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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통일을 둘러싼 교회의 분열교회의 일치와 민족의 통일문제 (2)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 승인 2023.03.21 01:54
▲ 통일문제가 한국교회 분열의 새로운 의제가 되어 좁힐 수 없는 간격을 만들었다. ⓒSBS뉴스 화면 갈무리

한민족의 통일문제는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한국교회도 양극화시켰다. 북한을 보는 시각과 국가보안법 개폐문제에서, 한반도 주변 이해당사국들, 특히 미국을 보는 태도와 이라크 파병문제에서 한국교회는 현저한 시각의 차이와 분열을 보여주었다. 지난 2003년 1월 11일과 19일에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일부 한국 개신교 지도자들의 숭미에 가까운 친미주의적 반북집회가 수만 명이 동원되어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 기도회’의 이름으로 열리는가 하면,(1) 같은 공간에서 미국 정부의 대북정책과 대 이라크 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집회가 개신교 이름으로 진행된 것은 이런 양극화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또 삼일절을 맞아 한기총과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금식기도회’를 여의도에서 개최, 약 1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미군철수반대’, ‘북한의 핵개발 반대’, ‘북한 인권개선’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가 주최하고 한국종교인평화회의가 주관한 평화와 통일을 위한 3.1 민족대회가 같은 기간에 서울에서 열렸다. ‘6.15 남북공동성명’의 정신 위에서 종교인들이 앞장서서 민족의 화해와 단합,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한반도에 고조되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이 대회에 북측은 4대 종단대표 105명을 파송했고, 남측에서는 7대 종단 대표 300명이 참석했는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교회협) 대표들이 공식적으로 참여했으며 분단 이후 최초로 남측 예배에 북측 교회 대표단들이 참석하는 일이 있었다.(2)

그러나 광주민중항쟁 이후, 한국교회 통일운동은 전적으로 교회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3) 보수적인 복음주의 진영으로부터는 거의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교회협은 이미 1988년 이른바 ‘88선언’을 통해 정의와 평화를 위한 한국교회의 선교적 전통을 확인하고, 민족분단의 현실을 침묵으로 정당화한 죄와 체제가 강요한 이념을 우상화한 죄, 상호증오에 대한 죄를 고백했다.

또한 통일은 민족이나 국가의 공동선과 이익을 실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어야 하며, 통일논의 과정에서 민중의 참여가 우선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천명했다. 이 원칙 위에서 교회협은 당국에게 분단상처의 치유, 분단극복을 위한 민중참여의 실질적인 증진, 민족적 대단결, 긴장완화와 평화증진, 민족자주성의 실현을 제안했고,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한국교회가 해야 할 구체적 과제를 설정했다.(4)

‘88선언’ 이후, 한반도는 국내외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동서독의 통일과 냉전체제의 해체, 남북한의 UN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1992년), 문민정부의 집권 등은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한 의식의 변화와 평화통일의 가능성을 한결 드높였다. 교회 역시 해외에서 꾸준히 남북의 만남을 지속시켰고,(5) 국내에서는 ‘남북 인간 띠 잇기 대회’(1993년), ‘평화통일 기원대회’(1994년) 등을 통해 통일운동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김일성 주석의 사망(1994년) 이후, 급격하게 냉각된 남북관계와 문민정부의 보수화, 이른바 미국 중심의 신세계질서의 강화는 통일논의를 크게 후퇴시켰다. 남북관계는 대결과 불신으로 일관하면서, 상호적대적인 공존 상태를 유지해왔다. 북한의 심각한 식량난과 남한의 경제위기는 한편으로 통일운동을 위축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통일운동을 민족애와 인권차원으로 확대시키기도 했다. 바로 이 시기에 일부 보수적인 교파와 평신도 그룹에서 통일운동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이 부각되었고, 한기총을 중심으로한 대북 교류가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보수적 복음주의 교회들은 통일운동과 북한교회와의 교류에 진보적인 교회들과 함께 참여했다. 통일관련 위원회들이 보수교단 안에서도 조직되었다. 보수와 진보를 넘어 통일문제에서 전향적인 일치를 보여준 사건은 1993년 4월에 형성된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나눔운동’이었다.(6) 남북나눔운동은 보수와 진보를 넘어선 범교파적인 대북지원활동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통일운동의 정치적 차원이 뒷전으로 물러났을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공세적 사회주의권 선교정책과 북한에 대한 우월의식에 기초한 자선적 태도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남북의 심각한 경제위기는 교회협으로 하여금 통일운동을 새롭게 전망하도록 요청했다. 국토와 체제의 통합을 통일의 완성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인간성과 새로운 공동체의 실현과정으로 통일을 본 것이다. 증오와 대결이 아니라, 상호존중과 공생으로, 정복주의와 승리주의에서 공존과 공영으로 나아가는 공동체의 실현과정이 교회협이 바란 통일이었다.

교회협은 통일논의의 과정이 민족의 공동체성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전개되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동시에 평화협정의 체결과 적극적인 군비감축을 통한 제도적인 평화정착을 제안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북한의 체제와 경제적 안정이 평화유지를 위해 중요하며, 그런 의미에서 북한이 심각한 식량난을 극복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외교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울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2년 후,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2000년 6월) 남북은 합의서를 채택했다. 그 후 남북관계의 발전은 숨 돌릴 사이도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이산가족의 상봉, 경의선 철도복원사업의 시작, 비전향장기수의 북한 송환, 군 고위급 회담 등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사건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은 답보적인 상황에 들어가게 되었다.

통일논의 자체도 활발해지지 못하고, 북한지원과 연계된 북한 방문, 혹은 인도적 대북 지원, 탈북자 정착협조 등에 머물게 된 것은 남북정상회담 등 ‘햇볕정책’으로 대변되는 정부차원에서의 통일논의가 교회의 통일논의보다 훨씬 앞서가면서 생겨난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또한 민화협 등 공식적으로 민간부문의 남북교류를 전담하는 기구가 생겨나면서 교회를 통한 남북교류가 큰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된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7)

그런데 이런 빠른 변화가 당시 국민의 정부와 보수 언론, 보수 정치인들 사이의 갈등 양상으로 번졌고, 대북지원을 둘러싸고 ‘전략적 상호주의’와 ‘민족애적 지원’이 서로 대립하기도 했다. 교회도 분열되었다.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이 자칫 군부를 강화하고, 북한체제를 오히려 유지하는데 기여할 것이라며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보수적 입장과 인도주의적 지원에는 조건이 없어야 한다는 진보적 입장 사이의 갈등이 그것이었다.

나눔을 통한 인도주의적 북한돕기에서 어느 정도의 연대와 일치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한국교회는 통일문제에 있어서 여전히 분열되어 있다. 한반도가 통일되어야 한다는 당위에서는 비록 일치를 보일지 모르지만, 어떤 형식의 통일, 어떤 과정을 거친 통일이냐에 대한 세부적인 항목에서는 물론, 북한을 보는 시각,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에 대한 입장에서도 일치점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얼마 전 교회협과 한기총의 기구적 통합을 위한 논의가 교단장 협의회의 적극적인 개입과 한기총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시도된 적이 있지만, 결국 일치와 정체성에 대한 논란 때문에 유보된 것으로 알려진 것도, 현안에서만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형성된 정체성이 기구적 연합으로서의 일치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미주

(1) 박득훈, 한국교회의 걸림돌, 숭미주의,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편), 팍스 로마나, 팍스 아메리카나, 팔스 크리스티아나,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2003, 103-104; 김진호, 한국기독교, 지금이 성찰의 기회다, 같은 책, 135; 정종훈, 한반도의 상황과 한국교회의 과제, 한민족평화선교연구소, 한반도와 평화, 한민족평화선교연구소 자료집 2003-1, 43.
(2) 황홍렬, 한반도 전쟁 위기 상황에서 평화를 향한 한국교회의 과제, 한민족평화선교연구소, 한반도와 평화, 한민족평화선교연구소 자료집 2003-1, 74-75.
(3) 졸고, 평화통일을 위한 종교(기독교)와 신학의 과제, 한신대학교 개교60주년 기획위원회 편, 한반도 통일논의의 쟁점과 과제, 한신대학교출판부, 2001, 399-412 참조; 이상규, 해방 후 한국교회의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4호, 1995, 65-103 참조.
(4) 서광선, 한국기독교 정치신학의 전개,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6, 158-174 참조.
(5) 제2차 글리온 남북 교회지도자 회의가 1988년에, 3차 글리온 회의는 1990년, 4차는 1995년에 각각 열렸다.
(6) 조은식, 통일을 향한 남북교회 교류활성화 방안, 한민족평화선교연구소, 한반도와 평화, 한민족평화선교연구소 자료집 2003-1, 125.
(7)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2002년 한국교회 정황,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2003, 59.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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