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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잘 모른다절망의 현실 한복판에서(누가복음 17:20~25)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2.11.09 01:21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행적을 보여주셨지만, 그렇게 보여주신 행적의 의미를 한마디로 집약하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을 갖고 그 믿음을 따라 산다는 것 역시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기를 소망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가 역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삶의 현실이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은 절망스러운 삶의 현실 가운데서 그것을 넘어 진정한 생명을 누리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집약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사실 이해하기가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는 묘한 대답을 하십니다. 그 다음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또 다시 묘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을 보고 싶겠지만,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다시 해명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그는 먼저 고통을 겪으리라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말씀은 37절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25절까지 한정하면 그렇습니다. 26절 이하의 말씀은 일종의 부연설명에 해당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20~21)을 말했다가 제자들에게는 그 나라의 미래(22~25)를 말하고 있어 언뜻 보기에 종잡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진실을 잘 집약하고 있습니다. 절망스러운 삶의 현실에서 참 삶의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집약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의 첫 대목(20~21)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물음에 대해 예수께서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관찰자의 입장에서 관망하는 것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관찰될 수 있는 특별한 징조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나라는 역시 관찰 가능한 특정한 시공간으로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물음에 대해 이와 같이 답한 것은 우선 예수께서 그 때의 의미를 전혀 달리 이해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인간이 계산하고 예측할 수 있는 어떤 특정한 시간에 도래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질문을 던진 바리새파 사람들은 유월절 전 날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때 관찰 가능한 어떤 징조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역사상 모든 말세론자들이 기대하고 말했던 것과 같습니다. 몇 년 몇 날에 어떤 징조들이 나타나면 그 때가 말세라는 관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그러한 예측의 시도가 전혀 무모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의 답변은 그 때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양적인 시간 곧 크로노스가 아니라 질적인 시간 곧 카이로스 관념에 따른 것입니다. 기계적으로 계량화되는 시간은 양적인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일정하게 그냥 흘러갑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양적인 시간과 상관없이 어떤 조건이 무르익는 때가 질적인 시간입니다.

언제 올 것인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양적인 시간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질적인 시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 개념을 통해 예수의 말씀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한 예수의 이 답변은 바로 그 질적인 시간 관념에 따를 때 비로소 이해 가능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관찰 가능한 어떤 징조를 통해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주체적 의지와 그에 따른 삶의 조건의 변화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 있고 저기 있어서 내가 방문할 수 있는 어떤 곳이 아니라, 내가 지금 여기서 향유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너희들 가운데 있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 ‘마음’ 가운데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너희들 가운데 있다’는 말은 마음의 차원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관계의 차원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내 마음만 바로 먹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선과 악의 대결, 악한 사람과 착한 사람의 갈등,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불평등, 높은 자와 낮은 자의 불화가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늘 고백하는 주기도문은 사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여기에서 ‘죄’로 번역된 말은 본래 ‘빚’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들에게 빚을 탕감해 준 것처럼,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시고…” 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란 채무와 채권 관계로 왜곡된 인간관계를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빚진 죄인’이 되는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을 말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물고 물리는 관계가 사라진 상태, 그러한 삶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은 그 나라가 바로 그러한 새로운 삶의 관계 안에 깃든다는 것을 뜻합니다.

▲ 하나님 나라를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어떨까요. ⓒGetty Image

제자들을 향하여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선포하는 말씀(22절이하) 또한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말씀의 취지를 간략히 헤아리면, ‘우리가 과연 그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있을까요?’ 하고 반문하는 제자들을 마음을 간파하시고 선포한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의미를 헤아려 보자면 이렇습니다.

‘너희는 완전하게 성취되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하겠지만, 그 날 가운데 하루라도 제대로 보지 못할 수도 있다’(22절). ‘오히려 성급한 얼치기들이 판을 치는 꼴을 보게 될 것이다. 거기에 현혹되지 말라’(23절). 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설치는 얼치기 사이비들에게 현혹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유감스럽게 그런 얼치기 사이비들의 목소리가 더 높아 진실이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현실에서 하나님 나라는 요원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아차리지 못할 일이 없다.’(24절) 마치 번개가 하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비치는 것과 같다는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그렇게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명암이 명확하게 엇갈리는 순간, 절망스러운 삶의 현실과 진정한 삶의 방식이 명확하게 대비되는 순간,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26절 이하)는 평온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에 균열이 일어나고 명암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사태 가운데서 어떤 길을 택해야 할 것인지를 부연하여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사람의 아들(人子)의 도래와 동일시됩니다. 사람의 아들은 특별히 묵시문학에서 메시아와 동일시되며, 신약에 이르러서 예수와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어째서 메시아가 ‘사람의 아들’로 지칭되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만 생각하고 있는데, 성서는 분명히 그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상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국의 신학에 반하는 표상으로 이해할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많은 영웅과 특권 지배세력이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지는 현실 가운데서 평범한 사람의 아들이야말로 진정한 메시아라는 관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제국의 지배 시대에 평범한 사람들에게 권력자들은 괴물로 인식되었습니다. ‘인간’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처럼 괴물 같은 존재에 대비되는 의미에서 진정한 인간에 대한 갈망을 그 표상은 함축하고 있습니다. ‘진인’(眞人)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 사람의 아들은 곧바로 영광을 누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한 세상의 현실 가운데서 먼저 고난을 겪고 당대 세대에게 버림받습니다(25절). 악한 세력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참 생명의 길, 참 삶의 길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는지를 말합니다. 그 대비가 분명해질 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또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오늘 본문말씀의 요체입니다.

또다시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지난주일 아침 그 비극적인 참사 소식을 접했지만, 어떤 말도 하기 어려웠습니다. 여전히 말문이 열리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어째서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을까요? 입시지옥과 취업경쟁에 시달리고, 코로나로 억눌렸던 젊은이들이 축제의 길거리에서 한순간에 고귀한 생명을 잃어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사태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 어처구니없는 참사로 희생된 분들과 그 유족들 아픔에 함께 하며 기도하는 것 말고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를 붙들어 매고 있는 삶의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극의 순간에 이르러야 비극적인 삶의 현실을 깨닫는 건 또 얼마나 비극적인가요? 일상적 삶의 순간순간 그 비극을 잉태하는 삶의 조건을 알아차렸다면 그 비극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근래 우리 사회에서 재난이나 참사가 일어났을 때 반복되는 현상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높은 시민의식과 그에 대비되는 정치세력의 안일함과 무능함, 또는 시민의식을 거스르는 악의적 무책임의 현상입니다.

정권의 보위를 위해서는 수천 명의 경찰을 동원하지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서는 백 명 남짓밖에 안 되는 경찰을 동원하는 집권세력의 행태에 그 비극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책임은 외면한 채 진정성 없는 사이비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하고 수습책은 내놓지 못한 채 여론대책에 부심하는 집권세력의 행태에서 그 비극은 여전히 재연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공공성과 생명의 안전을 위한 정책이 뒷전으로 밀리는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장에서 역부족을 실감하면서도 목이 터져라 외치며 스러져 가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애쓴 경찰과 시민들, 또다시 슬픔에 젖어 분노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는 어찌 그리도 먼, 괴물 같은 정치세력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을까요?

그 절망스러운 현실 가운데서 진정한 삶의 소망을 키워나가고,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아 알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의 사회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비극의 참사를 넘어서기 위해 헌신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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