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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움을 제거하는 거룩함하나님의 자비와 신비 속에서 미래를(레 19,1-4; 롬 11,25-33)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2.08.24 22:32
▲ Eiko Ojala, 「What would Jesus do?」 ⓒTheGuardian

올여름 전세계는 많은 사람들이 경고해왔던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몸으로 깨닫고 있는 중입니다. 홍수, 폭염, 가뭄 등은 언제나 재난의 한 형태였지만 갈수록 커지는 그 위력은 이제 사람이 감내하기 어려운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치산치수라는 옛말이 의미하는 것과 같은 인간의 자연 통제력은 그 재난들 앞에서 너무나 작은 것임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기후위기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크게 달라질 조짐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기후위기와 재난이 얼마나 더 심각해져야 각성되고 바뀔까요?

혹시라도 지구가 더이상 사람 살 수 없는 곳이 되기 전에 다른 별에서 살 길을 찾자고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주 디아스포라가 꿈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한편 기후위기 속에서도 우리는 여름이 지나고 있음을 느낍니다. 큰 틀에서나마 자연의 질서가 아직 작동되고 있다면, 그동안 우리에게 기회가 있는 것 아닌가요?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삶의 양식을 바꿀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만신창이가 되고 기진맥진한 지구에게 숨돌릴 틈을 주고 회복의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그러한 방향으로 진행되기를 빕니다.

바울은 이스라엘과 이방의 관계에 주목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대합니다. 이방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구원과 무관하지 않음을 그는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버림받고 곳곳으로 흩어진 상태에 있습니다.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이방 기독교인들은 그들 앞에서 우쭐대고 그들을 무시하고 그들을 배척합니다. 그들의 선민의식 때문에 더욱더 그럴 수 있습니다.

로마서 앞부분에서는 유대인들에 맞서 이방기독교인들을 위해 싸웠던 바울이 여기서는 이방 기독교인들 앞에서 이스라엘을 옹호하며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약속을 상기시킵니다.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이같은 하나님 이해에는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에게 올 수 있는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베풀어지는 동인이 되었음을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아닌 자들이 하나님의 자비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현재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처럼’ 된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자비가 베풀어질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지혜와 신비를 봅니다. 이럴 수 있으면 타자를 향한 비난과 무시와 조롱 대신 감사와 존중과 인정이 들어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일찌기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계획하셨던 것이기도 합니다. 이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복이 되고 땅의 모든 부족/민족들이 아브라함 ‘때문에’ 복을 받습니다. 그 계획은 전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방세계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대하게 합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방세계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세계가 한 세계이고 사람은 한 민족입니다. 눈에 보이는 차이들 때문에 이를 보기 어렵다 해도 하나님은 모든 차이를 넘어서는 하나님이고 모두의 창조주입니다. 이에 바탕하여 하나님의 자비와 신비를 느끼고 깨닫기를 빕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다면 재난을 가져온 기후변화에 대해서도 다른 접근이 가능해지 않을까요? 남의 불행 앞에서 내 이익이 작아질까 걱정하고 내 이익을 위해 기후파괴행동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생존을 위해 그리고 지구의 존속을 위해 나/우리만의 이익추구를 중단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 땅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를 뱉어낼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역겨운 일들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역겨운 일들이란 근친상간에 해당되는 행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하고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모든 행태들이 거기에 포함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그에 따른 다양한 지침들 때문입니다.

더럽다와 거룩하다는 상호배타적입니다. 그런데 더러움은 거룩함을 훼손시키고, 거룩함을 훼손시키는 것들은 모두 더러움의 범주에 속하지만, 거룩함이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더러움은 다른 무엇에 의해 제거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러한 비대칭성이 거룩함과 더러움의 중요한 특성입니다.

땅이 사람때문에 더러워질 수 있다는 인식은 땅에 대한 사람의 책임을 함축합니다. 땅과 사람은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땅이 사람을 그의 삶과 상관없이 언제까지나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땅은 사람을 거부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기후위기도 사람이 정복과 개발의 이름으로 땅과 자연을 ‘더럽게’ 만든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행태를 멈추고 공존과 보존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람에게 거룩하라 하시며 요구하시는 첫번째 내용은 우리에겐 낯익은 것들입니다. 부모를 공경할 것, 안식일을 지킬 것. 우상제조와 숭배를 금할 것 등입니다. 부모 공경은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이고, 안식일은 사람과 땅과 가축에게 쉼을 주고 우상제조와 숭배 금지는 창조주를 섬기고 탐심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된 계명들에 비춰 거룩하다는 것을 이해하면 거룩하다는 것은 현재 기후위기 상황에서도 상당한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성서에서 땅은 하나님의 것으로 사람은 빌려쓰는 사람저럼 이용권만 갖고 있습니다. 이를 함께 고려하면 이 계명들은 좀더 깊은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사람은 땅을 자기 소유로 알고 땅을 약탈식으로 사용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자기처럼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배와 종속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모두 탐심때문입니다. 그 결과 사람은 ‘거룩할’ 수 없었고 땅을 더럽히고 땅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습니다. 쫓겨나 갈 곳이라곤 우주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는 사람이 살 곳으로 주어진 곳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그 위기는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고도화된 시대에 거룩하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말하기는 더욱 더 힘들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고도로 발전된 문명은 고도로 집적된 지구의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기술로 그 위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삶의 양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하라는 요구는 더이상 낡은 것이 아닙니다. 땅을 더럽히지 않고 사는 방식입니다. 땅과 자연을 더이상 신음하지 않게 하고 땅 위에서 땅과 공존하며 미래를 공유하는 길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신비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고 깨닫고 감사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거룩한’ 생활이 우리에게 남은 가능성입니다. 
‘거룩한’ 생활로 기후위기 극복의 실마리를 만들어갑시다.
‘거룩한’ 생활로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계와 미래를 열어줍시다.
‘거룩한’ 생활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그 삶을 기쁨과 행복과 희망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그 생활이 우리의 생활이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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