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 공의롭고 성실한 공동체(욥 27:1-13; 살후 3:6-13; 마 17:24-27)성령강림 후 여섯째 주일(7월17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2.07.14 23:55

1. 부드러운 악

독일의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특별한 악’, 곧 흉측하고 그로테스크한 악입니다. 종교가 상상했던 대부분의 악이 바로 이러한 특별한 악입니다. 가령 중세 시대에 사탄이라고 명명했던 이 악은 15~16세기 독일의 위대한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는 흉악한 용으로 그렸고, 같은 시대 네덜란드 르네상스의 거장 화가인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징그러운 곤충 떼들로 그렸습니다. 파리 대왕이죠? 바알세불입니다.

▲ 알브레히트 뒤러, <요한계시록: 일곱 머리 가진 괴물과 뿔난 짐승>(1498~1511)과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1490~1500)

또 다른 악은 현대의 악인, ‘평범한 악’입니다. 아렌트에 의하면 이 현대의 악은 전혀 특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도 평범해서 충격을 받습니다. 가령 아우슈비츠에서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의 얼굴처럼 범속하며 일상적인 악인 것입니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평범한 악의 원인을 ‘생각 없음’에서 보았습니다. 이러한 무사유로 진행되는 악의 평범성을 아렌트는 도덕이 상실된 현대사회의 징표로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악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악 개념일까요? 철학아카데미의 대표였던 故 김진영 교수는 악이 더 진보해서 ‘흉측한 악’에서 ‘평범한 악’을 넘어, 새로운 악의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부드러운 악’입니다. 김진영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의 악은 더 이상 평범한 악이 아니다. 선과 악의 경계를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거나 도덕적 양심을 외면하는 그런 의지적인 악이 아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암묵적으로 지배하는 악은 선악의 경계가 지워진 악, 양심 자체가 이익을 따라서 선과 악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부드러운 악이다.”

가령, 여성에 대한 사랑과 폭력 사이를 부드럽게 넘나드는 남자들, 돈과 복음 사이를 유연하게 건너다니는 자본주의 사제들, 약자들을 가엾어 하면서도 내 동네로 들어오는 혐오시설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려는 사이비 시민들, 공적 권력과 사적 축재 사이를 넘나들었던 전임 대통령 등등의 사례들이 이 시대의 새로운 악, 유연하고 더러운 악의 전형적인 얼굴이라는 것입니다. 김진영 교수의 말을 조금 더 들어 볼까요? 

“그건 평범한 악과 도덕적 양심을 넘어서는 새로운 악, 즉 부드러운 악이었다. 예컨대 수용소에서 근무한 나치 무장 친위대(SS)들은 비합리적인 악인들이 아니라 선과 악의 경계를 잘 아는 합리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너무도 합리적이어서 아렌트의 평범한 악에서는 구분되어야 했던 합리성-비합리성, 선-악의 경계선도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넘나들 수 있었다. 모순과 갈등들은 양심의 갈등을 일으키는 대신에 그들의 내면에서 흐르는 물처럼 부드럽게 용해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온화하고 부드러운 남편과 아버지로 돌아갈 수 있었다. 심지어 수용소장인 회스는 옥중 회고록의 말미에서 너무 공무에 열중한 나머지 가족을 등한시했던 일이 가장 한스럽다고 고백할 수 있었다.”

사실 아렌트의 악담론 뒤에는 서구의 도덕 철학적 전통이 있었습니다. 칸트와 소크라테스의 도덕론입니다. 계몽주의자인 칸트에게 근대적 인간은 모두가 도덕적 주체였습니다. 계몽된 근대인은 보편 이성에 따라서 옳고 그름을 구분하고 행동하는 도덕적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히만은 칸트의 보편주의를 앞세워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었습니다. 그에게 나치의 가치관은 절대 보편적 가치였고 그래서 그는 그 보편주의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이스라엘 법정이 새로운 보편 가치를 준거로 내세우며 아이히만에게 죄를 묻는다면 그것은 보편주의에 어긋나는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이히만의 주장에 맞서서 아렌트는 새로운 도덕론을 제시합니다. 바로 소크라테스의 도덕론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도덕적 행위의 준거를 ‘보편 이성’이 아니라 ‘양심’이라는 개별적인 감수성에서 찾았습니다. 부당한 악행들 앞에서 인간을 행동하게 하는 건 보편 이성이 아니라, 선한 양심이 순간적으로 발현되는 ‘도덕적 감수성(moral sensibility)’이라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칸트가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손을 들어주면) 보편주의를 앞세워 자신의 무죄성을 주장하는 아이히만의 주장은 거짓이 됩니다. 왜냐하면 비록 보편적 체제 안에 있었지만, 그 체제성을 초과하며 언명하는 도덕적 감수성의 목소리를 아이히만은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기만했기 때문입니다.

김진영 교수에 의하면, 사실 아렌트도 악이 진보한다는 걸 알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종교적 악을 평범한 악으로 대체했고 그 평범한 악을 다시 소크라테스의 양심 도덕론으로 방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유대교 적인, 소크라테스의 양심론이 간파하지 못했던 또 다른 악이 그때 이미 배태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부드러운 악이 교회에, 사회에, 학교에 가득 차 있습니다. 거룩한 모습으로 악을 행하는 이들이 바로 그 악의 수행자들입니다. 따라서 현재, 여전히 상식처럼 회자되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은 부드러운 악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악의 개념을 수정하여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공의롭고 성실한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 공동체가 부드러운 악을 이겨내고 선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임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먼저 구약 성서는 공의로움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서신서 말씀은 성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성실함의 구체적인 예가 복음서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오늘은 구약 말씀부터 먼저 볼까요? 욥기 말씀입니다.

2.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사실 욥기는 의인의 고난에 관한 말씀입니다. 욥처럼 의롭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엄청난 고난과 재난에 직면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욥의 고난에 관해, 욥을 위로하고자 했던 세 친구는 오히려 욥의 잘못을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고난과 재난의 원인을 욥에게서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욥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욥과 세 친구의 변론은 4장에서 시작하여 26장에서 끝이 납니다. 따라서 욥기의 핵심은 욥의 변론 내용에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인 27장은 세 친구 모두에 대한 욥의 변론인데, 그들의 이야기가 욥에게는 결코 올바른 권면이 아닌 허탄한 것임을 지적하고 욥은 자신의 순전함을 주장합니다. 이것이 욥기의 핵심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욥이 또 풍자하여 이르되,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의 호흡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숨결이 아직도 내 코에 있느니라.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 나의 원수는 악인 같이 되고 일어나, 나를 치는 자는 불의한 자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욥 27:1-7)

이렇게 욥은 당당합니다. 불의하지 않았고,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공의롭게 행했으며 자신의 생애를 긍정합니다. 그렇습니다. 욥은 공의로웠습니다. 따라서 욥은 자신이 아니라, 불경건하고 불의한 악인 원수가 심판받기를 소망합니다.

“불경건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거두실 때에는 무슨 희망이 있으랴? 환난이 그에게 닥칠 때에 하나님이 어찌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항상 하나님께 부르짖겠느냐? 하나님의 솜씨를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전능자에게 있는 것을 내가 숨기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다 이것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그토록 무익한 사람이 되었는고, 악인이 하나님께 얻을 분깃, 포악자가 전능자에게서 받을 산업은 이것이라.”(욥 27:8-13)

지금 부드러운 악이 잘되는 듯이 보입니다. 그리고 의인은 고난을 받고 재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악은 결코 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욥은 그것을 알았기에 궁극적으로 두 배의 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도 서신서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 3:13)”

3.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두 번째는 성실입니다. 오늘 서신서 말씀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잘못된 종말론으로 일하지 않는 자들에게 종말의 때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실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살후 3:6-9)

바울과 그의 일행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성실의 본을 보였듯이, 성도들도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질서한 것이 아닙니다. 값없이 먹지 않고 성실히 일함으로 폐를 끼치지 않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 3:10-12)

그렇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종말론을 들먹이며 일은 하지 않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부드러운 악입니다. 경건한 척, 거룩한 척하지만 결국은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자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종말은 곧 올 것이지만, 지금 자기 삶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라고 권면합니다. 성령께서 세우신 제대로 된 교회는 이렇게 매일 매일의 성실함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이 생깁니다. 부드러운 악, 아니 평범을 넘어 특별한 악이 지배하고 문제를 만들고 일을 만들면 어떻게 하는가입니다. 그냥 성실히 자기 사명만 감당하면 되는 것일까요? 따라서 오늘 복음서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그 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실함의 구체적인 예입니다.

4. 부드러운 선, 성전세 납부!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마 17:24-27)

▲ 마사초 <성전세>(1425), 중앙에 있는 예수님께서 파란색 옷을 입은 베드로에게 왼쪽 바닷가에서 물고기 입속 세겔을 오른쪽 세리에게 주라고 하는 모습

세금징수원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세금 문제를 거론합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세는 ‘반 세겔’입니다. 세겔은 은으로 만든 것인데, 한 세겔이 4데나리온이니, 반 세겔은 2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 했으니, 반 세겔은 2일 치 품삯이 됩니다. 우리 돈으로 대략 20-30만 원 정도가 됩니다.

베드로는 지난주처럼 또 생각 없이 예수님께서 내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를 다 아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을 합니다. 임금의 아들들은 세를 면하겠지만, 징수원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세금을 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세금은 낚시로 잡은 물고기 입속에서 나옵니다. 사실 성전세는 20세 이상 이스라엘 남자는 누구나 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출 30:13-14). 그것은 각자의 거주지에서 거둔 것으로 속전의 개념입니다. 출애굽기 말씀을 보면, 본래 성전세는 속전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리라.”(출 30:15-16)

이렇게 속전은 하나님께서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구하여 주심에 대한 감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셨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임금의 아들은 세금을 내야 하는지 내지 않아도 되는지 질문하셨죠? 예수님께선 속전인 성전 세에 구속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전 세가 성전을 위해 사용되는 세금이니, 성전이신 예수님께서는 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세금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듯이, 성전 세를 내신 이유는 사람들이 넘어지지 않기 위함입니다. 세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리들과 맞서게 되면 본질을 놓치고 엉뚱한 곳에서 논쟁이 일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지불하시되, 그것을 넘어섭니다. 세상의 요구에 맞춰주되, 세상의 질서에는 순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금을 내시되, 재정을 맡은 가룟 유다에게 받아 내시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 입속에 있는 세겔로 냅니다. 절묘하죠? 세상에 속하되, 세상을 넘어서는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앞서 부드러운 악을 말씀드렸는데, 이것은 부드러운 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는 공의를 행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또한 성실하여 매사에 하나님께 충성하는 이들이 함께하는 교회입니다. 결국 세상에 속하되, 세상을 넘어서는 것, 땅에 발을 딛고 있으나 머리는 하늘을 향하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