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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이야기 해도 안 되는 거야!현세와 내세의 역전, 그 진실(누가복음 16:19~31)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2.06.21 23:29

오늘 우리는 이른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로 알려진 예수님의 비유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환기해볼까요?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일부 사본에는 네우스라는 이름이 붙어 있기도 합니다.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 사람의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는 가난뱅이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11장)에 나오는 나사로와 동일인물이라는 근거는 없습니다. 원문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데 번역에 따라 ‘거지’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나사로는 대문 앞에 누워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 하였습니다. 부스러기만으로는 배를 채울 수 없었기에 늘 허기진 상태였습니다. 개들까지 달라붙어 그의 헌데를 핥을 만큼 무력한 존재였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서에는 사실 저세상 관념이 뚜렷하지 않은데, 여기서 모호한 형태로 그 관념이 등장합니다.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이끌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지옥(하데스)에 가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아브라함에게 애처롭게 호소합니다.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단 한 방울의 물이라도 묻혀서 자신의 목을 축여줄 수 있도록 해 주면 안 되겠냐고 호소합니다.

아브라함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살아 있을 때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아브라함은 덧붙이기를 그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서로 넘나들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부자는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 고통의 와중에 부자는 살아 있는 자기 형제들을 염려합니다. 나사로를 그 다섯 형제들에게 보내 형제들이 지옥의 고통을 면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이미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가 있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다 알 수 있다고 답합니다. 부자는 그래도 알지 못하니,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그들에게 가면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답하기를,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 누가 살아서 이야기해 준다 하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의 현실 그 자체 안에서 깨우치지 못한다면 소용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부분, 두 가지 초점으로 나뉩니다. 비유가 대개 한 가지 명확한 초점을 겨냥하지만, 전승과 편집 과정에서 다른 초점이 추가되는 일 또한 흔히 있는 일입니다. 첫 번째 부분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현세와 내세에서 역전된 사실을 전하는 것(19~26)이고, 두 번째 부분은 죽은 자의 전갈이 산 자의 삶을 바꾸지 못하는 현실을 전하는 것(27~31)입니다. 과연 이 이야기가 함축하는 뜻이 무엇일까요?

우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부자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초점은 부자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고, 부자가 그 불행한 운명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데 있습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던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겪게 되었다는 것은 충격적인 운명의 역전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지만, 당시 유대 사람들의 통념상 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죽은 다음에 지옥에서 고통을 겪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그 청중들에게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반면에 통념상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진 거지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누립니다. 역시 놀라운 일입니다. 사람들의 상식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이야기가 여기서 그쳤다면, 사실 그다지 놀라울 것 없습니다. 이런 형태의 이야기는 아주 흔해 빠졌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기록된 이 이야기 자체가 성서의 배경이 되는 여러 문화권에서 아주 널리 유포되어 있는 이야기와 유사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현세와 내세에서 완전히 역전된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보면 충격적일 수 있지만, 사실 그 이야기가 유포된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언제나 불공평한 현실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오용되어 왔을 뿐입니다. 내세에서의 보상을 바라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현실에 순응하도록 하는 효과를 지녀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천상의 재물에 대한 공평한 분배’는 ‘지상의 재물에 대한 불공평한 분배’(브레히트, <도시 마하고니의 흥망성쇠>; 에른스트 블로흐)를 정당화해 왔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진가는 그 반전, 곧 오히려 죽은 다음에 후회해봐야 소용없다는 두 번째 초점에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비유 자체에서 죽은 자의 전갈은 산 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결론 내려져 있지만, 이 비유는 분명한 현장의 청중을 두고 있습니다. 청중들이 이 이야기의 진실을 알아듣고 결단을 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앞부분은 그 청중이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라고 한 점에서(16:14)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부자,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가난한 자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기에 그 운명이 현세와 내세에서 역전되었을까요? 비유를 잘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합니다. 부자는 착취를 일삼는 사악한 사람이라거나 불경건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난한 나사로 역시 경건한 사람이거나 의로운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현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행태가 담담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입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고 합니다. 반면 거지 나사로는 그 집 대문 앞에서 헌데 투성이 몸으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허기를 채우고 있었고, 개들까지도 그의 헌데를 핥고 있었다고 합니다.

극적으로 대비되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이 현실이 문제라는 것을 뜻합니다. 가난한 자의 비참한 현실을 외면하는 부자의 호화로운 삶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대비는 ‘내 소유로 내가 누리고자 하는 것을 누릴 뿐, 그것은 내 자유’라는 상식을 문제시하는 것입니다. 한편의 사람은 맘껏 누리고 한편의 사람은 생존을 유지하기에도 버거울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정의로운 사회적 관계가 무너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부자의 잘못은 그 관계를 외면하고 자기 세계에 급급한 데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그 현실에서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이기에 정의로운 하나님의 손길로 인도받게 된 것입니다.

▲ Hendrick ter Brugghen, 「The Rich Man and the Poor Lazarus」 (1625) ⓒWikimediaCommons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누가 18:25) 민중신학자 서남동 선생은 이 말씀을 두고 단호하게 말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로 해석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뉘는 현실을 두고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것은 ‘동그란 네모’, 곧 어불성설이라는 뜻입니다.

그 진실을 저세상에 가서야 알아차린 부자가 자기 형제들만큼은 자기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도록 일깨워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그 요청을 들은 아브라함이 단호하게 말합니다. ‘살아 있을 때 잘해! 그것 말고 달리 길이 없어!’ 죽은 자를 돌려보낼 필요도 없이 이미 바른 길을 살도록 길이 제시되어 있는데, 뭐가 더 필요하냐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살아 있는 삶의 현실 가운데 제시되어 있는 그 길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이 나타났다고 해서 화들짝 놀라 돌이킬 리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냉혹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저세상에도 피차 건널 수 없는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다(16:26)고 했을까요?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이미 제시되어 있는 바른 길이 무엇입니까?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율법과 예언의 가르침을 뜻합니다. 그 가르침은 성서에서 3천 번 이상 반복되기에 일일이 들어 이야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군데 인용하면, 모세의 율법은 외국인,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에게 베풀어야 할 자비와 정의를 끊임없이 강조합니다(신명 24:6이하). 예언자들의 선포는 특정 본문을 들어 이야기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이뤄져야 할 하나님의 정의가 그 요체입니다. 누가복음은 특별히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이 지대합니다. 일관되게 빈부 현실 그 자체를 문제시하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하나님을 강조합니다(1:53; 6:20~26; 12:13~21).

성서의 율법과 예언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말하려는 데 그 뜻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인간이 어떤 사회를 형성해야 할지를 일깨워주는 데 그 뜻이 있습니다. 인간의 결단, 곧 행동을 촉구하는데 그 뜻이 있습니다. 역사적 교훈이 일러주듯, 나라에 망조가 들 때 나타나는 요승들의 괴변이나 주술적 예언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서의 율법과 예언은 하나님의 정의를 땅 위에 실현하라는 명백하고도 엄중한 요청으로, 이미 살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주어져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는, 바로 그 진실을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이 부조리한 땅의 현실을 변화시키도록 촉구합니다. ‘지상의 재물에 대한 불공평한 분배’를 문제 삼지 말고 ‘천상의 재물에 대한 공평한 분배’를 기대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상의 재물이 공평하게 나눠질 때 그것이 곧 천상의 삶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과 예언이 그것을 선포하고 있는데, 도대체 사람들이 그것을 외면하고 있으니 안타깝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기묘한 예언과 주술의 시대를 살게 되었습니다. ‘성장만 더 하면 모든 문제가 풀린다’는 이른바 ‘낙수(落穗)효과론’은 경제학이라기보다는 주문에 가깝습니다. 경제가 성장해도 고용이 늘지 않고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는 현상이 명약관화한데도 그 현실에 대한 타개책은 빠져 있는 경제정책을 새 정부가 내세우고 있습니다. 예견한 바이지만, 이렇게 원색적이고 노골적일 수 있을까요? 법인세와 종부세 깎고, 각종 규제를 풀고, 중대재해처벌법 개정하고, 52시간 근무제는 유연화하고, 최저임금제도 손 봐서 기업의 투자를 유도하겠다는 정책만 두드러질 뿐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대안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재벌과 부자는 탄성을 지르지만 몸밖에 내놓을 게 없는 노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탄식을 내뱉는 상황입니다. 낙타가 들어갈 바늘구멍을 크게 뚫은 격입니다.

과거 박근혜 정부가 허울뿐이지만 경제민주화를 내세웠던 것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제정책입니다. 인간 없는 경제, 정의 없는 사회, 승자독식, 약육강식의 논리가 자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사태입니다. ‘건진’이니 ‘청운’이니 하는 이름이 국정주변에 어른거릴 때부터 망조가 예견되었지만, 이 정부는 아예 경제정책이 아닌 재벌을 위한 주술을 온 사회에 작동시키기로 작정한 것 같습니다.

교회 역시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데 관심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차별 가운데 고통을 겪는 이들에 대한 관심은 이제 교회의 관심사 밖으로 벗어나 있습니다. “인간을 먹여 살리는 것보다 구원해 주는 것이 훨씬 쉽다.” 그 말이 함축하는 뜻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혹한 경쟁의 현실에서 싸워 이겨 승자로 살아갈 것만을 가르치는 것이 교회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현실에서 우리는 오늘 말씀의 의미를 새깁니다. 거지 나사로가 부자의 대문 앞에서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니기는커녕 비참하게 연명하며 목숨을 부지하는 현실을 두고 그 누구도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는 진실을 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 강자와 약자가 따로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매형제로서 진정한 삶을 누리는 세계를 향한 꿈을 저버리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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