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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 운동의 로마 문명 비판문명·토지·기독교 (2)
박종현(전 관동대 교수) | 승인 2022.06.19 01:56
▲ Luca Giordano, 「Expulsion of the Moneychangers from the Temple」 ⓒWikimediaCommons

신약성서의 시대는 로마제국의 이른바 전성기에 해당한다. 로마는 원래 티베르 강변의 일곱 부족의 연맹체로 출발하였다. 각 부족에서 출마한 사람을 부족 원로회의에서 투표로 선출하여 왕에 임명하였다. 그러기를 약 3백 여 년 로마는 이웃 그리스에서 공화정을 들여온다.

그리스의 공화정은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에서 출현하였다. 시민권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창안한 아테네는 여자, 어린이와 노예를 제외한 시민들의 시민권적 평등권을 제안하여 이들 시민들이 모인 회의를 민회라 하여 거기에서 선출직 통치자를 배출하였다. 이 통치자는 민회의 입법 내용을 실천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래서 정책의 핵심이 경제 정책에 집중되었다. 시민들의 경제적 안녕과 사회적 통합을 위한 정책이 주를 이루었고 대외 전쟁도 중요한 임무였다. 가장 중요한 시의 임무는 시민들이 직업을 갖게하는 것이었다.

로마의 공화정은 전통적 왕정을 폐지하고 시민권 제도를 도입하여 시민의 투표로 최고 통치자인 집정관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전통적 원로 회의를 원로원으로 격상하고 시민을 보호하는 호민관을 두어 권력 집단의 시민권 제한이나 억압을 방어하게 하였다. 이 제도는 약 3백년간 효율적으로 작동하여 로마공화정은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과 대외 전쟁의 승리를 끌어내었다.

로마가 세운 지중해 문명

기원전 140년 로마는 카르타고를 점령하여 지중해 패권 전쟁의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인구 백만의 카르타고는 완전히 파괴되어 로마군은 도시를 재건할 수 없게 폐허에 소금을 뿌렸다. 카르타고 인구의 절반이 노예가 되었고 북아프리카의 방대한 토지는 원로원 귀족들이 점령하였다. 귀족들은 노예와 대토지로 구성된 거대 농업기업인 라티푼디움을 건설하였다. 이 노예 노동으로 운영되는 대농장의 생산품인 밀과 올리브기름은 저가로 시장에 유입되어 중소농장을 소유한 시민들의 생산품을 압도하였다.

시민들의 소규모 농장에서 생산된 상품과 원로원 귀족들의 대농장에서 생산된 상품의 가격 경쟁에서 시민들은 패배하였고 시민들은 1차 파산을 맞게 된다. 시민들은 농장의 토지를 담보로 원로원 귀족들에게 돈을 빌려 다음 몇 년간 농장을 운영한다. 그러나 결과는 동일하게 되고 시민들은 2차로 파산하여 담보로 잡힌 농장을 귀족에게 빼앗기게 된다. 결국 모든 재산을 잃은 시민들은 생계를 위해 귀족들의 대농장에서 노예들과 일하는 임금 노동자가 된다.

이것이 농노의 출현이다. 농노는 시민권을 소유한 자유민이지만 생계를 위해 농장에서 노예와 동일한 노동을 하게 된 사람들을 의미한다. 서양사에서 농노는 서기 5세기경 로마의 멸망 후 중세 초기에 출현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농노의 출현은 이미 기원전 2세기 초와 1세기 말에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시민이 몰락에 저항한 이들이 있었다. 그라쿠스 형제는 원래 집정권을 배출한 유력한 로마의 가문이었다. 이들은 시민의 몰락은 로마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를 감지하였다. 이들은 원래 로마의 농지법에 따라 수탈된 토지를 시민에게 반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농지법을 개정하여 국유지의 방대한 독점을 금지하고 나머지는 국가가 환수하여 농민에게 분여하는 법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미 막대한 부의 과실에 젖은 귀족들은 반대파를 호민관에 임명하여 그라쿠스를 저지하려 하였다. 티베리우스는 호민관 재선을 통해 이 법을 시행하려 하였으나 원로원 귀족들이 난입하여 티베리우스는 살해 당하였고 그의 시신은 티베르 강에 버려졌다.

가이우스 그라쿠스 역시 형의 뒤를 이어 개혁 입법을 제출하였다. 그는 티베리우스의 개혁이 정치 세력의 미비에서 무너졌다고 판단하고 티베리우스의 농지법 개혁안과 더불어 기사 계급으로 재판 배심원을 정하여 신흥 시민 세력의 정치 세력화를 꾀하고 시민권 확대를 주장하여 카르타고 유민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가이우스의 주장 역시 시민권 확대를 반대하는 세력과 기득권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귀족들의 위세에 눌려 좌절되고 만다. 실각한 가이우스는 피신 도중 자살하게 되었고 그의 시신 역시 티베르 강에 던져졌다.

다음 시대는 공화정 말기로 1차 삼두 정치 시대에 권력을 정점에 오른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시민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그는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라쿠스 가문의 농지법 개혁 대신 금융정책을 실행하였다. 귀족들의 농장에서 시장에 나오는 물품에 세금을 매겨 그것으로 시민들이 농장을 경영하도록 경영 자금을 대여하는 것이었다. 이와 유사한 정책은 2008년 미국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 붕괴로 경제위기가 왔을 때 오바마 행정부가 행한 정책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러한 정책은 그가 암살됨으로서 종결되었다. 이후 2차 삼두 정치로 내전이 발발하였고 카이사르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여 로마의 초대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시민의 몰락에 포퓰리즘으로 대처하였다. 그는 실직한 시민들에게 무료 급식을 시행하였다. 막대한 세금의 일부로 빵을 만들어 무상 배급의 형태로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로마 문명을 향한 예수와 원시 기독교 교회의 비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로마의 두 번째 황제인 티베리우스 때라고 누가복음은 알려주고 있다. 예수운동은 구약의 전통을 본질적으로 갱신하는 운동이었다. 예수의 운동은 하느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복음은 철저한 비폭력 평화에 기초하여 구약의 오경의 율법을 영적으로 완성하려는 공동체 운동으로 나타났다.

팔레스타인 속주에서 일어난 이 예수 운동은 로마 당국에게도 문제 거리였고 유대의 기득권 지배층에게도 문제 거리였다. 모종의 정치적 합의를 통해 예수는 기소되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라는 종교적 기득권층이 예수를 고소하였다. 예수는 유대의 산헤드린 법정과 로마의 총독 빌라도의 법정을 거쳐 처형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영원히 불사하는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였다고 증언되었다. 흩어졌던 예수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에클레시아로 다시 모이기 시작하였다. 초기 기독교의 가장 뛰어난 선교사 바울은 영적인 몸으로 부활한 예수를 만난 후 예수 공동체에 합류하였다,

에클레시아는 초기 예수 공동체가 빌려온 그리스어로서 아테네에 시민들이 모인 민회가 에클레시아였다. 예수 공동체는 에클레시아를 정치적 의미에서 영적이고 사회적 의미로 전환하였다. 하느님의 왕국은 투표를 통해 통치지를 선출하지 않았다. 구약성경에서도 그랬고 신약성경에서는 더욱 그랬다. 이 공동체는 지배와 피지배가 아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여자나 남자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차별이 없는 공동체를 구현하였기 때문이었다.

로마제국은 로마인이 이민족을 지배하고,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고, 자유민이 노예를 소유하고 지배하는 체제였으나 예수 공동체 안에서 이 지배체제는 유보되거나 해체되었다. 에클레시아는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염원하였고 모든 권력과 영광이 하늘 아버지에게만 영원히 있기를 원하는 공동체여서 내부의 정치적 갈등에 빠지지 않으려 하였다.

이러한 에클레시아의 성격은 민회의 평등성을 정치적 분배가 아닌 영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재구성한 것이었다. 에클레시아는 로마를 정치적으로 개혁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느님의 왕국으로의 현존에 집중하였다. 사도행전은 에클레시아가 유무상통하였고 전한다. 이는 에클레시아가 공산경제가 아닌 조합주의에 가까움을 보여준다.

공산주의 모토가 생산수단의 공유이지만 사도행전의 에클레시아는 생산을 공동으로 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재원을 모아 금융조합을 구성하고 이를 토대로 소비재를 분배하는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의 에클레시아는 이를 위해 새로운 사람들이 선출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제국의 멸망과 그 원인을 묻는 것은 서양 사학의 중요한 과제였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그 대표적 연구이다. 기번은 서기 16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가 종료되고 그 아들 콤무두스가 황제가 될 때가 제국의 쇠퇴의 시작이라고 본다. 대중적 역사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이보다 앞선 아우렐리우스의 치세 때 이미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와 달리 신약성경의 종말론은 현대 역사가들보다 백여 년 앞선 서기 50년대 말에 이미 로마 문명의 종말을 예견하였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나면 세상의 권력이 심판받을 거라고 확언하였다. 서기 95년 이후에 작성된 요한계시록은 제국에서 유통되고 거래되는 물자들과 인간의 생명을 거래하는 거대한 성읍을 바벨론의 음녀라고 적시하였다. 제국의 심판은 신약성경 안에서 은유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사실 기독교가 출현한 초기 황제시대는 로마제국의 최고의 전성기였다. 소위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부가 절정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네로 사후 약간의 정치적 혼란기를 벗어나면 다음은 오현제 시대라는 최고의 번영기를 맞게 된다. 당시의 그 누구도 제국의 몰락을 예견하지 않았다. 신약성경 외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문명의 지속 가능성

토지는 자연이며 생명의 원천이며 또한 부의 원천이다. 현재까지 지속 해온 문명은 소규모이며 토지를 재산이 아니라 삶의 원천으로 소중히 여기며 살아온 경우에 한정된다. 오히려 거대 문명과 제국들은 반드시 붕괴하였다.

기독교의 출현은 제국을 붕괴에서 구하기 위한 것인가?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서서히 성장하였다. 로마는 양적으로 기독교화되고 있었다. 동시에 기독교의 로마화도 진행되고 있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260년 이상 지속되던 기독교 제국의 박해가 사라졌다. 기독교회는 영광과 권력의 옷을 입었다.

주교는 황제의 보라색 가운을 입었고 황제처럼 지팡이를 쥐었다. 가이사랴의 주교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메시야라고 칭송하였다. 주 안에서 평등한 에클레시아는 주교부터 아래까지 정연한 질서를 가진 위계의 조직이 되었다. 확실히 기독교회는 로마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교회의 세속화에 반발한 이ㅣ들이 산속으로 그리고 사막으로 숨어들어 문명의 경계 밖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제국의 정치적 격변과 경제적 쇠퇴는 반복되었지만 로마의 개혁의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었다. 서기 5세기 이민족들의 로마 영토 침략이 반복되었다. 410년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를 침공했다. 476년 게르만 이민족이 수도 로마를 함락시켰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 163년 만의 일이었다. 기독교 제국 로마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구약성경의 이스라엘의 지속 가능성의 실패와 로마제국이 기독교화 된 후에도 로마제국은 변화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채 붕괴되었다. 고대 이스라엘과 로마제국 모두 토지경제가 귀족의 탐욕으로 붕괴되고 일반 백성이나 시민층의 붕괴가 근본적 원인이었다. 문명의 지속 가능성이 역사적으로 국가 단위로 이루어진 적은 없다. 권력을 토대로 하여 인간의 인간 지배를 기초로 경제적 과점을 배제할 수 있는 체제를 창출하는 것은 현재까지 불가능하였다. 단 보완을 위해서는 개인의 경제적 붕괴를 받쳐 줄 사회적 공동체가 요청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공동체는 평등을 지향하고 경제적 기본권을 공유하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이다.

박종현(전 관동대 교수)  cuch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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