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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세계의방향이 제시되었다천지창조의 뜻, 인간의 몫(창세기 1:1~5; 26~31)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2.05.10 23:10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세계를 지으셨다는 천지창조 이야기를 접할 때 어떤 생각부터 떠오르는지요? 오늘날까지 밝혀진 과학적 사실과 과연 부합하는지 따지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 이야기의 참뜻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앎과 믿음, 지식과 신앙의 차원은 구분됩니다. 과학적 사실을 알고 인정하는 것과 바람직한 가치를 믿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물론 두 가지 차원은 인간 삶에서 꼭 필요하며 어느 하나만으로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에 관한 인식이 곧 삶의 방향을 설정해주지는 않습니다. 반면 사실에 관한 앎이 없는 믿음은 맹목으로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기에 구별되는 두 가지 차원이 적절히 결합할 때 인간은 맹목에 빠지지 않고 바람직한 가치를 실제 삶에서 구현하는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천지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대할 때, 그 이야기가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헤아려야 합니다. 세상과 인간의 기원을 과학적으로 밝혀주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바람직한 세상과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이야기인지 분별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일 이 이야기가 과학적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라면 오늘날 그 가치는 무용합니다. 반면 이 이야기가 인간이 세상 가운데서 지향해야 할 가치를 일깨워주는 이야기라면 여전히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관은, 세계에 관한 사실적 인식과 동시에 바람직한 세계상에 대한 지향을 함축합니다. 그 점에서 천지창조 이야기를 기록한 저자는 당대의 과학적 지식을 동원하는 가운데 인간이 지향해야 할 바를 이야기하고자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밝혀진 세계와 인간에 관한 과학적 사실과는 괴리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이야기가 무가치해지는 것이 아닌 까닭은 이 이야기가 바람직한 세계상과 인간관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사실인식의 측면에서나 가치지향이라는 양 측면에서 당대의 지배적인 세계관과는 상당히 다른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천지창조 이야기는 고대 수메르 및 바빌론의 천지창조 이야기와 닮은 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함축하는 뜻은 그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닮았다는 것은 성서의 이 이야기가 오래 전 옛 이야기와 상관이 있다는 것을 뜻하지만,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하게 된 것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재해석되고 재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가 기록된 때는 가장 빨리 잡아도 대략 바빌론 포로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고, 자신들을 포로로 붙잡아간 사람들의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천명하고 있는 것으로서 의미를 지닙니다. 그 기록연대를 페르시아 시대 또는 그리스 시대까지 늦추더라도, 여전히 나라를 잃고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은 공통됩니다. 제국의 지배질서에 맞서는 세계관으로서 이 이야기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이 말씀은 기본적으로 성서를 기록한 이들의 세계 인식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 아니 입김(말씀)이 펼쳐지기 이전에 세계는 어둠의 혼돈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세계 자체가 혼돈과 어둠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 세계가 어떤 세계일까요? 바빌론 시대에 비추어 헤아리자면, 바빌론의 주신 ‘마르둑’ 신이 만들어낸 세계입니다. 마르둑은 신들의 세계를 괴롭힌 바다의 괴물 ‘티아맛’을 물리치고 그 시체를 갈라 반은 하늘로 반은 땅으로 만들어 그 안에 온갖 생물과 사람을 살게 했습니다. 그 땅에는 신전을 세워 신들이 쉬도록 했습니다. 적을 물리치고 그 시체로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은 폭력으로 세계를 점령한 제국의 세계 지배를 상징합니다. 피로 얼룩진 바빌론 제국의 질서를 뜻합니다. 마르둑의 위용과 능력은 곧 제국의 위용과 능력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말씀으로 세계를 창조합니다. 그것은 제국의 질서 안에서 가시적인 어떤 것을 능력의 조건으로 삼는 사람들의 통념에 전적으로 반하는 믿음을 나타냅니다. 그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제국의 질서 안에서 보이는 그 어떤 것으로 안위를 누릴 수 없는 포로민들의 처지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제국의 질서 안에서 신으로 떠받들어진 존재들을 그저 말씀으로 창조할 뿐입니다. 있는 것을 얼버무려 만들어내지 않고 전적으로 새롭게 만들어냅니다. 무에서 유의 창조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어둠의 혼돈을 극복한 빛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 안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천지창조 과정을 건너 뛰어 인간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두 번째 본문으로 삼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창조세계 안에서 인간의 특별한 몫을 일깨워줍니다. 천지창조 이야기는 사실 긴 설명을 필요로 하는데, 이 시간에 간결하게 그 의미를 새길 수밖에 없습니다.

첫 번째, 본문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낯선 개념에 부딪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들기로 작정하시는데, 스스로 칭하기를 ‘우리’라고 합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관에서 이 표현은 얼른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이 표현은 고대의 다신교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신적 존재들을 통솔하고 그 존재들의 협력을 얻어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특히 본문말씀이 제국의 지배 상황에서 제국의 다양한 신들을 통솔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약소민족의 강력한 자의식을 드러냅니다. 지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그렇게 억압받는 신민으로 머무를 수 없는 스스로의 자의식입니다. 그것은 그저 배타적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억압받는 백성을 돌보는 하나님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이라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 이탈리아 산마르코 소재 성 마가 바실리카 성당의 천지창조 모자이크 ⓒWikipedia

두 번째, 그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그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본문말씀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에서 큰 논란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스스로 형상을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형상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다는 것은, 함부로 형상 지을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속성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는 나다’라고 했던 출애굽기의 말씀(3:14)과 관련하여 말할 것 같으면, 그 어떤 대상으로든 사물화 하는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고대 근동의 종교적 관념에 비추어 이해하면 오히려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은 성서만의 독특한 관점이 아니라 고대 근동의 종교관에서 일반화된 관념이었습니다. 성서 역시 그 관념을 공유하고 있지만 명백히 다른 점이 있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한 신화에서 작은 신들은 노동을 했고 큰 신들은 그 노동 덕에 살아갔습니다.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작은 신들이 불평 끝에 급기야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큰 신들은 반란을 일으킨 작은 신들의 우두머리를 처형하고, 그의 피와 흙을 섞어 인간을 만듭니다. 그리고 인간들에게 작은 신들이 담당했던 노동을 담당하게 함으로써 작은 신들의 반란을 무마합니다.

여기서 인간은 원래 노동을 담당했던 작은 신들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탄생한 셈입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 안에도 노동을 하지 않는 존재가 있습니다. 왕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들은 큰 신들의 형상을 닮은 셈입니다.

큰 신도 작은 신도 없고, 그리고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말씀은,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인간의 상황을 운명적 저주와 같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창조주인 하나님의 신성불가침의 속성을 동시에 부여받았습니다. 이것은 지배하는 자와 지배 받는 자로 나누어진 현실에 대한 부정입니다. 제국의 신민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믿음은 족쇄를 벗고 스스로 당당한 주체로 여기는 자의식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았다는 말씀은 공평한 인간 권리를 옹호하는 대장전인 셈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언급은 배타적 남녀 이분법을 정당화하는 하는 구절로 오용되고 있지만, 사실 고대세계와 그리스도교 신학의 역사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는 어떤 면에서 오늘날 이분법에 매여 있는 것보다 훨씬 복잡했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주제가 되기에, 여기서는 서로 다른 존재가 협력하여 온전한 인간을 형성한다는 초점만 이해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세 번째, 신성불가침의 속성을 부여받은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에서도 특별한 역할을 부여받습니다. 본문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창조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역할을 말하는 것인데, 오늘날 창세기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구절입니다.

‘… 땅을 정복하여라.’ ‘…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모든 성서가 한결같이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겨 온 서구문명이 바로 이 해석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에서 논란거리입니다. 그러나 ‘정복’과 ‘통치’는, 땅과 창조세계에 관한 성서의 다른 내용과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인간의 몫으로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달리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는, 해당 개념들(카바쉬, 아바드, 롸다)에 대한 종래의 해석과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에 있습니다. 그것은 ‘봉사하다’,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다’, ‘돌보아주다’, ‘땅을 개간하다’라는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이렇게 보면 본문말씀은 분명해집니다. ‘… 땅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어라’, ‘… 모든 생물을 돌보아 주어라.’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인간 역시 피조 세계 안에 있습니다. 땅과 생물과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당기며 끌며 살아야 하는 관계, 곧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 사실을 자각하고 그와 같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인간으로서 몫을 다하는 것이 됩니다. 온 생명 안에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고리를 파괴하지 않고 돌보는 것이 인간의 몫입니다.

네 번째, 창조질서 안에서 서로를 돌보는 관계는 인간의 생존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생존을 위한 다른 생명의 파괴는 최소한으로 제한되어야 합니다. 본문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온 땅 위에 있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들이 너희의 먹을거리가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다른 동물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허용됩니다.

여기서 피 있는 동물이 먹을거리로 허용되지 않고 식물로 제한된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노아홍수 이야기에는 불가불 모든 동물들도 먹을거리로 허용한 것(창세 9:2)을 보면 성서가 꼭 채식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말씀에서 중요한 사실은 생존을 위한 먹거리를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명의 질서 자체가 개별 생명의 죽음을 불가피하게 안을 수밖에 없지만, 인위적인 죽임, 남용과 과욕으로 인한 죽임은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옛날 어른들이 말씀하기를, 먹을 것을 남기면 벌 받는다고 했습니다. 억지로 꾸역꾸역 다 먹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남겨야 할 만큼 탐심을 부리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말씀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과 관련하여 필요 이상의 과욕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천지창조와 인간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이 세계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길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싶고, 더 많은 것을 누림으로써 누군가를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빚어내는 비참함을 넘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그리고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파탄시키고, 자연세계마저 황폐화시키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경고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뤄져 모든 피조물이 평화를 누리는 세계에 대한 희망, 그것이 천지창조 이야기의 본뜻입니다. 온 생명이 하나님의 품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서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천지창조를 믿고자 한다면 바로 그 진실을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 진실을 새기고, 나아가 우리의 삶 가운데 그 진실을 실천함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일궈나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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