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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트루스(Post-truth) 시대에서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새로 보기포스트 트루스(Post-truth) 시대에서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새로 보기 ⑴
이은선(세종대 명예교수, 한국信연구소장) | 승인 2022.06.25 03:17

참(至誠)과 대공(大公)의 삶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이야기는 우리가 이미 익히 많이 들어서 지금 다시 말하는 것이 그렇게 새롭게 들리지 않을 수 있다. 서울 강남의 대표적인 거리가 그의 이름을 딴 것이고(도산대로), 그를 기념하는 공원(도산공원)이 있으며, 그가 했다는 여러 말들이 우리 삶에서 종종 회자 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도 오늘 다시 그의 삶과 인격, 그가 1878년 평양 대동강 도롱섬에서 태어나서 1938년 6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길을 다시 돌아보고자 하는 것은 2019년의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이어서, 2020년에는 1950년 한국전쟁, 1960년 4.9 혁명,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등 20세기 대한민국의 독립과 자주, 민주와 통일을 위해 있었던 기축 사건의 대표적 기념일들이 줄줄이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서세동점의 큰 전환기에 태어나서 대한민국 20세기 전반기 역사 전개에서 선생은 여러 중층적 역할과 활동으로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근본적 토대를 놓으신 분 중의 하나이고, 거기에 더해서 특히 그의 ‘참’과 ‘진실’, ‘정직’과 인간 말의 ‘약속’에 대한 강조가 오늘 21세기 ‘포스트 트루스’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지금 한반도의 현실뿐 아니라 인류 문명의 정황은 ‘참(truth)’이 무엇이고, ‘진실(誠)’이 무엇이며, 왜 역사와 ‘사실(fact)’이 중요한가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더 많은 사람의 동의를 끌어내어서 특정 의견(opinion)과 입장과 관점을 사실과 진실로 포장하고 왜곡시키는 일이 빈번하고, 그것으로써 현실과 실제를 호도하는 포스트 트루스 시대가 되었다. 올해 대선과 지방선거가 모두 끝났지만 요사이 영화 ‘그대가 조국’으로 다시 뜨거운 논란이 일고 있는 ‘조국 또는 윤석열 사태’나 지금은 영부인이 되었지만, 이전의 주가조작이나 학력위조 사건, 더 오래되고 포괄적인 차원에서 일제 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정의연(정의기억연대) 사태, 또는 N번방 사건 등이 모두 적나라한 증거이다. 문재인 정부 때,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관련해서 2018년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의 속내를 폭로한 존 볼턴이나 그 한 당사자 트럼프 대통령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21세기 세계 정치가 어느 정도로 거짓과 왜곡, 자기 이익의 전쟁터로 전락했는가를 실감했었다. 그 모든 것과 더불어 코로나 19 팬데믹까지 겪고 있는 인류의 미래가 매우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으며, 한반도의 현실은 거짓과 권모술수, 핵무기 등의 물리적 힘만을 내세우는 세계 강대국들의 횡포에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894년 16세 때 평양에서 겪은 청일전쟁에서 나라에 힘이 없으므로 남이 들어와서 마구 전쟁을 저지르는 것을 목도한 안창호 선생은 우선 나라의 힘을 길러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서울로 와서 구세학당(救世學堂, 오늘의 경신학교)에 들어가고, 기독교인이 된다. 이후 그의 삶의 여정은 우리가 익히 들었듯이, 미국과 상해, 만주와 유럽 등, 온 세계를 거치면서 어떻게든 나라의 독립과 자주, 주체를 이루고, 그 과정에서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노선을 달리하면서 분쟁하는 그룹들을 연결하여 하나 되게 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나간 조정자와 조직가, 화해자의 그것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21세기를 사는 본인에게 특히 다가온 주제와 개념은 그의 “진실”과 “거짓 없음”에 대한 강조이고, 특히 오늘날 극도의 개인주의와 자아 중심주의가 판치는 시대에서 선생의 일관된 “대공주의(大公主義)”(1),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나가는 방식으로 택한 “점진(漸進)”의 방식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포스트 트루스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간략하게 성찰해 보고자 한다.

유교 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통합적 영성가 도산 안창호 선생

도산은 일생 3개의 학교를 세웠는데, 그중 1899년 22세의 나이로 고향 평남 강서에 설립한 ‘점진학교(漸進學校)’가 있다. 이 이름에서도 잘 드러나는 대로 선생은 민중의 계몽에서도 그렇고,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방식에서도 국민(民) 한 사람 한 사람의 자각과 그들의 바른 인격 확립과 고양을 제일 중시했다. 그래서 그는 점진적으로 민중의 자각을 기다리고, 스스로 지도자로 나서는 것보다는 철저히 지공무사(至公無私)의 방식으로 민중 속에서 지도자를 발견하면서 거기서 민심을 일구게 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러한 선생의 원칙과 방식은 그가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 활동에서 배우고, 당시 행한 유명한 쾌재정의 연설에서부터 생애 마지막 활동에까지 고수되었다.(2)

1902년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주권을 잃자 돌아와서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1907년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大成學校), 한일병탄으로 완전히 독립을 잃어버리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기한 흥사단(興士團) 운동, 3.1운동 후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의 분열과 해체를 막기 위해 소집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 또한 1924년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이상촌 건설을 위해 북만주 등을 탐사하며 남경에 세운 동명학원(東明學園)과 1928년 이동녕, 이시영, 김구 등과 함께 상해에서 결성한 한국독립당 등,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 폭탄 사건 때 한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외출했다가 체포되어 고국의 감옥에 살았고, 다시 동우회(同友會) 사건으로 재수감되어 1938년 순국하기까지 지속해서 수행된 것을 말한다. 그가 말년의 2년여를 평양 근처 대보산 기슭에 송태산장을 일구어 민족정신의 고취와 수양을 도모한 것도 모두 같은 기초 정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은 우리 민족이 힘을 잃고 도탄에 빠진 가장 큰 요인이 참을 잃고 거짓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또한 실(眞實)을 잃고 공담공론(空談空論)으로 분쟁에 빠지고, 책임을 남에게 미루며, 쉽게 낙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면서 진정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한다면 그 방법을 멀리서 찾지 말고 “먼저 우리의 가장 큰 원수가 되는 속임을 버리고서 각 개인의 가슴 가운데 진실과 정직을 모셔야 하겠습니다”라고 강변한다.(3) 그가 세운 학교의 생도들에게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는데, 그는 적 앞에서라도 “침묵은 할지언정 거짓말은 말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선생은 당시 포악한 일제의 침략과 찬탈 앞에서 어쩌면 아주 순진하게 들리고, 이것이야말로 공리공담처럼 보일 수 있고, 오늘 참과 진실이 더 고려되지 않는 포스트 트루스 시대에는 더더욱이 그 의미가 다 한 것 같은 이러한 이야기를 어떻게 그렇게 강조하실 수 있었을까? 그리고 오늘 우리는 어떤 근거로 이 이야기가 여전히 의미가 있고, 오늘 우리 시대야말로 그와 같은 진실 고수가 더욱 긴요하다고 강조하며 다시 가져오고자 하는가? 본인은 그 대답이 다름 아니라 곧 그의 어린 시절부터의 공부 환경과 오래 축적된 ‘참(誠)’과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삶 자체 안에 들어있다고 본다.

이제까지 선생에 관한 연구는 그를 주로 한 사람의 기독인으로 보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당시 나라의 힘을 기르고자 서울로 올라와서 예수교 장로교회 교인이 되었고, 1902년 선교사 밀러 목사의 주례로 지금의 세브란스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으로 가서 영어와 신학을 배운 배경이 그를 주로 기독인으로 규정해온 배경이다. 하지만 본인은 사실 그 기독교 신앙보다도 그의 삶과 사고를 더 근본적으로 기초 놓고 지지한 것은, 그 이전에 그가 받은 오랜 집안 내력의 유교적 가르침과 무실역행의 실행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고려말 충신 안향의 후손으로 어린 시절 <천자문>을 공부하다 9세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14세부터 16세까지 당시 성리학자 김현진(金鉉鎭) 문하에서 한학과 성리학을 배웠으며, 거기서 함께 공부하던 연상의 청년 선각자 필대은(畢大殷, 1875-1902)을 만나 시국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4)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이 있었던 1894년 전후 서당에서 만난 선배 필대은은 중국 고전과 중국 당대 신서들을 많이 읽은 “선각적 민족의식을 갖고 있던 청년”이었는데, 동학당의 참모가 되기도 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되었다.(5) 본인은 이처럼 도산이 근대 서구 개신교 신앙을 접하기 이전 체득하고 있던 유교 공부의 ‘위기지학적(爲己之學的)’ 성격과 ‘천하위공(天下爲公, 천하는 만인의 것)’, 빈한한 집안 형편으로 15세까지 목동 생활을 하며 실제의 삶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공부한 것 등이 그의 지성일관(至誠一貫)과 무실역행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이해한다.

익히 들었듯이 그는 미국에 유학 가서 공부하다가 그곳 한인 동포의 불결하고 비인간적인 생활의 모습을 보고서 공부를 접어두고 몸소 청소부가 되어서 동포들의 생활 개조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직접 청소 인부로 일하면서 성실과 신의로써 그곳 사람들의 한인에 대한 의식을 바꾸어 나갔다. 도산은 그렇게 민족 각 사람의 인격과 삶을 건전하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우리 민족을 건강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고, 그들을 참된 선비로 기르는 일, 즉 ‘흥사(興士)’의 일이야말로 진정한 구국 운동이 된다고 보았다. 여기서도 보듯이 도산 스스로가 삶과 배움을 직접 몸과 마음으로 실행하면서 ‘사실’과 ‘진실’이 어떻게 인간 공동체 삶에서 토대가 되며, 만약 그것이 오늘 포스트 트루스 시대처럼 무시된다면 이 세상 삶은 지지대 없이 온통 만인 대 만인의 싸움과 투쟁으로 전락할 것을 직관한 것이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실(實)과 진실(誠), 정직(正)과 약속이 중한 것을 알았고, 이후 매일의 생활에서 그것을 올바른 예의범절로 습관화해서 체화하며 살았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는 항상 정결한 삶과 깨끗한 주변 환경을 유지했고, 성경뿐 아니라 유교 경전을 읽고서 아침 일찍 일어나 참선하고 반복해서 좌선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6) 도산 연구가 박재순 박사는 최근 도산으로부터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 생명철학의 “계보”의 시작을 안창호 선생으로 보면서, 그것이 이승훈, 유영모, 함석헌으로 이어졌다고 밝혔다.(7) 거기서의 정신적 후예 함석헌(1901-1989)은 그의 글 「남강(南崗)·도산(島山)·고당(古堂) 1959」에서 자신이 큰 스승으로 생각하는 도산이 평생 좋아한 글귀가 “오직 지극한 정성이라야만 능히 물건에 움직이지 않고, 오직 지극한 정성이라야만 능히 물건을 움직인다(有至誠不能動於物 有至誠能動物)”였다고 밝혔다.(8) 이것은 유교 『중용』의 ‘誠’을 도산의 핵심 사상으로 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도산은 자신이 기도하는 모든 일을 오로지 ‘참(誠)’을 따르고 ‘거짓’을 버리고 허(虛)와 위(僞)가 아닌 진(眞)과 정(正)으로 기초로 삼는 일로 보았다.(9) 그러는 가운데 그는 스스로가 더욱더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라고 믿게 되었으며, 그래서 그와 같은 흥사단 정신을 따르고자 하는 단원을 뽑는 인터뷰에서 비유하기를, 지금 수억 명이 되는 예수교도 처음 예수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처럼, 그렇게 건전한 한 사람의 인격자로부터 시작해서 민족의 재생과 부흥이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흥사단은 정치 단체도 아니고 혁명 단체도 아닌 “수양 단체”로서 일종의 “신성 단결(神聖 團結)”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10) 즉 도산의 참과 진실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통상의 예수교 교리처럼 어떤 십자가의 공로로 속죄받는다는 속죄 신학 등을 믿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 깊은 내재신적 초월 신앙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11) 그리하여 자신의 일생 사업이 된 흥사단이나 동우회(同友會)의 일을 일종의 “성인(聖人)을 목적으로 인격을 수양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12) 즉 ‘성인지도(聖人之道, To become a sage)’의 길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예수를 “고마우시고 크신 선생님”이라고 평할 뿐이었다고 하고, “그의 사랑론과 평화론도 그가 스스로 생각해내고 스스로 믿는 것이지 누구의 설이나 어느 신앙에 의거한 것은 아니었다”라는 평을 들었다.(13)

여기서 본인은 다시 앞서 언급한 함석헌의 경우가 생각난다. 함석헌은 평북 용천 출신으로 일찍부터 그곳에 유입된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서 크게 주체가 일깨워지고 인격적 하나님 신앙을 얻게 되었지만, 그는 또다시 보수화된 기독교회가 강조하는 ‘대속(代贖)’의 교리가 다시 우리 인격을 억압하고, 교권적 중개자의 노예로 만드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밝히기를, 인격은 결코 대신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유하고 생각하는 인격에게 대속은 고마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모독”으로 들린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 참으로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려면 예수의 그리스도가 “예수에게서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내 속에도 있다”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한다고 밝히면서 “중보(中保) 소리 많이 하는 종교”는 “협잡 종교”라고 일갈했다. 그리고 미래의 종교는 “노력의 종교”가 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본인은 이와 같은 함석헌이 그의 스승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1890-1981)와 함께 일군 씨ᄋᆞᆯ 사상이 바로 우리의 전통적 언어로 ‘仁’의 사유와 다른 것이 아니라고 보고, 그를 한 사람의 “仁의 사도”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그 시원이 안창호 선생의 인격에 있는 것을 본다.(14)

선생은 1925년 미주 여자애국단 설립 기념식 강연에서 자신이 한국인 최초의 서양 의학사였던 서재필(1864-1951) 박사와 특히 『서유견문』의 유길준(1856-1914)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음을 밝혔다. 주지하다시피 선생은 유길준이 한일병탄 전에 민족 고유의 ‘사(士)’ 정신에 주목하여 전 국민을 교육하고 계몽하여 모두 ‘선비’로 만들겠다는 뜻으로 만든 ‘흥사단’의 정신을 이어받아 재창립하였다. 이와 더불어 도산은 청나라 말기 변법자강(變法自疆)운동의 개혁가 양계초(梁啓超, 1873-1929)의 저서를 애독하였다고 하는데, 선생이 1907년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의 한문 교제로 그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이 사용되었고, 도산 스스로가 그에 대해서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15) 양계초는 청말의 개혁사상가로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하고 파괴적인 결과를 경험하고 서양 과학 문명의 한계를 뚜렷이 깨달았으며, 그러면서 다시 동양적 자긍심의 회복을 강조하며 동서융화의 입장(“내적 인성을 완성하고 외적 변화에 참여한다盡性贊化”)으로 나아간 것이 지적되는데,(16) 도산이 그렇게 중국 인민의 주체성을 강조한 양계초 사고를 중시했다면, 도산의 기독교 신앙도 결코 단순한 서구 가치 일변도의 그것이 아니었고, 배타적인 무사유의 독존적 기독교 신앙이 아니었을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보면서 도산 안창호 선생이야말로 동아시아 전통의 유교 문명과 서구 근대 기독교 문명이 함께 탄생시킨 참된 인간성(仁/誠)의 영성적 지도자라고 보고 싶고, 그의 진실과 무실역행의 가르침은 오늘 포스트 트루스 시대에 우리에게 다시 참(實)과 정(正)과 선(善)의 깊은 의미를 새롭게 지시해 준다고 여긴다. 즉 그는 『맹자』 진심하장(盡心下 25)의 언술대로 “선이란 우리가 원하는 것이고, 믿음이란 내 몸에 있는 것(可欲之謂善, 有諸己之謂信)”이라는 언술대로, 선과 의란 인간 누구나가 참으로 바라는 것이고, 그렇게 우리가 원해서 참과 진실, 정의를 믿는 믿음이란 다른 곳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무실(務實)과 역행(力行)의 삶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임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대한독립 운동의 순국자일 뿐 아니라 앞으로 인류가 더욱 필요로 하는 인류 ‘보편종교(religio catholica)’의 진정한 순교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포스트 트루스와 탈종교화 시대를 다시 새롭게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찾느라고 인류가 고통하고 있는데, 도산의 참의 정신은 좋은 길라잡이가 된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겉모습은 아주 적게 종교적이지만 내면은 풍성하게 영적인’ 참된 ‘진교(眞敎)’로서의 흥사단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17)

미주

(1) 島山 안창호, 『나의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 안병욱 엮음, 지성문화사, 2016, 296쪽.

(2) 최근의 도산 사상 연구는 선생의 이와 같은 삶과 사고가 후대에 특히 이광수 등에 의해서 많이 굴절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선생의 점진주의는 결코 간디 등의 평화 절대주의가 아니고, 단순한 준비론자, 민족개량주의자나 좁은 의미의 교육사상가의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평생 “한국혁명”의 사업에 종사한 사람이었고, “독립전쟁”을 준비하였으며, 그래서 “민족혁명의 영수”로서 그의 점진주의는 “점진혁명론”이라는 것이다. 선생 사고의 혁명성과 급진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강경석, “도산의 점진혁명론과 그 현재성”, 백영서 엮음, 『개벽의 사상사』, 창비 2202, 171-194.

(3) 같은 책, 201쪽.

(4) http://www.ahnchangho.or.kr/site/main/b02_01.php; 유한준, 『안창호 리더십』 , 북스타, 2013.

(5) 신용하, 『민족독립혁명가 도산 안창호 평전』, 지식산업사 2021, 18~19쪽, 강경석, 같은 글, 183쪽 재인용.

(6) 안병욱, 안창호, 김구, 이광수 외, 『안창호 평전』 , 도서출판 청포도, 22, 222~223쪽.

(7) 박재순, 『도산철학과 씨알철학』, 동연 2021, 451쪽 이하.

(8) 함석헌, 「남강(南崗)·도산(島山)·고당(古堂) 1959」, 노명식, 『함석헌 다시 읽기』, 책과함께 2011, 248, 254쪽.

(9) 島山 안창호, 『나의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 212쪽.

(10) 안병욱, 안창호, 김구, 이광수 외, 『안창호 평전』 , 285쪽.

(11) 같은 책, 325~326쪽.

(12) 같은 책, 234쪽.

(13) 같은 책, 325~326쪽.

(14) 이은선, “인(仁)의 사도 함석헌의 삶과 사상”,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16, 203~229쪽.

(15) 강경석, 같은 글, 181쪽.

(16) 이규성, 『중국현대철학사론』,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20, 672~673쪽.

(17) 이은선,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한국 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09, 22쪽 이하.

이은선(세종대 명예교수, 한국信연구소장)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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