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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당신을무엇이 중요한지…(요한복음 8:1~11)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2.07.12 23:38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 이야기는 깊은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성서에 포함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서를 보면 이 본문에 괄호가 쳐 있고 오래된 사본들에 이 본문이 없다는 난외주가 덧붙여져 있습니다. 본문말씀이 후대에 첨가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대개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간주되는 본문들은 후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데 반해 이 본문은 정반대의 경우입니다. 이 본문은 이야기의 형태나 이야기가 묘사하고 있는 예수님 언행의 특징으로 볼 때, 오래된 전승에 해당합니다. 특히 누가복음의 어투와 많이 닮아 있고, 그래서 어떤 사본에는 누가복음 21:38 다음에 수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 본문이 후대에야 성서에 포함된 까닭이 무엇일까요? 초기 교회가 예수님의 이 언행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뿐만 아니라 초기 교회에서도 간음은 중대한 범죄로 여겨졌는데, 이를 당대의 통념에 따라 해결하지 않은 예수님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래된 전승을 간과할 수 없어 나름 그 의미를 새기며 성서에 뒤늦게나마 포함시킨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은 후대에 기록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치가 더 높아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공생애 가운데 예수께서 보여 주신 언행을 아주 압축적으로 전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내내 예수님을 괴롭혔던 적대자들과의 논쟁 상황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적대자와의 논쟁 상황을 전하는 본문을 대할 때 우리는 항상 두 가지 문제를 유의해야 합니다. 첫 번째 논쟁을 유발하는 적대자의 속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 속셈에 휘말리지 않고 적절하게 대처함과 동시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씀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주목하는 것입니다. 무모한 논쟁의 상황을 벗어나면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전하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파악하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올리브 산에 올라가셨다가 다음 날 아침 다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 와서 이 여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고 묻는 데서 시작됩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일을 놓고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정중한 격식을 갖추고 있지만, 이들에게는 저의가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지금 곤경에 처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인의 처지나 그 목숨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은 체제의 정당성을 옹호하고자 하는 동기와 그 체제의 덫에 예수님을 걸려 넘어지게 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을 뿐입니다.

유대인에게 모세의 율법이 그렇게 명하고 있다면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자명한 것이었습니다. 굳이 물어 봐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물었을 때에는,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이 자명하게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상황이 무엇이었을까요? 본문의 상황 곧 예수님 당시의 상황은 단순한 ‘유대인 사회’가 아니라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 유대인 사회’입니다. 그 상황에서 이 물음은 이중의 덫을 의미합니다. 율법에 따라 ‘그 간음한 여인을 돌로 처형해야 한다.’고 하면 당시 로마당국이 행사하는 사법권을 침해하는 결과를 빚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곧 로마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로 곧바로 고발대상이 됩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 모세의 율법을 부정하는 결과를 빚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유대의 전통과 권위를 거부하는 자가 되어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덫을 놓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좋은 결론은 예수님으로부터 그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는 답변을 들음으로써,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율법의 정당성을 지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를 로마체제에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들은 정의를 이룬다는 명분 뒤에 감춰진 체제수호의 의지와 그 체제에 반하는 이에 대한 집단적 폭력의 야욕을 채울 수 있기를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상황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립니다. 예수께서는 땅에 뭔가를 씁니다. 예수께서 흥분한 군중들의 격앙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기지를 발휘하는 동시에 이를 통하여 뭔가 상징적 의미를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떠나간 사람은 “땅바닥에 쓴 이름처럼 지워지고 맙니다.”(예레 17:13) 그 말씀의 의미를 연상시킵니다. 그 다음 답합니다. “너희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율법을 용인하지만, 단서를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또 뭔가 땅바닥에 씁니다.

사태는 급반전됩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들로부터 시작하여 다 떠나고 마침내 예수님과 여인만 남습니다. <새번역> 성서에는 빠져 있지만, 원문에는 그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떠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이 공격자들의 성찰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의 불순한 저의를 무력화시켰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의 말씀이 상황 자체의 부당함을 드러내고 그 부당한 상황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웠다는 이야기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간음한 여인을 고발한 사태는 불공평한 가부장적 위계질서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율법에 따르면 간음의 범죄는 그 당사자 모두 처벌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여자만 처벌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성불평등의 상황입니다. 예수의 말씀은, 우선 그것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며, 나아가 그 공정하지 못한 사태에 대한 책임에서 고발자들 역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일깨웁니다.

간음이라는 범죄행위보다 더 심각한 범죄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 곧 구조적 차별의 문제를 일깨운 것입니다. 그 부당한 구조적 차별이 존재하는 한, 일탈행위를 벌인 한 당사자에게 죄를 모두 뒤집어 씌어 그를 제거하고 나면 사회적 안전이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운 것입니다. 그렇게 한 여자에게 책임을 물어 배제하는 일이 반복될 뿐 다수의 사람들이 연루된 구조적 차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Pieter Bruegel the Elder, 「Christ and the Woman Taken in Adultery」 (1565) ⓒWikiwand

놀랍게도 고발자들은 자신들의 허위의식의 정곡을 찌른 예수의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 자리를 떠났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으로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안온함이 항상 그 누군가를 배척함으로써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죄의 덫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진실을 깨우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상식에 대해 성찰의 여지를 줌으로써 한 여인의 생명을 구하고, 그 여인을 죽이는 집단적인 폭력에 동참하게 되었을 사람들을 폭력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여인과 단 둘이 남게 된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 그리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이 마지막 말씀으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정한 간음죄 자체가 무용하다고 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인간관계를 왜곡시킬 수 있는 행위는 죄로 간주한 셈입니다. 하지만 통상적인 해법과는 전혀 다른 해법을 제시함으로써 예수께서는 진정으로 사람을 살리는 길이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서 각자가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 근본적 해법을 찾도록 일깨워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이 함축하는 복음의 진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별적인 범죄 행위 그 자체, 또는 그 당사자에게만 주목하기보다는 죄에 연루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현실과 그 현실에 매여 있으면서도 그 진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문제시하며, 그 진실을 직시하는 가운데 누구나 바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나서도록 촉구하는 데 본문말씀의 참 뜻이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정죄하고 심판함으로써 세상을 바르게 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누구도 예외 없이 죄에 연루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며 정의로운 세계를 이루라고 일깨우십니다.

“너를 정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여인과 나눈 이 대화가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의 핵심입니다. 사람을 정죄하는 체제를 부정하고, 사람을 온전하게 일으켜 세우신 사건, 그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성서에 포함되지 못한 본문말씀이 뒤늦게 포함된 것은 교회가 비로소 그 진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실 교회의 허위의식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사실 성애혐오(erotophobia) 성향을 유독 강하게 드러내 왔습니다. 성생활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죄와 연루될 가능성에 과도하게 집착해온 편입니다. 아가서와 같은 놀라운 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록 또는 신학적으로 재해석된 의미로만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바알종교로 대표되는 고대 풍요종교와 겨루는 가운데 형성된 데다가 그리스도교 시대에 금욕주의가 결합한 결과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는 그런 이야기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본문말씀처럼 성적 위계질서의 부당함을 드러내는 언행은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 반면 서신서에서 등장하는 바와 같은 성생활에 관한 언급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었는지 간접적으로 드러내 줍니다. 사람들이 성과 관련된 이슈에 매달려 보다 근본적인 사회 문제를 잊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훨씬 시급하고도 근본적인 불의와 차별, 배제의 문제를 더 심각하게 여겼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의 삶을 규정하고 망가뜨리는 더 근본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개별적인 현상을 두고 왈가왈부 목숨 내걸고 다툴 때, 인간 삶의 현실을 규정짓는 근원을 돌아보고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심한 것입니다. 본문말씀이 그 전형적인 경우에 해당합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모든 사람이 차별을 겪지 않고 안전하고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규범적 법률로서 차별금지법이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 때문에 성서에 어긋난다고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태를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성적지향에 관한 현대적 개념이 형성되기 이전에 특정한 성행위를 문제시하는 단 네 구절(레위 18:22; 20:13; 로마 1:26~27; 고전 6:9)을 들어 금과옥조로 여기는 태도가 과연 정당할까요?

다른 각종 금기는 편한대로 해석하면서도 유독 그 구절들의 문자적 진술에 집착하는 태도는 성서의 대의를 놓치는 것입니다. 각종 음식에 관한 규정은 말할 것도 없고, 장애인의 사제직 금지라든지 노예제에 대한 용인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특정한 주장을 내세움으로써 더 시급하고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는 것은 결코 복음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너를 정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요한 8:10~11) 예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이 정한 기준을 따라 심판한다.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8:15)

신앙을 추구하면서 강박관념에 시달린다면 과연 바른 신앙을 갖고 있는지 스스로 의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데 그 뜻이 있습니다. 그 진실을 믿고 성숙한 신앙을 키워나감으로써 삶의 기쁨을 누리며, 세상을 변화시켜나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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