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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고 따릅니까?어떤 신앙을 고백하는가?(수 24:14-18)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10.16 05:36
▲ Raphael, 「Joshua Addressing the Israelites at Shechem」 (1518) ⓒWikipedia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16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17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18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들어가는 말

오늘은 창조절 일곱째 주일입니다. 그리고 저희 교회는 이번 주일을 추수감사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본래 추수감사절은 미국의 전통을 따라 11월 셋째 주일에 지켜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지 않기 때문에 추수감사주일을 앞당겨서 지내는 교회들도 늘고 있습니다. 저희도 그런 교회 중 하나입니다.

추수감사절은 말 그대로 수확의 기쁨을 나누며, 이를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하지만 도시 교회에서 수확의 감사를 드리는 일은 어쩌면 무의미해 보이기도 합니다. 한 해 풍년이 들어 많은 수확이 이루어졌다면 이는 함께 감사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도시에 살고 있는 소비자들에게 풍작과 흉작은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 해 풍작이었다 해도 우리나라 특유의 유통 시장에 의해 소비자인 우리가 지불할 금액이 줄어들진 않습니다. 최근의 배추 사태와 같이 흉작일 때는 가격이 크게 상승하거나 구매 자체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길 바랄 수 있겠지만, 도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한 해의 풍작과 흉작은 큰 관심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도시 교회들에서는 추수감사절이 한 해의 소득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절기가 된 듯 합니다. 그런데 월급을 받는 우리들은 이미 매달 마치는 십일조와 월정헌금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월급은 하나님께 큰 감사를 드릴 정도로 매해 상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소득이 줄어든 분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감사절기를 보내야 할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추수감사절이기 때문에 소득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만 있으면 되는 것인지, 우리는 교회에서 행해지는 기념 절기들을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신앙의 고백과 다짐

여호수아 24장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신 내용과 이제 하나님만을 섬기자는 언약이 나타나 있습니다. 2-13절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타나고, 14절 이후에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여호수아 24장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이 전승이 얼마나 오래된 전승인지, 내용적인 면에서 다른 성경과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 이 전승이 성경의 어떤 본문을 기반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 저희가 생각하려는 점은 이 본문이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고백이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다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가나안 정복을 마친 후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들을 모읍니다. 23장을 보면 여호수아가 나이가 들어 죽을 때가 되었고, 유언을 남기는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사건도 유언의 일부처럼 보게 되지만, 실제로 24장의 내용은 유언의 일부라기보다는 지파분배 직후, 혹은 8장에 나타난 에발산 제단을 쌓던 때와 연결되는 내용일 것입니다.

요즘 같이 교통 인프라가 구축된 시대도 아니고, 휴대폰으로 연락을 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기 때문에 죽음을 앞둔 사람이 각 지역에 전령을 보내 사람들을 불러서 유언을 남긴다는 상황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여호수아서의 마지막을 신앙의 다짐으로 마무리하려던 편집자의 의도로 오늘 본문의 내용이 맨 뒤에 놓이게 된 것 같습니다.

2-13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음성은 이스라엘 백성이 고백하는 하나님입니다. 자신들이 왜 하나님을 믿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조상을 이 땅에 이끄셨고, 한때 애굽으로 가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애굽 땅에서 자신들을 이끄셨습니다. 또 애굽의 군대를 물리치셨고, 요단 동편과 서편을 모두 점령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고백에는 애굽에서의 노역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애굽에서 이끌어주셨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그곳에서 노역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신명기 26장 5-9절에 나타난 신앙고백과는 또다른 고백이 됩니다. 신명기 26장에 나타난 고백의 핵심은 애굽에서의 고통으로부터 해방하신 하나님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처음 선포되었던 시기, 여호수아의 시대를 생각한다면, 오늘 본문의 신앙고백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실제로 몇 년의 시간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세다가 바뀔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애굽에서 노역하며 고통받던 세대는 이미 광야 시대에 사라졌습니다. 지금 여호수아 앞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역을 겪던 세대가 아닙니다. 그들은 광야를 떠돌며 자라온 이들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노예에서 해방하시는 하나님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게 하시고 가나안 땅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가나안 정착 이후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제의나 축제를 통해 다시금 선포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이 날의 다짐을 재연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다시금 다짐하는 절기를 지켜왔을 것입니다. 그 절기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오늘 본문은 그러한 제의를 연상시키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나안 정착 이후에 이 본문은 자신들의 땅에서 여전히 잘 살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과거 이 땅에 있던 이들을 몰아내시고 우리가 이곳에 정착해 잘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덕분이라는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자신들은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고백을 통해 12지파 연합의 단합을 재확인했는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신이 존재하는 고대 사회에서 모든 신을 배제하고 하나의 신을 섬기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기에 오직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고백은 이 고백에 참여하는 집단의 특수성과 단결력을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오늘 본문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더 활발하게 선포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겪고 있는 동안이라면, 해방의 고백이 더 어울려 보입니다. 오늘 본문은 해방보다는 정착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포로기 이후 귀환한 이들이 오늘의 본문을 선포하며 하나님을 고백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고백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기에 따라 어떤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는지, 어떤 이야기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처한 어떤 상황 속에서 그 상황을 이겨내게 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 고백이야말로 이들이 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지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고백이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그 하나님을 믿습니까? 너무 기복신앙에 빠져 있는 듯 하지만, 그래도 복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고백도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세계적인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여전히 복 주시는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을까요?

해방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일까요?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는 잘못된 현실로부터의 해방을 부르짖을 수 있었지만, 지금 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해방을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추수감사절이 단지 추수의 기쁨을 나누는 시간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우리는 어떤 고백을 하며 하나님을 따르는지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매번 달라진다면 그것도 문제는 있겠지만, 시대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계속 발전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도우셨던 어떤 기억을 가지고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자녀들에게 똑같은 고백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경험을 함께 나누지 못했고, 내가 이런 경험을 했으니 너도 믿으라는 이야기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요즘 사람들이 싫어하는 꼰대식 표현이 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발전시켜나간다는 것은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 어떤 하나님을 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입니다. 신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의미로 전해질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입니다.

고백을 발전시킨다고 할 때,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신앙의 근본은 결코 변하지 않고 중심을 굳게 지켜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은 때에 따라 다른 형태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들의 고백 중심에는 항상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유프라데 강 건너편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셨고, 그와 함께 가나안으로 오셨고, 애굽과 광야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셨으며, 지금은 가나안 땅에서 그들을 지키고 계십니다.

이런 신에 대한 이해는 고대 사회에서 거의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고대 사회에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은 지역 중심입니다. 이 지역을 떠나면 그 신의 도움도 없습니다. 다만 유목 민족의 신앙에서는 이러한 신앙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언제 어디에서 함께 하는 신에 대한 신앙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 중심에는 바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놓여져 있습니다. 이사야가 선포했던 의미는 조금 다르겠지만,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고백은 언제라도 변할 수 없는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어려운 순간, 힘든 순간에도, 기쁨의 순간에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을 따르고, 그 하나님께 감사를 돌립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마다 고백하는 하나님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리고 가정마다 고백하는 신앙도 있을 것입니다. 그 신앙 고백을 돌아보는 감사의 절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는지, 왜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고백이 있기에 다시금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따르며 살겠다고 다짐하시는 이번 주일이 되셨으면 합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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