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예수는 그들을 어떻게 만나셨나무엇을 보고 아는가?(요9:4-7. 16)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05.23 00:12
▲ El Greco, 「Healing of the Man Born Blind」 (1567) ⓒWikipedia

1.

지난 106회 기장총회(2021년 9월)에서는 여러 가지 의미 있는 결정들을 했습니다. 특별히 장로교단 최초로 여성총회장을 선출했습니다. 다른 교단에서는 여성이 총회장은커녕 아직도 목사안수조차 받을 수 없는 불평등이 소위 성경적이라는 구실 하에 자행되고 있는 현실에서 여성을 총회장으로 세웠다는 것은 세상을 향한 정의의 화살촉이 되어야 한다는 기장의 자기 정체성을 제대로 드러낸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는 목사의 자격에 대한 헌법조항을 수정한 것입니다. 기장헌법 4장 20조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는 신앙이 진실하고 교수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신체가 건강하고 행위가 복음선교에 적합하며 가정을 잘 다스리고 타인의 존경을 받으며 다음과 같은 자격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아래로 학력조건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바꿨을까요? 네, ‘신체 건강한 자’라는 문구를 삭제했습니다. 아니, 목사가 될 사람이 당연히 신체 건강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왜 그 말을 삭제했을까요?

2020년 12월 한신대 신대원을 다니던 한 신학생이 자퇴를 했습니다. ‘신학 못하겠다. 목사 되기 싫다’ 해서 자퇴를 한 것이 아닙니다. ‘신학이 너무 하고 싶고, 목회가 너무 하고 싶은데, 세상이 나를 신학을 못하게 하고 목회를 못하게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세상이 나를 막아서는 것이 아니라, 신학교가 교회가 못하게 한다는 겁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이분은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중증장애인입니다. 학교생활의 불편이야 세상에서 늘 그러해왔듯이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현장목회실습을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전도사가 되어서 실제목회를 배우고 지도받아야 하는데, 교회들마다 난색을 표합니다. ‘우리 교회는 계단이 많아 엘리베이터가 없어, 청소년부에서 남학생들 축구지도 해야 하는데 어렵겠는데요. 운전도 하고 힘쓸 일이 많은데 죄송합니다.’ 등등 결국 목회실습을 받아주는 교회를 찾지 못했습니다. 현장목회실습을 하지 못하면 졸업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교회들이 장애인 전도사님을 일부러 거절했던 것은 아닐 겁니다. 우리 교회로 그 전도사님이 연락을 하셨다면 저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생각해 봤더니 대답이 선뜻 쉽지 않더라구요. 30년 전에 지어진 지하 본당은 수 십 개의 계단으로만 이동할 수 있을 뿐입니다. 장애인용 슬로프는 없습니다. 건물 3층에 자리하고 있는 교육관에도 역시 엘리베이터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희 교회 사정이 전도사님을 모시기에 부족한 것 같습니다.’ 하고 거절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지난 2019년에는 장애를 가진 전도사님이 목사고시에 불합격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목사고시 과목 중에 설교실연이라는 과목이 있습니다. 즉석에서 주어지는 성경본문을 가지고 실제로 회중예배의 설교문을 작성하고 설교를 직접 하는 과목입니다. 설교작성은 매우 잘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직접 설교를 행하는 데 있어서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상에 서니 갑자기 떨려서 제대로 못 한 걸까요? 아닙니다. 이 전도사님은 뇌병변장애가 있어서 언어적인 소통이 불편한 분입니다. 처음 만나시는 분이라면 조금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합니다. 당연히 일반인과 동일한 기준으로만 보자면 낙제가 맞겠지요. 준비한 설교문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을까요? 단상에서 하는 설교라는 스피치 행위를 소위 일반인의 모습과 똑같이 해내지 못하면 목사 자격이 없는 것일까요?

이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교단의 많은 교회들과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반성했습니다.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우리 교회의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다른 곳에서 형편 좋은 곳에서 목회지를 찾으면 되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을 근본적으로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목사고시에 대해서도 성찰해 보았고, 목사가 누구냐? 하는 헌법의 규정도 돌아봤습니다. 

고시위원회에서, 헌법위원회에서, 실행위원회에서, 노회에서, 교회에서, 공적으로, 사적으로… 많은 논쟁과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신체 건강’이라는 기준이 목사의 자격을 올바르게 규정하지 못하며, 오히려 소위 신체건강하지 못한 장애인을 차별하는 문구에 불과하다는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지난 총회에서 삭제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물론 헌법조항 하나가 수정되었다고 해서, 앞서 말한 실제적인 문제점들이 당장에 수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점을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하나 고쳐나가는 과정을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총회의 다른 결정들도 이와 맥을 같이합니다. 목사와 장로만 총회원이 될 수 있었던 헌법을 개정했습니다. 남신도 대표, 여신도 대표, 청년 대표도 비록 소수지만, 총회의 정회원이 되어 교단의 일을 결정하는 데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교계의 첨예한 논쟁거리인 성소수자 문제에 있어서도, 성소수자목회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서 우리 모두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신앙적인 방향을 찾기로 했습니다.

이런 결정들은 모두 한 가지 맥락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소위 주류라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그들만의 문화로, 그들만의 권력으로 세상이 주도되어서는 안 된다’는 성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사회에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 그러나 소수인 사람들, ‘소’이기 때문에 그들의 처지가 잘 고려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의 형편을 특별히 돌아보아야 한다는 성찰입니다.

“큰일을 하다 보면, 사소한 잡음들이 생기게 마련이죠. 그런 것들은 알아서 잘 그때그때 해결하면 되는 거지. 뭐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일일이 신경 써야 합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이야말로 주류의 말입니다. 힘 있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관심은 잘난 사람들, 잘나가는 사람들, 주류에 서 있는 힘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힘없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힘 있는 사람들의 말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가만히 있어도 온 세상은 다 그들의 말에 신경 씁니다. 성경은 항상 힘없는 사람들, 그래서 세상이 그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그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으니까요. 아니 악을 쓰고 외쳐도 그 목소리를 못 들은 척 하니까요. 오히려 ‘조용히 하라고, 당신들 때문에 시끄러워 죽겠다’고 윽박지르고 짓누르고 억누르니까요. 뭐라도 하나 작은 것이라도 베풀기라도 하면 역차별이라고 난리가 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그들 하나하나가 다 내가 창조한 생명이다. 하나하나가 다 내가 사랑하는 생명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을 돌봐주어라’가 아니라, ‘그들도 너희와 똑같이 중요하다’입니다. 한 발 더 나가면, ‘때로는 너희들보다 더 중요할 때도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합니다. ‘불쌍한 자들을 도와라, 힘없는 자들을 보살펴라’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돌봄의 대상, 위로의 대상, 불쌍한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딱 거기까지입니다. ‘차별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겠다’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장애인이 나와 함께 돌봄의 주체가 되고, 동료가 되고, 지도자가 되고, 함께 이 세상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데까지 나가지 못합니다. 장애인은 목사가 도와줄 사람이지, 장애인이 목사가 된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소수자를 돌보고 보살피면 되지, 그 소수자가 목소리를 높여 주인공이 된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그건 평등한 것이 아닙니다. 착하고 선량하게 보이는 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지 여전히 차별적이고 폭력적입니다.

‘힘없는 사람’이라는 말은 ‘능력이 없고, 못나고, 사람구실을 제대로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있어야 할 당연한 힘을 사회적으로 박탈당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인정해야할 힘을 인정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못나지 않았는데 못났다고 억울하게 규정당한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존재이고, 아니 누구 못지않게 훌륭하게 살아갈 존재인데 그 사람구실의 기회를 박탈당했을 뿐입니다.

바로 그런 반성이 이번 헌법 개정 속에 녹아 있습니다.

3.

오늘 복음서에도 한 장애인이 등장합니다. 소위 실로암 연못의 기적입니다.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뜹니다. 

요한복음서를 쓴 분은 이 이야기 속에 절묘한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녹여 놓았습니다. 눈먼 사람과 눈뜬 사람. 일할 수 있는 낮과 일할 수 없는 밤. 보내신 분과 보냄 받은 사람. 죄인과 죄없는 사람. 못 보다가 고침 받고 보는 사람과 눈만 뜨고 있지 못 보는 사람, 그래서 고침 받지 않는 사람. 하나님의 날인 해방으로서의 안식일과 인간의 날인 율법으로서의 안식일.

이렇게 대비되는 것을 하나하나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전체적인 뜻은 한가지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시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똑같으면 참 좋겠는데, 그렇지 않고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럴때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그것이 오늘의 물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는가?’ 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정답이 있습니다. 문제를 내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는 정답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살아가면 됩니다. 그게 정답입니다. 절묘한 대조라고 했지만,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다들 정답을 잘 고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정답이 그렇게도 어려울까요? 정답 말고 내가 가지고 있는 오답이 있어요. 그런데 그 오답이 너무나 매력적이고 그 오답이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거 아닌데 싶으면서도 마음이 거기로 끌립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알고 있는 바 대로 살아가려고 하지만, 동시에 내 마음이 인도하는대로 끌려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때로는 올바르게 서 있는가 싶다가도,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방향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때로는 한없이 선하고 아름다운가 하면, 때로는 악하고 추할뿐입니다.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4.

오늘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답을 찾습니다.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삶이 있습니다. 내가 처한 삶의 현실이 있습니다. 보내진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내 인생의 해답이 있습니다. 보내진 곳, 그곳에서 보내신 분의 뜻을 헤아리고 순종하는 겁니다.

우리 요한복음을 읽고 있는 커다란 주제가 뭐였습니까?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거지요? 나도 잘 몰랐던 나의 본 모습을 깨닫자는 거죠. 그 말을 가지고 그대로 다른 사람을 보면 어떻게 될까요?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무슨 유행가 가사처럼 말이죠. 그 말을 조금 바꿔서요.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내가 당신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당신이라는 사람을 제대로 모르는데, 하물며 당신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나는 실로암에서 씻으면 됩니다. 하지만 당신은요?’ 당신은 당신의 예수를 만나서, 그 예수가 하라는 대로 해야 됩니다. 내가 만난 예수를 누구에게나 강요하면 안 됩니다.

아무나 다 실로암에 가면 되는 게 아닙니다. 눈 먼 사람이 가야지요. 눈 멀쩡한 사람이 괜히 실로암에서 얼굴 씻어봐야 헛일입니다. ‘너는 왜 실로암에서 씻지 않느냐’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그가 만난 예수가 있고, 그 예수가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며,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만드셨나? 나를 어떻게 만나시나?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무엇을 주시는가?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를 깊이 성찰하듯이, 세상을 향한 우리의 고민은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만나실까?’ 이 고민이어야 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