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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경지충만함 속의 내 몫(에베소서4:7-16)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11.22 00:58
▲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위해 주신 은사와 직분에 충실하는 충만이 필요하다. ⓒGetty Image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아이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에베소서 4:11-15)

1.

바울은 ‘몸은 하나이지만, 그 몸에 여러 지체가 있다’는 비유를 즐겨 사용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과 로마서 12장이 대표적이지요. 서로서로 다 다른 존재들이지만, 그 존재가 유기적으로 연합되어서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한 몸에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각각의 서로 다른 존재들은 존재의 다름이 있을 뿐, 존재의 가치에는 차이나 차별은 없다, 좋고 나쁜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한 몸을 이루려면, 눈도 있어야 하고, 손도 있어야 하고, 발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쓸 데 없다고 생각하는 맹장도 있어야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논리적으로 이치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그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었을 때에는, 객관적으로만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눈도 손도 발도 맹장도 다 필요한 지체입니다. 어떤 지체이든 다 소중합니다.

하지만, ‘내가 무슨 지체가 될 것이냐? 내가 무슨 역할을 맡을 것이냐?’ 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지닌 마음, 나의 성향, 나의 호불호, 나의 욕심, 나의 소망, 실제적인 나의 능력... 이런 모든 것들과 미묘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2.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MBTI라는 것이 유행입니다. 마이어스와 브릭스라는 사람이 여러 가지 기준에 따라서 사람의 성격의 유형을 구분하는 지표를 만들었습니다. 외향적인가 내향적인가, 감각적인 사람인가 직관적인 사람인가, 감정에 충실한가 논리에 충실한가, 받아들이는 사람인가 판단하는 사람인가, 이런 여러 가지 기준에 따라서 사람들을 나눕니다.

원래는 사람을 잘 이해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데, 당신은 이런 특징들이 있는 사람이군요’ 하는 겁니다. 누군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다른 사람이 ‘당신, 왜 이랬어!’ 하면 싸움이 됩니다. 그런데 상대방의 성격을 파악하고 이해하면, ‘당신은 이런 사람이어서 이렇게 했군요. 나는 당신과 다르게 이런 사람이어서 이렇게 생각했어요’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MBTI가 요즘은 무슨 사주팔자 보듯이 오용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실제 전문 상담가를 통해서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간략한 간이검사를 몇 분 해 보고서는, ‘나는 이렇네 너는 이렇네…’ ‘너는 이런 사람이고, 나는 이런 사람이야.’ ‘너랑 나는 안 맞아 상극이야.’ 이런 이야기들을 장난처럼 나눕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무 소용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자기가 가진 뛰어난 능력을 십 분 발휘하고 싶어하고, 또 누군가는 능력은 없지만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고자 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하는 일이 성공해야만 기뻐하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는 일이 실패해도 도전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남들 앞에 드러나기를 좋아하고, 누군가는 뒤에 조용히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3.

문제는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각자의 호불호를 가지고서 한데 어울려 있을 때, 생각만큼 아름다운 유기체가 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상황이 그랬습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에 맞게 인간관계를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서로 다른 것을 놓고 오히려 누가 잘났냐 하면서 다툼이 일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쓴 편지에서 누가 잘났느냐 따지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사랑이 최고의 은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받은 은사를 가지고 자랑질하지 말고, 서로에게 덕이 되게 행하라고 말합니다.

훌륭한 권면입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쉽습니다. ‘질서 있게 행하라. 덕이 되게 행하라’ 원칙적으로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그 질서가 파괴되고, 덕스럽지 못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치유해주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아쉽게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오늘 에베소서에서 그 이야기를 해 줍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과 바울의 상황이 신기하게 딱 들어맞습니다. 고린도전서가 훌륭합니까? 에베소서가 훌륭합니까? 방언의 은사가 높습니까? 예언의 은사가 높습니까? 눈이 중요합니까? 손이 더 중요합니까?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모두 다 중요하지요. 서로가 서로를 돕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지요. 고린도전서가 미처 말하지 못한 바를 에베소서가 말해주고, 에베소서가 넘어간 것을 고린도전서가 집요하게 설명해줍니다.

서로 다른 역할과 다른 기능이 있습니다. 서로 달란트가 다르고, 능력이 다릅니다. 알겠습니다. 전체적으로 그렇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당면하는 문제는 전체가 아니라, 일개 한 부분인 ‘나’입니다. 전체가 그렇다는 것을 아무리 이해한들, ‘나’는 전체가 아닙니다. ‘나’의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전체가 이해되는 겁니다. 오늘 에베소서는 ‘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줍니다.

4.

서로 다른 역할과 다른 기능이 있습니다. 서로 달란트가 다르고, 능력이 다릅니다. 문제는 내가 원하는 능력이 있고, 내가 원하는 달란트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것과 언제나 일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야속합니다. 내 맘에 꼭 맞게 주지 않으십니다. 전혀 다른 엉뚱한 것을 주시고는, ‘이게 너에게 딱 좋은 거야’ 하십니다. 야속합니다.

이 고민을 우리의 신앙의 표현으로 바꾸자면, ‘능력대로 봉사하느냐, 맡은대로 순종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주어진 것과 원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바울은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셔셔, 포로를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시편의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요. 의도에 맞게 조금 변형시켰습니다.

올라가셨다는 것은 먼저 내려오셨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왜 내려오셨습니다. 이 땅에서 헛된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내려오십니다. 그래서 헛된 것들에 사로잡힌 것을 풀어주십니다. 그리고는 다시 우리를 사로잡아가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하나님의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사로잡으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구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전에 헛된 권세에 사로잡혔다가, 십자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제는 하나님께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포로입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포로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너는 교사, 너는 예언자, 너는 사도, 너는 목사, 너는 전도자... 그렇게 하나님 마음대로 임명하십니다.

11절에 ‘~로 삼으셨다’고 표현했지만, 원문을 보면, ‘주었다’는 말입니다. ‘너에게는 사도를 주고, - ‘직분’이라고도 표현하지 않습니다 - 예언자를 주고, 전도자를 주고, 목사를 주고, 교사를 줬다.’ 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고!

그리스도의 몸이 무어냐?는 문제는 이따가 이야기하고, 먼저, 그리스도의 몸은 어떻게 세웁니까?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되어야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집니다. 그리스도의 경지가 뭘까요? 예수가 보여준 경지, 그 삶의 높이, 그 훌륭함이 뭘까요? 막연하게 ‘우리 예수님은 최고지’ 하는 그런 경지 말구요.

예수님이 삶으로 보여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성취가 뭐냐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로잡혀서 무언가를 받았는데, 맡았는데, 그걸 어떻게 할까? 생각하면서 예수의 삶을 보자는 겁니다. 예수님도 우리랑 똑같이 하나님께 사로잡혀서 그리스도로서의 메시야로서의 삶을 받았습니다. 맡았습니다. 맡아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끝까지 순종하고 순종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경지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지는 위대한 능력, 권위, 기적, 이적, 가르치는 말씀의 위대함…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는 ‘위대한 순종’입니다. ‘충만한 순종’입니다. 게쎄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면서 기도하는, 마침내 그 기도의 끝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십자가를 지고서야 ‘다 이루었다’ 기뻐하는, 그런 충만한 순종입니다.

충만한 순종은 그저 아무 것도 토달지 않고, ‘예, 하겠습니다’ 하는 그런 순종이 아닙니다. ‘싫다고, 무섭다고, 맘에 안 든다고’ 외면하고, 도망가고, 투덜대고, ‘왜 하필 나냐고, 왜 하필 이런 일이냐고’ 따지고, 원망하고.. 그런 인간적인 것들을 충만하게 다~ 하고서, 반항할말큼 다 해보고 나서 신앙의 결론으로 얻어지는 순종입니다. 그래서 충만한 순종입니다. 그렇듯 한 것들로 가득 찬 충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부족함으로 가득 찬 충만입니다. 그런 충만함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순종을 선택한 그런 순종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충만함의 경지입니다. 그런 그리스도가 세워지는 일, 우리도 그런 작은 그리스도로 세워지는 일, 그런 작은 그리스도들이 하나하나 모여,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는 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루시려는 일입니다.

5.

우리를 흔들리게 하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나, 온갖 교훈의 풍조라는 것은, 그 순종을 막아서는 인간적인 모든 것들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뚫고 마침내, 그 안에서 하나님의 것을 발견하고 기뻐하고 순종하기를 바라십니다. 13절을 보면, 하나님의 진짜 목적이 나타납니다.

누구는 예언자로 삼고, 전도자로 삼고, 교사로 목사로 삼아서, ‘너는 예언자가 되고, 전도자가 되고, 교사가 되고, 목사가 되어라!’가 아닙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보고 싶으신 것은, 주어진 달란트를 얼마나 남기느냐가 아니라, 주신 것, 맡긴 것, 맡은 것, 받은 것,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에,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맨 처음 문제로 되돌아옵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 사이의 상충, 대립의 문제, ‘능력 대로 봉사하느냐 맡은 대로 충성하느냐’의 문제는, 우리의 소원과 하나님의 응답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혀서 주신 것을 살아내는 사람들입니다. 그 살아냄이 순종입니다. 그 순종을 위해 ‘내 모든 것’을 충만하게 쏟아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아낸 예수를 본받는 사람들입니다. 게쎄마네에서 충만한 순종을 보여주신 그 경지에 올라서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충만함으로 한 순간 한 순간을 살아갈 때, 어느 사이엔가 우리 삶에 만발한 아름다운 꽃이 보이고, 풍성한 열매가 보일 것입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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