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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용은 하셨지만 행하시지 않은 일이것까지 허용하라(누가복음 22:49-51)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3.03.26 05:12
▲ Fra Angelico, 「The Capture of Christ」 (c.1440) ⓒWikipedia
49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들어가는 말

사순절 다섯째 주일입니다. 아무래도 부활절까지는 복음서의 말씀,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된 말씀을 전해드리는 편이 좋을 듯해서 오늘은 누가복음의 말씀을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는 순간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누가복음의 경우에는 겟세마네라는 구체적인 장소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감람산에 가셨다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체포 장면은 공관복음서에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누가복음은 마태, 마가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 저희는 이 차이 속에서 누가복음이 어떤 예수님을 전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검을 준비하라

누가복음이 가장 큰 차이를 만드는 지점은 22장 35-38절의 선교 파송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이 본문은 마태와 마가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저희가 그냥 읽어도 그 내용을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35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38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중 제자들을 파송하셨던 때에 대해 질문하십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채 선교 여행을 했던 때에 어려움이 있었는지를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전대와 배낭을 준비하고 검(마카이라, μάχαιρα)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검이 없는 이들은 겉옷을 팔아서까지 검을 준비하라 하십니다.

이와 함께 이사야 53장 12절을 인용하여 자신이 불법자(아노모스, ἄνομος)의 동류로 여김을 받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소지하고 있던 검 두 자루를 예수님 앞에 내밉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히카논 에스틴, Ἱκανόν ἐστιν)”고 대답하십니다.

사실 검을 준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로마의 폭력에 비폭력으로 맞서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검을 준비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젤롯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신 것은 분명 아니라는 생각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학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검’은 물질적인 의미의 검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할 방안을 마련하라는 의미라고 말합니다. 다만 제자들은 이를 잘못 이해했고, 그 결과가 실제 검을 예수님 앞에 내놓았다는 해석입니다.

결국 누가복음도 제자들의 몰이해에 관해 말하고 있으며, 어떤 학자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그것으로 충분하다”라는 말이 제자들을 향한 실망의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만 됐다”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들을 보고 있으면 뭔가 시원하다는 느낌을 받질 못합니다. 예수님은 비폭력주의자라는 전제를 놓고 해석을 시작하기 때문에 억지로 해석을 끼워맞추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됩니다. 이런 답답함의 이유는 오늘 본문 안에서 나타납니다.

도망치지 않은 제자들

누가복음의 본문이 공관복음서 안에서 큰 차이를 만들고 있는 지점은 제자들의 모습에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의 경우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입을 맞춘 다음, 예수님을 잡으러 온 이들이 예수님을 붙잡습니다.

그 후에 제자 중 한 명이 검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칩니다. 이는 공관복음은 아니지만 요한복음에서도 비슷한 느낌으로 상황이 전개됩니다. 요한복음의 경우 베드로가 말고라는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검으로 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상황이 약간 다르게 나타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입을 맞추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다가와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하고 여쭤봅니다. 여기에서는 왜 ‘칼’로 번역했는지 모르겠지만, 앞선 ‘검’과 같은 단어인 ‘마카이라’가 사용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들과는 다르게 제자들이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누가복음의 상황이 가장 적절해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모습을 볼 때까지 제자들이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복음서들에 나타난 상황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 질문한 이후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검으로 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것까지 참으라(에아테 헤오스 투투, Ἐᾶτε ἕως τούτου)”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어를 직역하면 “이것까지 허용하라”라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떨어진 귀를 치유해 주십니다.

앞선 35-38절의 검에 대해서 예수님의 비폭력을 강조한 해석들은 오늘 본문에서도 제자들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특히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은 했지만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먼저 검을 휘둘렀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의 행위는 예수님께서 원하신 행위가 아니었다고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 귀를 치유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은 상당히 논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의미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것까지 허용하라”라는 말씀이 누구를 향한 말씀인지가 불분명합니다.

과거에 이에 대해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이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라고 해석한 학자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종의 귀를 고쳐주는 행위를 허용하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을 다르게 해석하면 “여기까지 해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제자들을 향해서 “이제 칼을 내려놓아라”라고 하신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제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으로, “(내가 잡혀가는) 이것까지 허용하라”라는 의미였다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을 비폭력주의자라고 생각하면서 말씀을 읽었을 때, 아마도 이런 해석이 제일 무난한 해석일 듯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뜻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이들로 그려지게 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 있어서 이런 해석이 올바른가의 의문이 들게 됩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신 이후에 제자들이 모두 도망쳤다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는 그런 이야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도망치지 않습니다.

만약 누가복음이 제자들의 몰이해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면, 다른 공관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던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26:56; 막14:50)”라는 구절을 삭제할 이유가 없습니다. 누가복음은 이 구절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분명 제자들의 잘못을 핵심으로 부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 보호를 위한 검

예수님께서는 분명 제자들을 향해 검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의 검은 자신의 몸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보호가 사라진 세상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검을 준비하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과도한 무력의 소유를 허락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내민 두 자루의 검을 보시고 “충분하다” 말씀하신 이유는 그것이 최소한의 무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향해 실망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들을 보호할 수단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려는 순간에 보호 수단인 검을 휘둘렀습니다.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서 또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를 휘둘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까지 허용하라” 하신 말씀은 누구를 향한 말씀이어도 상관없다고 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이들을 향한 말씀이건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건, 또는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한 말씀이건 의미는 갖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휘두른 검까지는 허용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자기 보호를 인정하십니다. 하지만 자신은 그들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십니다. 자기 보호를 위해 휘두른 검에 의해 상처받은 이를 치유하시고 자신은 검을 든 이들에게 순순히 잡혀가십니다.

검과 검의 대립 속에서 예수님은 치유를 행하십니다. 검과 검의 대립 속에서 홀로 검을 들지 않고 그들의 폭력에 대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제자들에게 자기 보호를 위한 수단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자신은 그러한 폭력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비폭력주의자로 해석했던 학자들의 글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이 전제로 인해서 조금은 억지스러운 해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제자들에게 최소한의 무력을 허용하셨지만, 자신은 그 길을 걷지 않으신 예수님의 모습은 오히려 폭력을 배제한 예수님의 모습을 극대화 시킵니다.

얼마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더 글로리’나 ‘모범택시’와 같은 드라마는 세상의 불합리한 악에 복수하는 내용입니다. 실제 검이 되었건 다른 어떤 수단이 되었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이 불합리한 세상을 이겨낼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많은 부모가 아이를 키우면서 유치원 시절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태권도와 같은 운동을 시킵니다. 그 목적은 아마 대부분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억울하게 맞고 다니지는 말라는 목적입니다. 때리진 않더라도 맞지도 말라고 운동을 시킵니다. 저 역시도 그런 생각으로 아들에게 태권도를 배우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소한의 방어 수단을 갖춰도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는 점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폭력과 폭력이 대립하는 그 사이에서 치유로 대응하셨던 것입니다.

종의 떨어져 나간 귀처럼, 무엇인가를 빼앗기고 잃어버리고, 무엇인가가 결여되었을 때 그곳에 폭력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폭력으로 대항하기보다 치유로 대응하였을 때, 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벌어진다고 몸으로 보여주십니다.

불합리한 폭력이 횡행하는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서로를 향한 폭력이 극단으로 치닫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서로를 치유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셨으니, 허락하신 검을 휘두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치유의 삶을 따르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그때에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더욱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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