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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내게 묻지도 요구하지도 않지만불 속에라도 들어가서(단 3:13-28)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01.03 01:05
▲ Briton Rivere, 「Daniel in the Lion’s Den」 (1872) Wikipedia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아뢰었다. “굽어살펴 주십시오. 이 일을 두고서는, 우리가 임금님께 대답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불 속에 던져져도, 임금님, 우리를 지키시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활활 타는 화덕 속에서 구해 주시고, 임금님의 손에서도 구해 주실 것입니다.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임금님의 신들은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굽어살펴 주십시오.”(다니엘서 3:16-18)

1.

성서의 백성들은 모두 기다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 모두는 간절함과 절심함으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자신과 시대에 주어진 비참한 현실과 억울한 상황을 가슴 아파하고 저항하면서, 그것을 극복하게 하실 구세주를 고대한 것입니다. 마치 지금 우리 민족이 분단 70년의 아픔을 극복하고 어서 평화로 하나 된 통일 조국을 고대하듯이, 성서의 백성들도 오랫동안 평화의 세상을 그리면서 해방자로서의 메시아를 고대하며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의 고난은 B.C 721년,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본격화되었습니다. 앗수르 제국으로, 메데와 바벨론 제국으로, 페르시아 제국으로, 헬라 제국으로, 그리고 로마 제국으로 이어지는 무자비한 통치의 역사 속에서 그들은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의 탄식(歎息)이 얼마나 깊었겠습니까! 메시아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懇切)했겠습니까?

예수의 오심, 곧 하나님의 응답은 그 기다림과 간절함의 기도가 정점(頂点)에 다다랐을 때였습니다. 성서의 기자들은 예수님을 두고 ‘모퉁이의 머릿돌’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예수가 오심으로 세상의 판이 완전히 뒤바뀌어서 새롭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건물이 이 돌 위에 지어진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지배자 중심에서 백성 중심으로, 강자 중심에서 약자 중심으로, 세상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세상의 판이 대대적인 개편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단순히 이스라엘의 현실적인 고통이 없어지는 것만 생각했는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완전히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세상으로, 엄청난 전환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때를 바로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때, 하나님이 역사를 바꾸시는 때, 하나님의 세상으로 완전히 세상이 뒤바뀌는 때, 카이로스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때를 맞이하려면, 우리도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는가’에 대한 자문자답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구세주가 되시고 도움이 되십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내 중심으로만 살고 있다가, 얼결에 주님을 맞이하고 보면, 그 시간은 구원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에게 심판의 시간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그래서 오늘 성서는 기다리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기다림이 깊은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단순하고 진지합니다. 그리고 목표에 집중합니다. 결코 이중적이지 않습니다. 목표가 확실하며 이리저리 두리번거리지 않고, 두려움 없이 모든 것을 던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고, 당신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택하여 일하십니다.

오늘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의 기다림은, 구세주 나심을 기다리는 우리의 기다림은 어떠한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을 보겠습니다. 다니엘서에 나타난 본문의 주인공들은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삼총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입니다.

* 잠깐 이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이 이름은 바벨론식 이름입니다. 말하자면 창씨개명을 한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인데(단1:7), 바벨론에 끌려간 뒤에 바벨론 식으로 새로 지은 이름입니다. 다니엘도 벨드사살이라고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됩니다. 다행히 다니엘은 원래 이름대로 계속 다니엘이라고 불리는데, 이 세 친구는 진짜 이름이 아니라,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라고 불립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건 우리가 누군가를 ‘히라누마 도쥬’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히라누마 도쥬’가 누굴까요? ‘윤동주’ 시인입니다. 일제에 의해서 강제로 개명한 이름을 지금껏 불러서는 안 됩니다. 윤동주는 ‘윤동주’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할 게 아니라, 본래 이름을 우리가 기억해 주어야 합니다.

이들은 나라가 바벨론에 망하자 다니엘과 같이 포로로 끌려온 자들이었습니다. 식민지 백성이었지만 워낙에 뛰어난 인재여서, 다니엘과 함께 바벨론 제국의 고위직을 맡아 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큰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바벨론 왕이 새로운 신상을 세우고, 이 신상에 절하고 섬기도록 새로운 법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법을 어기면 맹렬히 불타는 화덕 속에 던져져서 타죽게 된 것입니다. 뛰어난 능력 때문에 중용되어서 잘 살던 친구들이지만, 이제 세상 앞에서 그 태도를 명확하게 해야 하는 때가 닥친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삶의 목표가 무엇이었을까요? 바벨론에서 성공하는 것? 잘사는 것? 출세하는 것? 부귀영화? 아닙니다. 이들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성공하기도 하고 출세할 수도 있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에게 지금 ‘당신 마음의 중심에 뭐가 있소? 당신의 진짜 삶의 목표가 뭐요?’ 하고 묻는 신앙의 절체절명의 질문이 닥친 것입니다. 그럴 때, 이들은 주저없이 ‘내 삶의 목표는 하나님이다!’ 하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부귀영화가 복된 것이고, 이들의 성공이 위대한 것입니다. 성공이 대단하고 출세가 그럴듯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포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들의 기다림은 자신을 위한 기다림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를 위한 기다림이었습니다. 내가 잘 살고, 내가 잘 되고, 내가 행복한 것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는 힘들고 나는 고되고 나는 고통 받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통치를 위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위해, 살았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 기다림이 간절했기에 풀무불에도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는 사실 이런 극적인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누가 우리를 붙잡고 ‘죽음을 각오하고 당신의 신앙을 증명해라’ 하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너무나 느슨합니다. 너무나 헐렁합니다. 내가 알아서 신앙생활 적당히 하고, 내가 알아서 세상 유혹에도 적당히 취하고, 이리저리 이쪽저쪽 적당하게 양다리를 걸치고 살아가도 됩니다. 이쪽이냐 저쪽이냐 태도를 분명하게 해라! 하는 요구를 아무도 우리에게 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 알아서 선택하고, 내가 잘~ 알아서 뉘우치고 회개합니다. ‘내가 다 알아서 하니까 아무도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아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한 신앙으로 만족하고 맙니다. 계속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마음속에 적당한 죄책감을 품고, 회개라는 이름으로 그 적당한 죄책감을 지워냅니다. 그리고는 삶의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상과 타협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어쩔 수 없는 그것을 사실은 나의 진짜 목표로 삼아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3.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는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하나님을 기다렸는데, 우리는 불 속에 들어가기는커녕, 풀무불 피우는 사람 곁에 서서 옆에서 더 잘 타라고 부채질이나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구원의 현실을 기다리면서 세상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잠깐 세상 속에서 살고 있을 테니 하나님이 나를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오히려 하나님에게 요구합니다. “나는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더 이상은 못 기다리겠다. 이제 하나님이 기다리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라.” 기다림을 포기한 삶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습니다.

성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고난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렵습니다. 껄끄럽습니다. 유쾌하지 않습니다. 기꺼이 신앙의 길을 가겠다고 결단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봐야 바벨론 풀무불에 던져질 뿐이고, 박해와 고난이 닥칠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고난에서 구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만, 그 고난을 이미 다 당하고 나서 구원받으면 뭐하겠습니까? 고통은 고통대로 다 당했는데 이제 와서 기다려봐야 뭐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즐거움은 전혀 방향이 다릅니다. 세상이 말하는 그런 즐거움이 똑같이 우리가 바라는 즐거움은 아닙니다. 세상과 똑같은 즐거움이 우리의 즐거움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니까 기다림이 헛되고 기다림이 허무한 것입니다.

‘맹렬히 타고 있는 풀무불에 들어가면 죽는다. 그것은 고통이다’가 아니라, ‘그렇게 맹렬한 풀무불이라도 우리를 막을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입니다.

오늘 다니엘의 세 친구의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님을 잘 믿었더니 풀무불에서도 죽지 않고 건져주셨다. 기적을 일으켜주셨다. 우리 하나님 최고!’ 그런 이야기가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한다면, 그 하나님을 진심으로 기다린다면, 세상 사람들 누구라도 끔직이 싫어하고 피하고 싶어하는 풀무불이라도 나는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

그럼 우리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습니까? 복음서의 말씀을 읽어보면 박해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입니다. 박해의 때가 오는데,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고난에 맞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더 면밀히 읽어보면 말씀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귀하게 여기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두려워할 것이냐?’가 아니라, ‘누구를 사랑할 것이냐?’입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말씀을 외쳐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고난은 신경쓰지도 않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고난이 아프고 힘들고 눈물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리는 억지스런 기다림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그런 고난이 고난으로 느껴지지도 않는 즐거운 기다림이 되어야 합니다. 기다림에 취해서 풀무불이 뜨겁지도 않은 그런 기다림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기다림이 가능합니까?’ 하고 묻지만, 그것이 신앙의 신비이고 신앙의 아름다움입니다. 섣불리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신비’인 것이고, 이해하고 체험하게 되면 누구라도 사모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아름다움’입니다.

‘고난을 이겨내자, 이겨내자’ 하는데, 사실 고난은 이겨내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저절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고난인 줄 뻔히 알면서 풀무불에 들어갔을까요? 아닙니다. ‘저 불에 들어가면 타죽겠지만, 이 고난을 무릅쓰면 하나님께 상 받겠지’ 하면서 풀무불에 들어갔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는 그들에게 닥친 이 고난이 고난으로 느껴지기보다, 하나님께로 나가는 즐거운 길이었습니다.

18절에서 이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그 고난이 정말 고난으로 닥쳐오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 즐겁고, 하나님 곁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간다는 것이 행복합니다.’

4.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상관없이,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서 새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은 참된 시간이 아닙니다. 흘러온 시간이지만 흘러가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진실된 기다림으로 이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를 지켜보고 계셨듯이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친구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도, 바벨론의 등용되어 중책에 임명될 때도, 그들이 풀무불에 던져질 때도, 항상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고 계시면서, 결코 어떠한 다른 손길도 그들을 해칠 수 없도록 보호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눈길이, 그 손길이 그들을 보호하고 계셨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보호함 속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보호함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품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주실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하는 그런 기다림으로 새해를 살아갔으면 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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