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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넘어완전한 쉼(마태복음 12:9-14)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12.05 23:32
▲ 예수께서는 세상의 모든 제도보다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우선이었다. ⓒGetty Image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서,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괜찮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 끌어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
그런 다음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가 손을 내미니, 다른 손과 같이 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서,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1. 신앙은 자유

바울은 위대한 선교자였습니다. 최소한 3차례의 선교여행을 통해 소아시아 지역(전세계)를 돌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동시에 바울은 위대한 신학자였습니다. 선교의 현장은 변증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교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복음의 진리를 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의 내용을 체계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노력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 할례로 대표되는 ‘율법’과의 싸움이었습니다. 바울은 구원의 핵심이 ‘할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또 역설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쓴 편지의 중심에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중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 표현은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롭습니다. 그냥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롭습니다. 어디에서 해방되었느냐?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세상 질서에 노예되어 있는 것을 해방시켜주셨습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5장의 핵심 내용입니다.

복음은 해방입니다. 참된 깨달음을 얻는 내적인 해방이고, 깨달음대로 살 수 있도록 외적인 삶이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갈5:6에서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내적인 깨달음이라면, ‘사랑’은 깨달음대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억압하고 있는 것, 족쇄를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그것을 할례, 율법이라고 표현했는데, 복음이 아닌 세상의 모든 가치들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일(갈5:13)’이 그것입니다. 누가 억지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억압하는 것입니다. 억지로가 아닌 나 스스로의 내적 복종입니다.

어디에 복종할까요? 자기 만족에, 육체의 욕망에,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인간의 원초적 욕구에, 사회적 욕구에, 정치적 욕구에, 소위 자기실현에, 자아성취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즐거워서 기뻐서 보람차서 스스로 기꺼이 복종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모든 것을 넘어서는 진리를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모든 것을 넘어선 차원이 신앙의 차원이고, 하나님의 차원이고, 복음의 차원입니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삶의 내용은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근본 욕구가, 근본 바람이, 하나님의 진리에 뿌리내려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2. 안식일과 내 신앙의 질문

율법은 안식일의 쉼을 명령합니다. ‘안식일을 지켜라. 그것은 거룩한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 쉬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의 모방이요, 기념이다.’ 이 말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주일성수가 매우 중요한 율법처럼 여겨집니다. 옛날에는 얼마나 더 대단한 권위 있는 말씀이었는지 모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수많은 율법 중에서도 핵심 율법이었습니다. 십계명에도 당당히 네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공격을 받았던 주된 이유가 되었습니다. 안식일에 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병자를 고치신 것도 안식일이었습니다. 실로암에서 눈을 뜨게 하신 것도 안식일이었습니다. 등 굽은 여자를 고치신 것도 안식일이고, 수종병 앓은 사람을 고치신 것도 안식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먹기도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셨는데, 바리새인들이 발끈합니다.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인 안식일 엄수를 어겼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한편으로는 맞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안식일에 쉬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왜 쉬라고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본뜻을 잊어버리고 겉모양만 남기면 안 됩니다.

도로에 중앙선 노란선이 그어져있습니다. 넘어가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운전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 커다란 바위가 나타납니다. 돌멩이가 산에서 굴러 떨어졌나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중앙선을 넘어가면 안 된다고 곧이곧대로 직진만 해서 바위돌하고 충돌해야 됩니까? 충돌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중앙선을 침범하면 안 되는 것인가요? 중앙선을 침범해서라도 안전하게 바윗돌을 피한 다음에 차를 안전하게 세워놓고, 돌덩이를 치워야 합니다. 중앙선을 그어놓은 것은 안전한 운전을 위한 것이지, 중앙선 자체가 금과옥조처럼 결코 침범할 수 없는 근본적인 가치인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논리는 안식일의 쉼이 가지는 근본적인 의미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 엄수 자체를 고집하는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안식일의 쉼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철저한 고민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만약에 갑자기 ‘내일부터는 안식일에 쉬는 게 아니라, 안식일에는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하고 말씀하시면, 아무런 고민 없이 ‘열심히 일해라’ 하고 앵무새처럼 외칠 사람들인 것입니다. 왜 쉬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발끈한 둘째 이유는 예수를 고발하고자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의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됩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 물음의 이유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쉬라고 하셨는데 왜 당신은 일을 합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하는 겁니까?” 하는 그런 근본적인 진리에 대한 궁금함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예수를 고발하려고’ 안식일 논쟁을 벌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우리의 삶 사이에서, 그 괴리감에 어려워 하는 신앙인의 질문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살라고 하시는데, 이렇게 살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는 신앙의 고민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도 그렇습니다. 그 내용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의도와 목적이 진짜 문제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왜 이런 질문을 하느냐, 내 마음 속에 어떤 걸림이 있길래 이런 물음이 생겨나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오늘 우리의 고민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참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진정으로 감화되어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인가?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에 말씀대로 사는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야말로 삶을 진짜로 아름답게 사는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사는가? 아니면, 믿어야 된다니까 믿는가? 하나님 믿으면 잘살게 된다니까 믿는가? 뭐라도 종교는 하나 있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교회 나오는가?’

다시 말하면, ‘안식일에 쉬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쉽니까? 아니면 성경에 쉬라고 했으니까 무작정 쉽니까?’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예수를 고발하기 위한 질문이라면, 아무리 대단한 질문이라고 할지라도 거짓된 질문일 뿐인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던지는 질문도 기도도, 그 내용이 아무리 대단하고 아무리 심오하고 아무리 통찰력 있고 그래도, 대단하고 멋진 수려한 말로 그럴듯한 기도를 아무리 해도 소용없습니다.

내 삶을 두고 나는 왜 이런 기도를 하는가? 나는 왜 이런 물음을 하나님께 던지는가? 왜 이게 나에게 고민이 되는가, 왜 이것이 내 삶을 아프게 하는가? 이 일을 두고 하나님은 나에게서 무엇을 바라시는가? … 이런 고민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기도는 헛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안식일이니 쉬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쉼의 시간에 마냥 편하기만 하면 안 됩니다. 그 쉼이 괴로워야 합니다. 쉬고 있는 나와, 쉬라 하신 하나님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을 쉬고 있는지, 무엇을 내려놓지 못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맘 놓고 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치열했던 삶을 잠시 내려놓고, 그 삶의 근본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는 시간입니다. 그것이 진짜 쉼입니다.

3. 진짜 쉼이란?

안식일에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경배한다’ 합니다. 그러면서 쉰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대로 사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쉬라고 하셨던 것은, 세상적인 의미대로의 쉼이 아니라, 하던 일을 내려놓고 마음 편하게 릴렉스 하는 그런 쉼이 아니라, ‘거룩한 안식’을 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안식일을 준수하라는 명령의 진짜 의미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하나님을 내 삶으로 예배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 쉼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더니 평안하고 편안하고 영혼이 즐겁고 기쁘냐? 그것을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신앙생활 하는 것이 나에게 쉼이 됩니까? 세상살이가 이토록 어려운데, 그 어려움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섬김으로 인해 나에게 오아시스 같은 쉼이 평안이 찾아옵니까? 갈라디아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내 삶에 해방이 되고 자유로 다가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신앙생활하고, 교회 다닌다는 것이, 또 하나의 어려움으로 또 하나의 부담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까?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라’ 했는데, 이 말씀이 ‘안식일에 일하고 장사하고 회사 나가면 안 된다. 망한다. 죽는다.’ 그런 말일까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나에게 쉼이 되지 않는 자, 그런 사람에게는 참된 생명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는 죽음뿐이다’ 이런 말씀 아닐까요?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삶이 나에게 평안하고 즐겁지 않다면, 내 신앙을 두고 치열하게 고민하라는 말씀 아닐까요? 오늘 주일을 그 고민으로 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 아닐까요?

4. 평안하십니까?

삶의 작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편히 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즐거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두려워 벌벌 떨면서 억지로 그 명령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 편안하고 기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안식일이 우리에게 안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모든 명령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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