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사랑에 빠진 사람, 사랑이 빠진 사람(요한복음 12:1-8)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02.07 15:52
▲ 「Jesus Anointed at Bethany」 in ‘the Basilica of the Annunciation in Nazareth’

1.

가끔 TV에서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별사람이 다 있구나. 짐승도 사람을 감동시키는구나’ 하는 생각들을 해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오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무언가 특이하고, 비범하게 삽니다. 우리의 삶에 도전을 주고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들을 합니다. 한편으로는 어처구니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의 중심에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자신의 깊은 내면의 중심에서 시키는 대로 하고자 하는 신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체면 문화라는 것이 있어서, 눈치도 보아야 하고, 다른 사람도 살펴야 합니다. ‘그래도 내가 누군데’ 하는 마음도 있고,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이런 생각들이 내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살아가는 사람들, 자기 주관을 가지고 참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모든 삶을 쏟아 붇는 사람들, 저는 이런 사람들이 성령의 사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 안에는 나의 두 모습이 있습니다.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내가 만든 나의 모습들이 있고,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내가 있습니다. 본래의 모습이 감추어지고 내가 만들어 낸 나의 모습이 더 강하게 나를 이끌어 가면, 나는 육신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본래의 모습이 나를 인도하고 나를 이끌어 갈 때, 나는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 안에서 싸우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며 탄식했습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본질을 찾아가고, 어떻게 하면 나를 둘러 덮은 껍질을 벗어가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과제입니다.

2.

흔히 ‘저 사람 눈에 콩깍지가 끼었다’는 말을 합니다. 남녀가 연애하고 결혼할 때 그런 말 많이 하지요. 옆에서 보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단점도 보이고 서툰 것도 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들은 그것을 보지 못해요. 오직 하나만 보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상대의 좋은 점만 보입니다. 옆에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막무가내입니다.

이게 사랑이 가지는 힘입니다. 사랑으로 보니까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단점도 장점으로 보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잖아요. 눈꺼풀에 콩깍지가 끼이면 보여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단점이 보이는데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그 단점을 품어내고 포용해 낼 충만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보기 때문에, 단점이 단점이 아니게 됩니다. 내가 사랑으로 품어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사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의 콩깍지가 씌워져야 합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오는 사람들이 때로는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허탄한 콩깍지가 씌워져서 벗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른 사람들을 한 번 보세요. 다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어떻게 배와 그물을 버릴 수 있겠어요? 어떻게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줄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의 십자가만 따라갈 수 있습니까? 주님에게 사랑의 콩깍지가 끼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사의 중심에 있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디딤돌을 놓아 온 것입니다.

3.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사람도 그런 사랑에 푹 빠진 사람입니다. 주님이 유월절이 되기 전에 베다니에 들르셨습니다. 그곳은 나사로와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가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더구나 죽은 나사로가 주님으로부터 다시 살리심을 받은 후에 그곳을 방문했으니 주님을 향한 접대가 얼마나 극진했을까를 상상하고 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했다고 했습니다. 나사로는 주님의 곁을 떠날 줄 모르고 주님 곁에 앉아 있습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분주합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지극히 값비싼 향유,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리니, 향유 냄새가 온집에 가득합니다.

향유는 향유병에 담아 놓습니다. 아무리 귀하고 아름다운 향유라 해도 그 뚜껑을 열어 부어지지 않으면 향유 냄새를 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귀하게 모셔져 있는 향유단지는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모셔져만 있다면 아무 쓸데 없습니다. 마치 맛 잃은 소금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며 향유의 값어치에 집중합니다. 나드 향유는 아주 귀하고 값이 비싼 향유라고 합니다. 한 근 값이 한 사람의 일 년 노동의 가치와 맞먹는다고 합니다. 그 값지고 귀한 것을 주님의 발아래 부어드렸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향유의 값어치가 아닙니다. 닫힌 것을 열어 부었다는 데 있습니다. 마리아는 무슨 마음으로 향유를 들고 나왔을까요? ‘이 향유가 얼마나 비싼 건데...’ 하면서 들고 왔을까요? 아닙니다. ‘이 향유를 열어(!) 주님께 부어드려야지’ 하고 왔습니다. 마리아의 마음 속에는 ‘나의 것을 열어 드린다’는 마음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 그것이 시간이든 물질이든 재능이든, 향유단지에 뚜껑을 꼭 닫아두는 한, 그것은 아무 쓸모없다는 것일 뿐입니다. 뚜껑을 열고 쏟아 부어질 때 비로소 향기를 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같이 우리의 것을 주님께 부어 드려야 우리의 삶이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부어드린 향유 냄새는 나드 냄새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냄새요, 복음의 냄새요, 사랑의 냄새요, 구원의 냄새인 것입니다. 진한 향기가 되어 온 세상에 퍼진 것입니다.

값진 것이어야만 향기가 날까요? 아닙니다. 부어 드리기만 하면 향기가 납니다. 주님 또한 우리가 들고나온 향유의 값어치를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눈에 씌워진 사랑의 콩깍지를 보고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이 하나님을 사랑으로 덮여서, 내 안에서 나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법만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이 그저 사랑스럽게 보고 계실 것입니다.

4.

그런데 그런 마리아의 모습을 보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지 않고 왜 허비하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정확한 판단이요, 올바른 선택입니다. 그러나…

여기 주님 앞에서 우리는 두 사람을 만납니다. 하나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사랑이 빠진 사람입니다. 하나는 사랑에 눈이 멀어 어리석게 사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지혜롭게 사느라 사랑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하나는 세상이치는 몰라도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세상이치에 밝아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는 그 어리석음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그 지혜로움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기에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의 지혜로움을 알기에 스스로 서는 사람입니다. 하나는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붙들어 보려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포기할지언정 자기 자신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오늘 두 사람이 주님 앞에 섰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나의 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안다 하고, 성경도 알고 율법도 알고 도덕도 잘 아는, 그러나 사랑이 빠진 사람은 주님께 아무것도 드리지 못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만 두어라.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 곁에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하다.” 이런 큰일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시겠다 하셨는데, 그게 아니었나요?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임재에 대한 신학적인 규정이 아닙니다. 내 곁에 계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랑의 눈이 우리에게 있는지를 묻는 신앙의 물음입니다. ‘너희들이 사랑의 눈으로 나를 발견하지 못하면, 너희 곁에 나는 없는 것과 같다. 너희 눈에는 그저 너희 지혜대로 판단하고 너희 의지대로 선택할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에 사랑이 제대로 씌워져 있다면, 그때 비로소 내가 너희 곁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5.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이 개를 키웁니다. 개를 얼마나 예뻐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개가 병이 들어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수백만 원이 넘게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개에게 들인 수술비용이 아깝지 않더래요. 참 이상하지요.

저는 처음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주변에 얼마나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고, 홀로 사는 노인들도 많은데, 그런 사람 구제해 주지, 그깟 한낱 짐승에게 그런 많은 돈을 들이다니?’

그런데 곰곰이 또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나는 그 돈이 아깝게 느껴지고 그 목사님은 전혀 하나도 아까워하지 않을까?’ 사랑의 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그 차이입니다.

저에게는 동물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동물을 품어주고 아껴주고 사랑하는 마음이 저에게는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부족한 곳을 소위 ‘이성적인 판단’이 자리 잡아 버렸습니다. 올바른 판단, 냉정한 선택이라는 이름을 빌어, ‘사랑 없음’이 작용했던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판단과 선택이 자리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는 곳에는 그저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는 ‘신적인 것’이 지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다.’ 이것은 사랑 없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하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생명까지 주어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판단하고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고 인간은 존엄하고 동물은 하찮다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소위 존엄한 인간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고 선택하시는 분이었다면, 과연 우리들 중 선택받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사람이 누구일까요?

그런데도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제발 내 사랑을 받아라’ 하고 오히려 간청하시는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힘입고 살아가는 행복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들도 그런 하나님의 사랑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사랑으로요. 사랑의 꺼풀이 우리에게 씌워지면, 그 꺼풀을 기꺼이 뒤집어쓰게 되면, 그렇게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되면, ‘인간적인 것’을 벗어나 ‘신적인 것’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힘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6.

우리 생명교회 모든 교우들이 눈꺼풀에 사랑의 콩깍지가 씌워져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만 보이고, 주님의 은혜만 생각하고, 주님의 십자가만 생각하며 주님께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에게 사랑에 빠져 자신의 모든 것을 깨뜨려 부어 드린 마리아와 같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에 푹 빠져 오직 사랑하는 대상만 보이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의 힘은 위대합니다.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내가 하는 일이 힘들고 고통이 와도 사랑하면 기쁨이 넘칩니다. 아무리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일 년 내내 이 사랑에 빠져 주님을 섬기고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