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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수 8:18-23 고후 6:11-18 막 12:12-25)사순절 셋째 주일/청년주일(3월12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03.10 14:34

1. 미움받을 용기?

플라톤 철학을 전공한 철학자이자 20여 년간 아들러 심리학을 연구한 기시미 이치로와 프리랜서 작가인 고가 후미타케가 함께 쓴 『미움받을 용기』(인플루엔셜, 2014)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때 베스트셀러였습니다. 이 책은 알프레트 아들러의 심리학에 기반한 철학자와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한 청년이 인간관계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다섯 밤의 이야기입니다.

아들러는 세계 3대 심리학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목적론’과 ‘열등감’ 개념으로 유명합니다. 다른 두 사람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크문트 프로이트와 집단무의식, 원형, 페르소나, 콤플렉스, 음영, 아니마, 아니무스 등으로 유명한 구스타프 칼 융입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결정론적인 존재’로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쁘고 슬프고 화가 나는 이유는 그 내면에 무엇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면적인 원인, 곧 무의식을 다루지 않으면 의식적 환경을 바꿔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융은 프로이트의 인간 개인적 무의식을 인류 전체의 ‘집단무의식’으로 확장하여 인류 정신의 원형을 분석합니다).

그러나 아들러는 이런 프로이트의 결정론과 달리 목적론을 중심으로 인간의 심리를 분석합니다. 이 책도 이러한 목적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쉽게 말하면, 어떤 원인에 의해 어떤 상태에 이르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원인에 집중하지 말고, 현재 상태와 해결책, 곧 목적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현재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크고 작은 갈등, 그로 인한 상처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오늘 우리 현대인들에게 많은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제목인 조금 독특하죠?

이 책은 다섯 장의 밤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대화 주제가 있습니다. 3장이 되는 세 번째 밤은 ‘타인의 과제를 버리라’인데, 여기서 철학자는 타인의 인정을 바라고 거기에서 만족감을 찾는 것은 ‘상벌 교육’의 영향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희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곧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인정욕구를 부정하고,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철학자는 타인의 평가와 인정을 두려워하지 말고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기발하죠? 추천사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남의 이목에 신경 쓰느라 현재 자신의 행복을 놓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내가 아무리 잘 보이려고 애써도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니,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 누구도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나만큼 오래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남들 이목 때문에 내 삶을 희생하는 바보 같은 짓이 어디 있느냐?’라는 저자의 주장은 일상의 인간관계에서뿐 아니라, 페이스북의 ‘좋아요’나 트위터의 ‘RT(리트윗)’를 죽어라 누르며 ‘싸구려 인정’에 목매어 사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귀담아들을 만하다.”

왜냐하면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밤은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입니다. 철학자는 우주에 만일 나 혼자 남아 있는 상황에 대해 가정합니다. 그렇다면 아무런 고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모든 가치는 객관적으로 판단되는 게 아니라, 주관적으로 판단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치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인간관계가 없다면 일반적으로 가치 있어 보이는 것들, 다이아몬드나 돈은 그저 돌멩이나 종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 열등감

특히 인간관계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의 특징은 ‘열등감’입니다.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 개념입니다. 사람들이 명품이나 사치품을 걸치는 것은 열등감의 발로입니다. 열등감은 보이는 물질적인 요소들을 통해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열등감과 또 열등감의 시작인 타인의 시선과 같은 것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이 목표만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철학자는 주장합니다.

이제 계속되는 사순절기에 세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적대자들을 소개합니다. 이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오늘은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 또한 바리새인과 헤롯당, 그리고 사두개인을 예수님의 적대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에 의하면, 이런 자들과는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여호수아 말씀에 의하면, 이렇게 함께 멍에를 멜 수 없는 적대자들은 아이성 전투처럼 모두 쳐 죽여서 한 사람도 남거나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결국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고 살라!”라는 말입니다.

조금 비약적이긴 하나, 세상에는 이렇게 나를 미워하는 적대자들은 존재하고, 또 그들에게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 나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참된 신앙인이라고 해서 모두 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적대자는 나도 미워하고 관계를 끊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사탄이 우리를 싫어하는 것이 당연하지, 우리를 좋아하고 기뻐하면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먼저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2. 바리새인과 헤롯당, 그리고 사두개인의 간계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과 함께 논쟁합니다. 이 논쟁 끝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그 무리는 예수님을 해코지하려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서로 적대적인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람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막 12:12-14a)

헤롯당은 ‘헤롯 왕조의 추종자들’입니다. 이들은 헤롯 왕조를 지지하고 로마의 통치에 호의적인 집단입니다. 이들은 당시의 헤롯 정권이 제거되고 로마에서 해방되는 메시아 왕국이 오기를 고대하던 바리새인들과는 반대 견해를 취하였고, 오히려 로마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사두개인들과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반대하고 몰아내는 일에 있어서는 바리새인들과 힘을 합쳤습니다. 악은 선을 공격할 때 합력하여 악을 이룹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로마 문화, 곧 이방 문화인 헬레니즘 문화로 이스라엘의 고유문화와 신앙을 잃을 것을 우려하여 오경(토라 또는 율법)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준수하는데 철저함을 보이는 이들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은 유대교 신학을 계승하는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이들은 천사 등의 영적인 존재를 받아들이고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모세 오경에 천사와 부활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석하여 영적인 존재와 부활을 믿지 않는 근본주의자들인 사두개인들과는 대립하였습니다.

자, 이렇게 헤롯당은 친(親)로마적이고 보수적인 기득권자들이고, 이에 반해 바리새인들은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반(反)로마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입니다. 또한 헤롯당은 매우 정치적인 집단이었지만 바리새인은 매우 종교적인 집단이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정치적, 아니 종교적으로 보아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별로 친하게 지낼만한 이들이 아닙니다. 모르긴 해도 평소에 바리새인들은 헤롯당 사람들은 세속적이라고 무시했을 것이며, 거꾸로 헤롯당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을 꽉 막힌 사람들이라고 무시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는 공모를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종교적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적인 속성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헤롯당과 이렇게 위험한 일을 의논할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와 정치,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현실에서는 놀랍게도 잘 어울립니다. 콘스탄틴 황제 이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된 후, 종교적인 권력자인 교황과 세속적 지배자인 황제가 사이좋게 세상을 지배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칭 보수적이고 복음적이라고 하는 분들이 정치적인 행동을 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진보적인 사람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무튼 이들이 합심하여 예수님께 다가와 말을 건넵니다. 먼저 예수님을 칭찬하죠? 그리고 교묘한 질문을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 헤롯당과 바리새인, 그리고 예수님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 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막 12:14b-17)

만약 세금을 바치라 하면 바리새인이 들고일어날 것입니다. 또 만약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헤롯당이 반대하고 나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은 두 무리의 질문을 다 만족시킨 것이자 동시에 두 무리를 다 부끄럽게 만든 대답입니다. 헤롯당 너희들은 가이사에게 충성하며 세금도 내고 그렇게 민족의 배반자로 살고, 바리새인 너희들은 너희들 행동과 달리, 너희 말대로 하나님께 충성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결국 말과 행동이 다르고, 가식적인 두 무리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예수님이 이겼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대제사장 무리가 좀 더 수준 있는 사두개인을 보냅니다. 말씀을 볼까요?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막 12:18-23)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의 올무입니다. 말장난이죠? 모세의 율법을 극단적으로 적용하여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막 12:24-25)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면서 성경을 그렇게 극단적으로 해석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모든 적대자의 궤변을 물리치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고 섬긴 것이 아닙니다. 헤롯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을 때, 당시 아기 예수님 또래 아이들을 다 죽였고, 또 믿음이 좋다고 하는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헤롯당,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또 어떤가요!

사실 하나님은 사랑으로 모든 이를 품으시지만, 우리 인간은 에덴 동산의 원죄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싫어합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듯이!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믿지 않는 자와 더 이상 함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3.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 멍에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후 6:11-14a)

멍에는 쟁기나 수레를 끌기 위해(삼상 6:7) 소의 목에 가로 얹는 막대를 말합니다(민 19:2). 대개 멍에는 두 마리의 동물이 한 짝이 되어 끌게 하여서 ‘한 겨리’와 같은 말로 쓰였습니다(왕상 19:19, 21; 욥 1:3; 42:12). 그렇다면 이 말은 “불의와 죄에 무딘 사람들과 함께 하지 말라, 같은 소망을 품지 말라”라는 뜻이 됩니다. 조금 더 쉽게 말씀드리면, 믿지 않는 자들 속에 있는 죄성과 불의함에 물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과 교제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가진 죄성과 불의함이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믿음의 사람들 안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가령 예를 들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 6:14b-18)

여기 나오는 벨리알은 유대교 외경에 나오는 말로, ‘부도덕’이나 ‘가치 없음’과 같은 악에 성격을 부여하여 사용하는 개념적인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가치 없는 자’, ‘건달’, ‘야비한 자’, ‘사악한 자’라는 뜻이 있는데, 나중에 실체화되어 악마 그 자체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벨리알을 사탄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바울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또한 빛의 자녀들이며 의인입니다. 그런데 어찌 불법과 어둠과 함께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이러한 어둠에 속한 자들과 부정한 자들은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말씀이 그렇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4.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넘겨주리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넘겨주리라. 여호수아가 그의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그 성읍을 가리키니, 그의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그들의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으로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 아이 사람이 뒤를 돌아본즉, 그 성읍에 연기가 하늘에 닿은 것이 보이니, 이 길로도 저 길로도 도망할 수 없이 되었고 광야로 도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추격하던 자에게로 돌아섰더라.” (수 8:18-20)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여리고 성을 정복한 후, 계속해서 아이성을 쳤습니다. 그러나 아간의 범죄 때문에 아이성 첫 번째 전투에서 패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인 두 번째 전투에서는 승리하였고 결국 아이성을 정복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전투에서 패배한 원인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아이 성 추정지, 엣텔의 험한 산세(해발 800m이며 산악지대 요새)와 아이 성 유적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수 7:11-13)

여기서 ‘바친 물건’이란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물건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여리고 전쟁에서 얻은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수 6:16-19). 하나님께 바치되, 불에 타는 것은 다 태우고, 불에 타지 않는 것들은 여호와의 곳간에 들이는 방식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쳐야 할 물건을 누군가 취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그 진멸할 것을 찾아서 그들 중에서 제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로 아간이죠? 이렇게 믿음이 없는 자, 아간을 정죄하고 나서야 아이성 전투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 복병이 성읍을 점령함과 성읍에 연기가 오름을 보고 다시 돌이켜 아이 사람들을 쳐 죽이고 복병도 성읍에서 나와 그들을 치매, 그들이 이스라엘 중간에 든지라. 어떤 사람들은 이쪽에서 어떤 사람들은 저쪽에서 쳐 죽여서 한 사람도 남거나 도망하지 못 하게 하였고 아이 왕을 사로잡아 여호수아 앞으로 끌어왔더라.”(수 8:21-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처럼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고, 믿음의 적대자들의 선한 싸움을 싸우시기 바랍니다. 그 적대자들은 교회 밖, 그리고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그리고 내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이 그렇지 않습니까? 따라서 늘 깨어 근심하며 올바른 신앙생활, 제대로 된 믿음 생활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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