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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세우신 교회,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 영생을 취하는 공동체(전 9:1-6; 딤전 6:11-16; 마 18:1-9)성령강림 후 일곱째 주일(7월24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2.07.22 02:37

1.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두 역사가가 있습니다. 역사가의 아버지인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가 바로 그들입니다. 헤로도토스의 작품인 『역사』는 그 당시 그리스와 주변 나라들의 역사와 풍습을 소개하고 있고,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그리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긴 후, 도시국가(폴리스) 내분으로 스파르타와 신흥강국 아테네의 싸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흥강국이 부상하여 기존 패권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을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고 합니다.

▲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아무튼 이 두 역사책은 호메로스의 대서사시인, 아킬레우스가 주인공인 『일리아드』와 오디세우스가 주인공인 『오디세이』를 역사의 일부로 생각하고, 그 교훈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이 서사시를 금서로 단속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플라톤 철학의 입장에서, 본질(이데아)이 아닌 허망한 것(그림자)을 노래하는 이들을 추방하자는 ‘시인 추방론’의 맥락이기도 합니다만, 단속의 대표적인 이유는 『오디세이』에 나오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 때문입니다.

▲ 악기를 들고 있는 아킬레우스와 붉은 망토의 오디세우스, 트로이 전쟁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내용을 한번 살펴볼까요? 『오디세이』 11권에 보면, 마녀 키르케의 권유로 저승에 간 오디세우스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뿐 아니라, 트로이 전쟁 중 죽은 옛 전우를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망령 가운데 아킬레우스의 망령도 있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의 망령에게 “죽어서도 위대한 왕자처럼 늠름해 보인다.”라고 말하자, 아킬레우스는 이렇게 답합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 왕 중의 왕이 되느니, 차라리 땅 위 어느 가난한 집의 새경 받는 하인이 되겠네.”라고 말합니다.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말이 있죠? 바로 그 말입니다.

아무튼 소크라테스가 생각하기에, 아킬레우스의 이러한 말은, 국방의 의무를 짊어질 미래의 전사들이 알면, 죽음을 두려워할 수 있으니,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죽음은 육체의 병을 치료하는 치료제라고 생각했던 소크라테스(플라톤)는 내세(혹은 이데아)보다 이생을 더 중요시하는 호메로스의 이러한 생각을 삶의 본질, 생의 목적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들과 또 비슷한 다른 구절들을 삭제하게 되면 호메로스를 비롯한 시인들께 화내지 마시라고 간청해야 한다네. 그 구절들이 시적이지 않거나, 대중의 귀에 매력적으로 들리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시적인 매력이 더할수록, 자유로워야 할, 그리고 죽음보다도 예속을 더 두려워해야 할 소년들과 남성들의 귀에는 더욱 적절치 못하기 때문이지.”

소크라테스는, 전사들은 죽음보다도 예속, 곧 노예가 되는 것을 더 걱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살아서 아테네 심판관들의 불의한 예속을 받는 것보다, 독배를 마시고 죽음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당시 아테네 사람들은 호메로스를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호메로스는 미신이고 악습입니다. 왜냐하면 호메로스는 죽음을 저승(하데스)에서 하얀 숨결이 된 채로 존재하는 영원한 어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여정이라고 하며 죽음을 앞두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로합니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죄명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며 신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배를 마시게 된 것입니다.

▲ 자크 루이 다비스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

그러나 철학자들의 이러한 “저승이 천국”이라는 개념보다, 호메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아킬레우스의 말대로, 정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을까요? 놀라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오늘 전도서 말씀이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말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산 자들에게 소망이 있음을 강조하며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2.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 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전 9:1-2a)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 안에 놓여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미래를 알 수 없지만, 그 인생의 결국은 똑같다는 말입니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구별 없이 똑같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땅이 내는 소산으로 살고 죽습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전 9:2b-3)
 
우리의 인생은 평생 동안 미친 마음을 품고 살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의인이나 악인, 선인이나 죄인 할 것 없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해 아래 행하는 모든 일은 죽은 자들에게는 상관없으니,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렇게 잠언은 노골적으로 산 자와 죽은 자를 대조하고, 또 산자의 삶 또한 부정합니다.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전 9:4-6)

물론, 전도서 말씀 전체의 주제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이뤄지는 인간의 삶을 소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에 대한 만족과 기쁨의 중요성, 그리고 지혜가 지닌 귀중한 가치에 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어떻게 보면 허무주의로 보이지만, 오히려 현실 긍정입니다. 앞서 철학자 이야기를 했지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도 저승에서 복을 받기 위해, 또한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 이승에서 ‘지혜를 사랑(철학)’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똥 밭을 꽃밭으로 만들기 위해 저승의 심판을 소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승에서의 삶이 중요하지, “저승 천국”만 바라보고, 이 땅에서 지혜로운 삶을 살지 못하고, 비도덕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악인들의 심판을 위해 “저승 심판”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전도서의 역사 이해는 기존의 그리스도교 역사 이해와 좀 다릅니다.

사실 그리스도교의 역사 이해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성서 대부분의 역사 이해이자, 바울의 역사 이해로 ‘직선적인 역사관’이 그 첫째이고, 오늘 전도서에 나오는 ‘윤회적 역사관’이 그 두 번째입니다. 직선적인 역사관은 ‘과거-현재-미래’의 순서로 역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뒤에 있는 것과 앞에 있는 것으로 구분하죠?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그리고 역사의 끝에는 부르신 부름의 상이 있습니다. 종말이 있고, 그때 심판과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합니다. 뒤에 있는 것이 또 앞에 있다고 합니다. 말씀을 찾아볼까요?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전 1:9-10).”

쉽게 말해 윤회입니다. 불교의 윤회가 이승-저승의 윤회를 말하지만, 전도서의 윤회는 사건과 사건의 집합인 역사의 윤회입니다. 철학자 니체의 ‘영겁회귀’와 비슷합니다. 삶은 영원히 반복된다는 뜻이죠? 이렇게 영원히 반복되는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해 오늘 하루를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카르페 디엠(carpe diem, ‘이날을 붙잡아라’, 곧 ‘현재를 즐겨라’는 뜻)이고,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성경 말씀의 대부분은 직선적인 역사관으로 역사를 보지만, 전도서와 같이, 비록 비주류이지만 윤회적인 역사관도 있습니다. 사실 직선적인 역사관으로 살면 간단합니다. 분명한 목표가 있고, 종말이 명확하기에 애매하거나 모호한 것이 없습니다. 선과 악도 명확하게 판단이 됩니다. 따라서 직선적인 역사관은 인간을 전투적으로, 투쟁적으로 만들죠? 이단들은 이러한 직선적 역사관의 극단에 처해있기 때문에 그렇게 맹목적이고 열광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균형 있게 또 다른 역사관을 소개합니다. 전도서 말씀에 나오는 윤회적 역사관을 통해 지금, 현재의 삶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반복되는 인생, 곧 윤회적 삶 속에서 지치지 않고 버텨나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전도서를 잘못 읽으면 정말 헛된 시간 낭비가 됩니다. 앞서 니체 이야기를 했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오늘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내 인생을 엉망으로 살았다면, 그 엉망인 삶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고, 오늘 내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carpe diem, Amor fati), 그 삶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이렇게 전도서는 윤회적인 역사관을 소개하지만,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역사 이해는 직선적인 역사관입니다. 마태복음과 요한계시록이 그렇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그렇습니다. 오늘 서신서 말씀이 바울의 생각을 잘 보여줍니다. 말씀을 볼까요?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목회에 있어서 경건과 자족하는 마음을 지닐 것을 권고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신앙 교육의 지침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며 주어진 삶에서 최선을 다하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되, 영생을 취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영생은 무엇일까요? 죽어 천국 가서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인가요? 아니면 지금 이 순간, 영생의 삶을 누리는 것인가요? 둘 다입니다.

첫 번째 영생을 위해 바울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이, 책망받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죽어 천국 가서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해 오늘 이 순간 흠도 없이 책망 받을 것 없이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과 구원의 주로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재림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종말을 이룰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 6:13-16) 

4.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그렇다면 두 번째 영생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복음서 말씀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 관해 묻는 물음입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1-4)

예수님께서 천국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천국은 들어가는 것이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심판을 받기도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맥락에서 어린아이의 특성에 초점을 맞추면, 바로 겸손입니다. 또한 남을 넘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신체적으로 사회적으로 남을 넘어지게 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따라서 어린아이의 삶의 조건은 겸손, 곧 낮아짐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말씀을 볼까요?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 18:5-7) 

이렇게 자신은 넘어지기는 쉬우나, 남을 넘어지게 할 수 없는 연약한 어린아이 같은 이들을 실족하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천국은 지금 이 땅에서의 삶과 연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삶은 소크라테스의 지혜 사랑(철학)과 도덕적인 삶보다 더 엄중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8-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매일 매일 반복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무한한 허무의 반복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이러한 허무한 세상에서 그저 덧없이, 의미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통해 아름답게 선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한의 반복은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는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복음서 말씀처럼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 역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합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는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 현재의 영생과 다가올 미래의 영생을 취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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