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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관하지 않는 신앙인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행함(마태복음 11:16-19)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10.23 05:03
▲ Massimo Stanzione, 「The Preaching of St John the Baptist in the Desert」 (c 1634) ⓒWikipedia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들어가는 말

이번 주일은 창조절 여덟째 주일이며 이단경계주일입니다. 이번 주간에 제시된 성서일과 본문들은 아마도 창조절 절기보다는 이단경계주일에 맞춰서 선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왕을 원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사무엘상 8장의 말씀,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율법이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설명한 말씀 등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저희는 그 말씀들 중에서 마태복음에 나타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본문의 상황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세례 요한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도 마태복음 11장 본문과 거의 똑같은 말씀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 본문은 아마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참고했던 어떤 책 또는 이야기를 따르고 있는 듯 합니다.

이야기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질문하며 시작됩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물음을 전하기 위해 예수님께 왔는데,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예수님이 맞는지 확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전한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메시아의 오심은 결국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의로운 이들에게는 새 시대가 열리는 일이 되겠지만, 악한 이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되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까?’로 바꿔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이적들에 집중해서 본다면, 예수님은 메시아가 분명하시고, 하나님 나라도 이제 곧 도래할 것처럼 보입니다. 분명 이후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핵심은 맨 마지막에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

앞서 열거된 사람들, 맹인, 못 걷는 사람, 나병환자, 못 듣는 자는 모두 당시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들 사이에 계심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로의 체제 전복을 위해 높은 이들 사이에 계셨던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 계시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계셨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복음,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세례 요한이나 그의 제자들이 기대했던 이야기와 다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낮은 자들로부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께서 종종 말씀하신 낮은 자가 되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는 11절의 말씀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방관자를 향한 비유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설명하시며,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하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나의 비유를 드십니다. 누가복음 7장의 경우, 29-30절에 모든 백성과 세리,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를 비교하시는 이야기가 첨가되어 있지만, 이는 누가복음의 첨가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장터에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이들이 자신들의 친구를 부른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들이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았고, 자신들이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즐겁게 놀자고 해도 가만히 있었고, 슬피 울자고 해도 가만히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 속에서 어떤 아이들이 누구인지, 아이들의 친구들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점은 아이들의 친구는 아이들의 어떤 행동에도 동조하지 않는 그저 방관자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18-19절로 넘어가면서 비유에 등장한 어떤 아이들이 누구인지, 아이들의 친구들이 누구인지가 대략 드러납니다. 이 본문에서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세례 요한이 금식 생활을 이어갈 때는 세례 요한을 향해 귀신이 들렸다고 말했고, 예수님께서 금식하지 않고 먹고 마실 때는 먹보에 술꾼이라고 말했습니다.

앞선 비유와 뒤이어 나타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이야기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앞선 비유에 나타난 아이들의 친구들이 그저 방관자였다면, 뒤의 이야기에 나타난 그들은 단순한 방관자는 아닙니다. 어떤 학자는 이들을 비판적 방관자라고 말했는데, 그 말도 맞지만 저는 이들이 비판적이라기보다 비난적 방관자라고 봅니다.

두 이야기에 나타난 아이들의 친구들과 그들의 공통점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이들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이들의 친구들은 아이들을 향해 피리를 분다고 욕하지 않고, 울고 있다고 욕하지 않습니다. 그냥 방관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모습을 본 그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향해 비판의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만약 이들이 대안적인 어떤 행동을 취했다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어떤 행동을 취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그들의 말은 비판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으면서 이런 말만 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비판은 비판이 아닌 비난일 뿐입니다.

그들은 행동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향한 비난은 정당한 비판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행동은 상당히 극단적인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메뚜기와 석청만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최소한의 음식만을 섭취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극단적인 금욕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정반대 편에 계셨습니다. 비록 복음서는 예수님이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이 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동을 용인하셨던 점들을 살펴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면서 배가 고팠기에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어기면서도 배를 채웠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따르면, 제자들 중 몇몇 사람은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때도 제자들을 옹호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이 잠을 이겨내지 못한 이유로 그들이 유월절 식사 때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는 소설같은 추측이긴 합니다만, 예수님의 일화들 속에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기에 가능한 추측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때로 안식일 규정을 어기면서, 때론 정결 규범을 어기면서까지 음식을 먹는 일에 자유로웠습니다. 세례 요한과는 정말 반대였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두 집단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비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들이 비판하고 있는 내용을 생각해보면, 세례 요한은 극단적으로 금욕생활을 했기 때문에 귀신이 들렸다고 말합니다. 이때 그들은 인간적인 잣대를 들어 세례 요한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을 향해 비판할 때는 율법적인 잣대, 자신들의 전통에 따른 잣대를 들어 비판합니다.

비판의 초점은 똑같은 음식 섭취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상황에 따라 자신들이 필요한 기준을 내세워서 자신들과 다른 행동을 보이는 이들을 비판했습니다. 똑같이 인간적인 기준을 세우거나, 율법적인 기준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그냥 살아가던 대로 살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좋게 표현하자면 평범하게 살자는 요구였고, 나쁘게 표현하자면 구태의연함 속에 살아가자는 요구였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들은 행동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살아왔던 방식대로만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전통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 안에서 그저 똑같이 살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이제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그 변화된 환경을 거부하기에 그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무엇을 행하며 살아가는가? 이것이 마태가 본 오늘 본문 말씀의 의미였습니다. 19절 후반부를 보면,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행한 일’에 각주가 붙어있고, ‘어떤 사본에는 자녀들로’라고 적혀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35절은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아마도 처음 마태복음이 기록된 이후에 수정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냥 자녀로 인해 지혜가 옳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함에 따라 올바른 지혜가 드러난다고 판단했기에 이런 수정을 가했다고 봅니다.

나가는 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낮은 곳에서부터 나타나며, 자신을 낮추는 이들이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당시 유대인들이 몰랐을 것으로 생각되진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알아도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살아왔던 방식을 고수하며 그저 그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방관자, 비난적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신을 낮추는 일, 겸손함은 상대방을 받아들여주고 이해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그냥 “나는 낮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며 다닌다고 해서 내가 겸손해지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며 높여주는 사람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입니다.

나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쉽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나와 같은 사람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최근 유행하는 성격유형검사 MBTI도 16개의 유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조차도 유형이 너무 적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을 어떻게 16개의 유형으로 묶을 수 있냐고 말합니다.

서로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하며 그를 높여주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구태의연함을 벗고 내가 먼저 변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내 마음을 바꾸고 내 삶을 변화시켜야만 합니다.

낮아짐의 변화를 이루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낮아지며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시길 바랍니다. 변화하려는 여러분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지혜가 이 땅에 드러나게 되고, 더 많은 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 나갈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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