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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세우신 교회, 가라지와 곡식이 함께 있는 공동체(삼하 18:9-15; 엡 3:14-21; 마 13:24-30)성령강림 후 셋째 주일(6월26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2.06.23 21:01

1.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살다 보면, 가족 간에도 원수가 있고, 또 전혀 생면부지지만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이웃도 있습니다. 지난주 말씀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마 12:50), 곧 가족이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혈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공동체가 예수님의 가족이며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그러나 비록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사탄의 꾀임에 빼져 교회공동체를 위기에 빠뜨리고, 무너뜨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의 위기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옵니다.

지난 3여 년 간의 코로나 위기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이 위기의 시작은 바이러스라는 외부적인 요인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내부적인 위기입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내적 위기입니다. 그 결과 예배를 사모하는 열정이 사라지고, 말씀을 갈구하는 심령이 세상의 욕망과 가치로 무뎌지고, 더불어 사는 삶이 아니라, 각자도생의 삶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위기가 더욱 깊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에는 곡식과 함께 자라는 가라지가 있습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렇게 가라지를 통한 위기를 보여줍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을 통해서 교회공동체 안에는 가라지와 곡식이 함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위기의 시작입니다. 구약 말씀은 다윗 왕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과 다윗의 군대 총사령관이었던 요압의 교만을 보여줍니다. 이들이 다윗왕에게는 가라지입니다. 위기의 전개입니다. 참 서글픕니다. 아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또 가장 믿었던 신하가 다윗의 뜻을 거스릅니다.

따라서 서신서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있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충만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여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위기의 극복입니다. 따라서 비록 가라지와 곡식이 함께 있는 공동체지만, 끝까지 참고 견디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마 13:24-27)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비유입니다. 좋은 씨를 밭에 뿌렸으나 원수가 와서 가라지도 덧뿌렸습니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 가라지도 보입니다. 가라지는 볏과에 속한 한해살이풀입니다. 밭에서 자라며 강아지풀과 외형이 비슷합니다. 물론 밀과 비슷해서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는지 묻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 가라지, 보리, 밀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28-30)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합니다. 따라서 추수 때까지 함께 두라고 합니다. 그리고 추수 때 가라지는 가라지대로 묶어 불사르고, 곡식은 모아 곳간에 넣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천국 비유입니다. 천국은 곡식에는 곳간과 같은 안전하고 좋은 곳이지만, 가라지에게는 불지옥과 심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말씀이죠? 마지막 날에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저 사람은 가라지인데, 우리 공동체를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사람이라 뽑아 없애버리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하심입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무너지는데, 공동체가 파괴될 텐데! 그런데도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 사람은 가라지고, 나는 알곡이라고 판단하는 그 사람이 바로 가라지라는 사실입니다. 교만하고, 오만한 자리에 앉는 순간 가라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 말씀에 압살롬이 그랬고, 또한 압살롬을 죽인 요압 장군이 그렇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2. 오만한 다윗의 아들 압살롬과 교만한 요압 장군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알려 이르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하니, 요압이 그 알린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하는지라.”(삼하 18:9-11)

▲ 다윗의 자녀

압살롬은 다윗의 셋째아들입니다. 다윗 왕은 여러 아내를 두었고 아들도 많았습니다. 그 아들들 가운데 압살롬은 누구보다 영리했고 잘생긴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고 했습니다. 반역, 곧 쿠데타를 일으킨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으로 왕궁을 떠나 도망가야 했습니다. 압살롬과 그의 군사들이 다윗의 왕궁으로 들어와 궁을 장악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밧세바의 조부인 아히도벨에게 물어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악을 자행했습니다(삼하 16:20-22). 손녀사위인 우리야 장군의 복수를 꿈꾸었던 아히도벨의 계략과 압살롬의 오만이 결합한 아주 불행한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다윗 왕은 요압, 아비새, 잇대 장군, 세 사람을 중심으로 군사들을 모아 압살롬의 군대와 싸울 준비를 했습니다. 다윗의 수하에 있던 장수들 대부분이 압살롬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다윗 왕의 군사보다 압살롬의 군사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과 세 장군은 두려워하지 않고 압살롬과 맞설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물론 이 전쟁에서 다윗의 세 장군이 압살롬의 군대와 싸워 승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승리한 이후의 일입니다. 전쟁에서 패한 압살롬이 도망가다가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렸습니다. 오만하게 머리를 든 자는 그 오만한 머리 때문에 반드시 죽게 됩니다. 아무튼 그 모습을 보고 다윗의 부하 한 사람이 요압에게 보고를 합니다. 요압은 왜 압살롬을 죽이지 않았느냐고 부하를 닦달합니다. 그러자 그 부하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젊은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의 생명을 해하였더라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하니”(삼하 18:12-13)

▲ 요압의 형제들

그런데 요압이 어떻게 하죠? “요압이 이르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 죽이느라(삼하 18:14-15).” 압살롬을 죽여버립니다. 삼무엘하 18장에 보면,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다윗은 요압 등 부하들에게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삼하 18:5)”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다윗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압살롬을 죽여 버립니다. 오만한 압살롬의 최후입니다만, 동시에 요압의 교만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 압살롬의 최후

잘 아시다시피, 요압은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로, 다윗의 조카입니다. 요압은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된 후, 사울의 집안과 다윗의 집안이 싸울 때, 처음 등장합니다(삼하 2:13). 다윗이 사울을 피해 가드를 떠나, 아둘람 동굴로 피신했을 때, 다윗의 형제들과 집안사람들이 다윗을 만나러 갔습니다. 이때 환난 겪고 빚진 자, 원통한 자가 다 모였는데, 400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삼하 22:1-2). 아마도 이때부터 요압은 다윗과 함께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요압과 그의 형제 아사헬과 아비새는 싸움에 능한 용감한 군사들이었습니다. 수많은 전쟁에서 다윗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습니다. 특히 요압은 다윗의 군사령관으로 오랫동안 함께 했으며 가장 측근에서 다윗을 보필하고 다윗이 왕이 되는 데 큰 공을 세운 장군입니다. 그러나 요압은 삼무엘하 23장 8절부터 소개되는 다윗의 용사 37명에 들지 못합니다. 그의 동생인 아비새와 아사헬, 심지어 그의 무기를 들고 다녔던 브에롯 사람 나하래까지 이름이 있는데(삼하 23:37), 정작 요압의 이름은 없습니다. 다윗의 최측근이었지만, 교만한 요압은 결국 다윗을 배반하는 길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늙어 몸이 쇠약해지자, 다윗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고, 사람들을 모았을 때, 요압은 아도니야를 도와 ‘반 다윗/솔로몬’ 전선에 서게 됩니다. 요압이 아도니야를 좇은 것은 이해가 됩니다. 요압 입장에서는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아이가 죽고 솔로몬이 태어났을 때, 하나님은 솔로몬을 사랑하셨다고 합니다만(삼하 12:24), 그 자초지종을 알고 있는 요압 입장에서는 솔로몬이 왕이 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다윗은 이런 요압이 버거웠을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과 함께하여,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다윗의 왕국을 강성하게 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왕임에도 불구하고 요압을 함부로 할 수도, 또한 통제할 수도 없었습니다. 칼에 의지하고, 권력을 탐했던 교만한 요압의 힘이 다윗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으로 “요압의 백발이 평안히 무덤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라고 말합니다(왕상 2:6).

따라서 솔로몬은 왕이 된 후, 요압을 제거합니다. 먼저 아도니야와 함께 반역에 가담했던 제사장 아비아달의 지위를 박탈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며, 이후 제단 뿔을 잡고 버티던 요압을 처단하여 질기고 긴 악연을 끝냅니다(왕상 2:23-34). 그러나 다윗과 솔로몬이 요압을 제거한 것은 단지 그가 아도니야를 좇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모든 행동과 삶이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 아마사를 죽이는 요압

조금 더 살펴볼까요? 압살롬의 반란이 제압된 후, 베냐민 지파 출신인 세바가 이스라엘 백성을 충동질하여 또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때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에 동참했으나, 이제 다윗 편에 서게 된 아마사를 군사령관으로 세웁니다. 그러나 요압은 아마사를 죽여버립니다(삼하 20:4, 9-10). 한 번 배신하면 두 번째는 쉽죠? 물론 요압은 반역을 진압했던 자신 대신, 오히려 반역에 동참했던 아마사를 군사령관으로 세우는 다윗을 못마땅해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통합 정치를 요압이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정치도 마찬가지죠?

이것이 바로 교만한 자의 모습입니다. 자기가 왕이죠? 자기 마음대로, 자기 기준대로 판단합니다. 무죄한 사람들을 살해하고, 또 다윗의 부탁에도 무방비 상태의 압살롬을 죽일 때, 아합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나, ‘왕에 대한 존중’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오만하고 교만한 가라지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에는 가라지와 곡식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오만했던 압살롬은 요압의 손에, 또 교만했던 요압은 솔로몬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가라지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다 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세우신, 제대로 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그 비결을 몇 가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3.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4-19)

첫째, 속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어야 합니다. 압살롬처럼 오만하거나 요압처럼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오만한 자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셋째는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가라지가 발붙일 틈이 없을 것입니다. 교만의 싹이 자라지 않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랑에는 끝없는 너비와 한없는 높이와 가름할 수 없는 깊이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가 충만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조금 어렵습니다. 특히 18절과 19절이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공동번역이 잘 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표준새번역의 ‘충만(πλήρωμα)’을 공동번역은 ‘완성’으로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헬라어 원어 ‘플레로마’는 ‘차고 넘치는 완전한 분량’을 의미합니다. 가령 산모가 아기를 낳기 위해 기다리는 중에, 때가 충만히 차서 출산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산달이 충만해서 이제 아기가 태어났기에 완성이 된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계획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완성하라는 뜻이죠? 새사람으로 거듭 태어나 새로운 세상을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가 성령께서 세우신 제대로 된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는 비록 가라지와 곡식이 함께 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이렇게 복을 빕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2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남부산용호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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