입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계획대로 세상을 만드시고, ‘참 좋았다’ 하시고, 평온하게 쉬신 날, 창조를 완성하신 날입니다.

창조의 완성은 사실 평온하지 않습니다. 평화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웅성웅성하고 소란이 일고, 시끌벅적합니다. 10절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봐도 그렇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와서 전통이 어떻고 규칙이 어떻고 율법이 어떻고 할 겁니다. 또 누군가가 와서 입에 거품을 물고 세상의 이상에 대해서 선구자라도 된 양 떠벌일 겁니다. 또 누군가는 슬쩍 옆구리를 찌르면서 잘 사는 좋은 수가 있다고 꼼수로 꾀려 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창조도 그렇습니다. 조용한 중에 하나님께서 평화롭게 세상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을 덮고 있는 심연, 혼돈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그 모든 혼란한 것들 위에,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세워 관철시킨 것이 창조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만들어갈 창조도 그러합니다. 가짜 희망을 놓아버리고, 가짜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창조의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더 이상 죄 짓지 않는 것이요, 그날이 우리의 참된 안식일입니다.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베데스다, 그것은 무엇인가, 어디인가?’ 깊이 성찰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침내 베데스다에 펼쳐 놓았던 절망의 자리를 걷어 버리고, 일어나 주님의 길로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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