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그 가운데서 으뜸은사랑, 그 완전함에 대하여(고린도전서 13:1~13)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3.02.21 21:54

사랑, 어쩌면 가장 진부한 언어가 되어버린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그것이 없으면 우리의 삶과 신앙이 아무런 의미가 있을 수 없으니, 우리는 그 의미를 다시 캐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익숙한 본문말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찬가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그 사랑의 의미를 몇 마디 말로 풀어 설명하는 것으로 온전히 헤아릴 수 있을지 다소 난감하지만, 문장으로 기록된 말이니 역시 우선 말로 풀어 그 뜻을 헤아릴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말씀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내용으로 음미해도 충분한 의미를 지니지만,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이 그렇듯 역시 특정한 맥락을 갖고 있습니다. 말 많고 탈 많은 고린도교회의 사정입니다.

무역도시 고린도에 위치한 교회는 그 도시의 분위기를 일정 정도 반영하고 있었고 그 구성원의 측면에서도 상당한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성만찬의 오용을 지적하는 대목(11:17~21)을 보면 가난한 사람들과 유력한 사람들이 갈등하는 양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다수는 사회적 지위가 높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1:26) 이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기 시작한 이들 가운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의 은사를 자랑하는 사태입니다. 사회적으로 자랑거리가 빈약하였던 이들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은사를 누리면서 그것을 서로 자랑하게 되는 기이한 현상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바로 앞서는 12장은 그 은사의 다양성을 확인해주고 있으며 하나의 몸으로서 교회의 이상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본문말씀은 은사가 오용되는 현실 가운데서 어떻게 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지를 일깨우는 말씀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을 깊이 헤아리면 그 자체로 은사의 오용 사태가 어떤 것이었는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크게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다른 행위와 비교하여 사랑의 빼어남을(1~3절), 두 번째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부정적 어법으로(4~7절), 세 번째 다시 처음 언급한 은사들과 대비하여 사랑의 영속성(8~13절)을 역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사랑 없는 말의 무용성, 사랑 없는 은사의 무용성을 말합니다. 말 잘하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공동체(1:20, 2:5)에서 말을 거는 상대에 대한 신뢰와 사랑 없는 말은 빈 말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천사의 말이란 그 말이 정말 달콤하게 들린다는 것일 수도 있으며, 또한 일상적인 말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언어현상 곧 방언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상대에게 건네는 아름다운 말이든, 또는 은사의 징표로서 행하는 방언이든 그것이 사랑을 밑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무용하다는 것입니다.

“예언하는 능력을 … 모든 비밀과 지식을 … 산을 옮기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예언을 하거나 사물의 이치를 헤아리는 깊은 지식을 갖고 있거나, 그야말로 산을 옮길 만큼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믿음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역시 사랑이 밑받침이 되지 않는다면 소용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모든 놀라운 은사에 따른 놀라운 능력도 사랑을 이루는 데 소용되지 않는다면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심지어 내가 가진 모든 소유를 남을 위해 내놓고, 내 몸마저 내놓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없다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정의로운 행동마저도, 종교적으로 가장 숭고한 것으로 간주되는 희생마저도 그 밑바탕에 사랑이 없다면 소용없다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선을 행하면서 늘 가지기 마련인 일말의 자기과시적 동기마저 완전히 부정합니다. 재물을 나누는 것뿐 아니라 숭고한 자기희생마저도 그렇습니다. 철학자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금욕주의마저 권력의 원천이 되는 현실을 꼬집었지만, 바울은 그보다 훨씬 앞서서 그 위험성을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모든 은사에 앞서는 사랑의 궁극적 경지를 말하는 이 말씀은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그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 반문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반문하는 이들을 향하여 본문말씀은 선포합니다.

▲ 사랑은 자기 것을 내려놓고 상대방을 생각하는 것이다. ⓒGetty Image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13:4~7)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조목조목 새길 수도 있지만,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과제로 맡기겠습니다. 다만 그 요체를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참아줄 줄 아는 사람,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붙잡아줄 줄 아는 사람을 추켜세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코 모든 가치판단을 중지하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를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불의를 넘어 진리를 이루는 데 어떠한 태도로 접근해야 할지 숙고하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말씀은 사랑의 영속성을 강조합니다. 모든 은사가 무가치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 은사들은 한시적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 사랑만큼 영속성을 지니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집니다. …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3:8,13)

본문말씀은 이를 말하면서 이해를 돕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3:12)

지금 희미하게 느껴지겠지만, 장차 환히 보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거울을 통해 보듯 희미하지만 장차 직접 마주하듯이 명확하게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거울 속에서 영상을 희미하게 본다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유리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고대의 청동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을 말합니다. 청동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인식하던 것을 마침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처럼 뚜렷하게 인식하게 되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완전한 사랑의 실체를 실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 사랑의 여정 가운데 있다면 불안해할 것 없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이어지는 14장 말씀 첫 머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을 추구하십시오.”(14:1) 사랑을 삶의 목적으로 추구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여러 사람, 여러 분파들이 서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만을 진리로 내세우며 다투고 있는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선포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새삼 환기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사랑으로서만 온전히 체험되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말하며, 진리에 대한 인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 온전한 진리에 대한 인식은 사랑으로써만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더불어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밑바탕이자 궁극적 목적이 사랑이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자기가 경험한 것, 그래서 자기에게 굳어진 의식과 삶의 방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알지만, 사랑은 그것을 넘어서게 해 준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믿음을 갖고 구원을 갈망하며 더 나은 세계를 소망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새삼 일깨워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 때문이라는 진실입니다. 나의 삶을 온전히 의미있게 만드는 그 삶의 진실, 그것은 곧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도 부정할 수 없었듯이, 우리는 아직 온전히 그 실체를 실감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상대를 인정하고 그 상대에게 나를 내맡겨도 좋을 그 사랑을 추구하는 삶의 여정은, 그 여정 자체로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실체를 아직 온전히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사랑이 아닌 것을 분별할 능력은 지니고 있습니다. 그 분별력을 통해 우리는 사랑을 이루는 삶의 윤곽을 그릴 수 있고, 그 삶을 지향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인권’을 반대하는 기관이 ‘인권센터’를 수탁하게 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 대전에 가서 강연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차별을 정당화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반문하며 차별 없는 세계를 향한 복음의 진실을 함께 생각하는 자리였습니다. 복음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삶을 지향하는 인권을 부정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사랑과는 거리가 먼 일입니다. 그것은 교리적 독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를 더는 몇 마디 말로 설명하고자 애쓰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 의미를 두고두고 깊이깊이 새기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깊이 새기며, 그 뜻을 깨달아 이루는 가운데 진정한 기쁨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