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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욕망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희망탄식하는 백성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사야서 62:1~6)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2.12.20 21:50

지난 주일에는 두 번째 이사야의 말씀을 함께 나눴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세 번째 이사야(56~66) 예언의 한 대목입니다. 첫 번째 이사야(1~39)가 주전 8세기 곧 왕국이 존속하는 시대에, 두 번째 이사야가 주전 6세기 곧 왕국이 멸망하고 바빌론 제국의 지배 시대에 예언활동을 펼쳤다면, 세 번째 이사야는 그보다 한 세기 후 곧 페르시아 제국의 등장과 함께 포로로 붙잡혀 있던 유대인들이 해방된 시점에 예언활동을 펼쳤습니다.

모든 예언자들의 선포는 시대적 맥락을 지니고 있고, 그에 따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은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과 예언자 자신의 인격을 매개로 하여 선포되기 때문에 각기 고유한 특성을 지니는 것이 당연합니다.

세 번째 이사야가 활동을 펼치던 때는 어떤 시대였을까요? 두 번째 이사야가 활동하던 때는 포로 상태에서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기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고향으로 향하는 길을 내라는, 지난 주일의 말씀은 그 기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 와서 부딪힌 현실은 그렇게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순수한 신앙공동체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귀환 후 최우선 사업으로서 두 번째 성전이 완성된 상황인지(56:1~8), 아니면 그보다 앞선 상황인지 혼선이 있지만,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경제적 빈곤, 정치적 왕국의 회복 불능, 성전 주도권을 둘러싼 제사장 계층 내의 갈등(사독 가문과 레위인들의 충돌), 정착민과 귀환민의 갈등,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이 중첩된 상황이었습니다.

민주화가 되고 정권교체가 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지는 현실을 우리는 계속해서 경험해 왔습니다. 그런 정황과 유사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경험한 환멸과 혼란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환멸의 상황을 경험하며 예언의 선포는 이전의 색조와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람들의 원성은 드높아지고 환멸의 탄식이 지속되는 상황 가운데서 예언은 더욱 급진화합니다. 이른바 종말론적 전환입니다.

이전의 예언이 역사의 어느 시점에 유다가 다시 번영을 누리리라는 것이었다면, 이제 예언은 그 역사를 넘어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와 더불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리라는 것으로 바뀝니다. 점진적인 개혁의 기대가 무너진 상황에서 근본적인 혁명의 기대가 증폭된 것입니다. 역사의 연속이 아니라 단절과 더불어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가 불꽃처럼 피어올랐습니다.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 울음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 백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 할 것이며 …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 그들은 헛되이 수고하지 않으며, 그들이 낳은 자식은 재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65:17~25)

모든 갈등과 적대가 사라진 현실 가운데서 저마다 삶을 온전히 누리게 되리라는 희망입니다. 좌절과 환멸의 상황에서 희망이 꺾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폭되었습니다. 인간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이 더욱 깊어지고 근본부터 다시 구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통찰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환상이 아니라 마땅히 이뤄져야 할 인간과 세계의 새로운 현실에 대한 갈망이 더욱 철저해지고,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는 것이라는 믿음이 더욱 깊어진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원대하고 근본적인 희망의 기대 가운데 선포된 말씀입니다. “시온의 의가 빛처럼 드러나고,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날 때까지, 시온을 격려해야 하므로, 내가 잠잠하지 않겠고, 예루살렘이 구원받기까지 내가 쉬지 않겠다.”(62:1) 기가 막힌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지 않고 쉬지 않고 그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세 번째 이사야의 예언은 환멸의 상황에 대한 깊은 탄식을 그 밑바탕으로 합니다. 그 탄식 가운데서 새로운 희망을 깨닫고 그 희망을 고무하는 예언입니다. 본문에 앞선 60장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 적들에 대한 탄식을 바탕으로 합니다. 우월한 힘으로 억압하고 지배한 세력들에 대한 탄식입니다. 그들 가운데 장차 오히려 빛날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61장은 자신들을 향한 탄식을 바탕으로 합니다. 어쩌다 그 고통과 수모를 겪게 되었는지 성찰하며 진정한 제사장의 백성으로 거듭날 민족의 미래를 그립니다. “주님께서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61:1~2)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다시 환기한 말씀입니다(누가 4:18~19).

본문말씀이 포함된 62장은 하나님을 향한 탄식이 그 밑바탕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침묵하고 계시며 어찌하여 손을 놓고 계십니까?’ 그 탄식을 밑바탕으로 합니다. 바로 그 탄식에 대한 응답입니다. “내가 잠잠하지 않겠고, 예루살렘이 구원받기까지 내가 쉬지 않겠다.” 탄식하는 백성과 함께 하시겠다는 선포입니다.

이어지는 6절의 말씀이 여기에 맞대응합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들을 세웠다. 그들은 밤이나 낮이나 늘 잠잠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약속을 늘 주님께 상기시켜드려야 할 너희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늘 상기시켜드려야 한다.”(62:6) 아주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희망의 성취를 기대하는 백성의 의지와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네덜란드의 한 무명의 작가, 「St. John the Evangelist on Patmos」 (Woodcut, 1522–1525. From Jacobowitz and Stepanek 1983, Plate 103.)

본문말씀은 그처럼 결코 침묵하지 않고 쉬지 않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루실 구원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이뤄지는 의를 이방 나라들이 볼 것이며, 그 왕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 합니다. 그 때 사람들은 새로운 이름으로 그 백성을 부르게 될 것이며 아름다운 면류관이 될 것이라 합니다. 다시는 ‘버림받은 자’ 또는 ‘버림받은 아내’로 일컬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여인’ 또는 ‘결혼한 여인’으로 불리게 될 것이라 합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은 마치 신랑과 신부로서 결혼을 한 것과 같다고 합니다.

흔히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상하는 것에 익숙하지만, 세 번째 이사야는 그 표상과 더불어 결혼상대자 곧 신랑으로서 하나님 표상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만큼 하나님과 백성이 격의 없는 사이,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친밀한 사이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나타내는 오늘 본문말씀에서 가부장제의 흔적을 발견하거나 이른바 정상성의 범위 안에 있는 사랑과 결혼관계만을 연상할지도 모릅니다. 결국 특별히 선택받은 백성과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는 것으로 여겨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 번째 이사야의 놀라운 종말론적 희망은 그런 기대를 넘어섭니다. 그 종말론적 희망은 신체와 민족, 섹슈얼리티와 젠더를 뛰어넘습니다. 그 경계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하나가 되는 세계에 대한 희망을 선포합니다.

야곱의 후손이라도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없고(58장), 반면에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설령 고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철저히 따르면 그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며 영광을 누립니다(56장). 이는 아이를 낳지 못한 여인이 오히려 더 많은 자녀를 보리라고 선포한 두 번째 이사야의 예언과도 상통합니다(54장).

“이방 사람이라도 주님께로 온 사람은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백성과 차별하신다’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여라. 고자라도 ‘나는 마른 장작에 지나지 않는다’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여라.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록 고자라 하더라도, 나의 안식일을 지키고,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을 하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면, 그들의 이름이 나의 성전과 성벽 안에서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56:3~5)

모든 적대가 사라지고 진정한 삶의 기쁨을 누리는 세계에 대한 전망은 기왕의 세계 질서 안에서 부여받은 지위와 신분을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그 누구의 특권도 용인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이사야는 다양한 주민들로 구성된 공동체 안에서 편견과 적대의 문제를 그만큼 심각하게 느꼈던 것입니다.

예언자가 그린 세계, 마땅히 인간이 도달해야 할 세계,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구현되는 세계는 그 편견과 적대가 완전히 사라진 세계입니다. 그것은 소유의 욕망으로 빚어진 에덴의 저주, 곧 실낙원의 고통을 넘어 새롭게 창조되는 세계에 대한 희망입니다. 그래서 그 희망은 여전히 오늘 우리에게도 위대한 꿈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의 결혼관계 표상은 특권적 선민의 지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신랑과 신부가 그렇듯이 그렇게 서로를 그리며 마주하는 관계로서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함께하는 삶의 동반자로서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입니다.

무엇이 그 관계를 파탄시켰을까요?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적대시하며 갈등을 겪어야 하고, 결국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단절시킨 상황을 빚어낸 근본 원인이 무엇일까요? 성서의 첫머리 창세기가 통찰하고 있듯이 그것은 소유의 욕망입니다.

그 소유의 독점에 기초하여 그것으로 온전히 자신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과 착각이 문제입니다. 자신만의 소유, 자신만의 능력으로 자기 삶을 보장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 남의 삶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입니다. 성서는 그것을 가장 큰 죄로 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그 소유의 배타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에 기초한 욕망을 무한히 확장시키는 삶의 체제요 방식입니다. 돈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해 버린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바로 그 체제가 우리 삶의 방식과 의식을 강요합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하나의 삶의 방식일 뿐 결코 영원한 것일 수 없습니다.

한동안 놀라운 생산력으로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켰을지언정 오늘날 그 삶의 방식은 사람들 사이에서 정의를 파탄내고 피조세계 안에서의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것은 불행한 삶의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소수의 사람에게는 행복을 보장하지만 다수의 사람들과 생명체들에게는 재앙이 되고 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삶의 동반자로 하는 삶에 대한 믿음은 우리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으로 인도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은혜의 때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 때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그 믿음으로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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