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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의 의미 3: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위에 있는 예루살렘(수 11:16-23; 갈 4:21-31; 막 13:14-27)부활절 셋째 주일(4월23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04.21 00:44

1. 부활신앙의 다른 이름 종말 신앙!

지난주 말씀에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는 부활 신앙도 어쩌면 종말 신앙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종말은 ‘세상의 끝’을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역설적으로 ‘지금-여기의 모순’을 직시하는 것이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가올 종말을 바라보며 지금, 여기를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끝에 오는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히려 기다려야 할 지금, 여기의 구원 사건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은 판타지가 아니라, ‘지금-여기’서 새로운 사건이 시작된다는 의미라고도 말씀드렸죠? 바로 이것이 진정한 부활 신앙, 혹은 종말 신앙의 의미입니다.

종말의 때에는 먼저 적 그리스도가 올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이 판을 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민족과 민족이, 나라와 나라가 대적합니다. 분쟁과 다툼이 끝이 없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지진과 기근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과 인간의 분열을 뜻합니다. 물론 이것은 재난의 시작, 종말의 시작일 뿐입니다. 총체적으로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오늘 세 본문 말씀은 부활 신앙의 의미를 종말 신앙과 연결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참된 부활 신앙은 이렇게 종말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말 신앙의 단계가 있습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그 단계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 단계로 구약 말씀을 보면, 종말 신앙은 악한 자들의 소멸을 뜻합니다. 구약 본문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땅 정복을 보여주는 것으로, 마침내 그 땅에 네피림(거인족)의 후손인 아낙 사람들을 멸절하고 전쟁이 그치는 심판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들을 완전히 멸하지는 못합니다. 불씨를 남겨둔 것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단계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악의 소멸을 역사의 끝으로 확장합니다. 바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때입니다. 일찍이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으로 이를 잘 정리해 주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로 역사의 끝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택하신 자들을 땅끝에서 땅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부활 신앙의 의미를 종말 신앙으로 연결하여 단계별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구약 말씀입니다.

2. 그들을 멸하려 하심이었더라!

“여호수아가 이같이 그 온 땅 곧 산지와 온 네겝과 고센 온 땅과 평지와 아라바와 이스라엘 산지와 평지를 점령하였으니, 곧 세일로 올라가는 할락 산에서부터 헤르본 산 아래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까지라. 그들의 왕들을 모두 잡아 쳐 죽였으며 여호수아가 그 모든 왕들과 싸운 지가 오랫동안이라. 기브온 주민 히위족속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이스라엘 자손이 싸워서 다 점령하였으니,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을 진멸하여 바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 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을 멸하려 하심이었더라.”(수 11:16-20)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 북부 지역을 정복함으로 가나안 땅 전체를 정복하게 됩니다. 이스라엘과 화친한 기브온 주민과 히위족속 외에는 다 싸워서 점령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가 완성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휘하신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 블레셋 다섯 성읍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들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들의 성읍들을 진멸하여 바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아낙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았더라.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수 11:21-23)

▲ 네피림과 아낙 자손인 골리앗

가나안 땅의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 아낙 사람들을 일부 남겨두고, 유다와 이스라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을 멸절합니다. 아낙 사람은 앞서 말씀드렸지만, 거인족 네피림의 후손입니다. 네피림 족속은 창세기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낳은 족속(창 6:1-4)인데, 이들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았기 때문에 가나안 땅의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두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열 명의 정탐꾼이 겁을 먹었던(“그들이 보기에 우리는 메뚜기 같았다”, 민 13:33) 족속입니다. 이들이 블레셋 다섯 성읍인 가사, 가드, 아스돗, 에그론, 아스글론에 거주했으나, 여호수아 때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기고 다 멸절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남은 블레셋의 아낙 자손이 나중에는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대표적인 예가 가드 사람 골리앗(삼상 17:4)입니다.

이렇게 종말 신앙의 시작은 악한 자들의 소멸을 뜻하지만,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역사의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알곡과 가라지 비유(마 13:24-30)’로 말씀하신 바 있죠? 따라서 두 번째 부활 신앙의 의미는 여기 있습니다. 곧 역사의 끝입니다. 서신서 말씀을 볼까요?

3. 위에 있는 예루살렘, 하나님의 도성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갈 4:21-24)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의 자유인’에서 ‘율법의 노예’로 다시 돌아가려는 것을 책망합니다. 율법과 복음의 대비입니다. 특히 율법주의자를 종의 자녀로, 복음을 받은 자를 자유의 자녀로 비유합니다. 여기서 종은 하갈을, 자유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뜻합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5-28)

물론 바울은 하갈을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율법으로 연결하고 사라를 ‘위에 있는 예루살렘’과 자유로 연결합니다.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물려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으로 설명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도성』(神國論, The City of God, De Civitate Dei)은 서양 사상과 신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마르틴 루터, 장 칼뱅을 비롯한 많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개신교 종교 개혁에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특히 세속 국가의 지배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여겨지는 매우 중요한 저술입니다.

하나님의 도성은 총 22권으로서 1-10권까지는 기독교에 대한 변증에 관련된 것이고, 그리고 11-22권까지는 두 도성에 관한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기원후 410년경, 로마제국이 알라리크(Alaric I)가 이끄는 고트족에 의해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어거스틴은 혼란과 회의를 느낍니다. 따라서 로마제국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어거스틴은 지상의 나라는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도성』을 기록하게 됩니다.

당시 로마의 멸망에 관해 ‘그리스도교 책임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야만족들의 침입과 약탈은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로마의 위기는 야만족의 침입 이전부터 있었다고 변론합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의 도덕적인 타락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교를 변증하고 또한 로마의 도덕적 타락을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 게르만 족의 이동과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과 ‘지상의 도성(civitas terrena)’, 곧 두 도성을 구별합니다. 이 땅에서 지상의 도성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보며 ‘현실 도피적인 신앙’과 또한 반대로 ‘현실 적응주의 신앙’ 모두를 배제하고 균형 잡힌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곧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에서의 행복한 결말에 대해서 집중하며 이 지상의 도성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상에서 철저히 나그네의 삶이요, 순례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시간과 영원의 관점에서 지상의 도성과 삶을 조명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의 말씀으로 보면, 지금 있는 예루살렘에 마음을 두지 말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빛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갈 4:29-31)

그러나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합니다. 지금 있는 예루살렘이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지금 있는 예루살렘, 곧 육체를 따라 난 여종과 그 아들인 율법에 매여있는 유대인들을 내쫓으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분명 바울은 이것을 비유(갈 4:24)라고 하였습니다. 여종과 하갈은 율법에 매여있는 유대인을 뜻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는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하갈과 이스마엘의 후손인 이슬람과의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바울의 비유는 하갈과 이스마엘, 곧 지금 있는 예루살렘은 오히려 율법주의 유대인을 뜻합니다. 그런데, 말씀이 왜곡되어 지구촌에 종교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기가 막힙니다.

▲ 십자군 전쟁과 원정로

4.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후손!

사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은 1,500여 년 가까이 다투어 왔지만, 이 기간에 다툼의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와 초기 이슬람에는 종교 간 화해와 관용, 포용의 정신이 있었다. 『예수, 노자를 만나다』(코나투스, 2006)와 『예수, 석가를 만나다』(코나투스, 2006)로 종교 간 대화와 상생을 모색하여 그 차이와 다름을 밝히고 평화와 공존 가능성을 모색하는 중국 길림사범대 교환 교수이자, 영성 수련공동체 ‘코리안 아쉬람’의 이명권 대표는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코나투스, 2008)이라는 책에서 “기독교와 이슬람 두 종교 신봉자들이 믿는 신은 실질적으로 같다.”라고 주장합니다.

▲ 이명권 대표의 종교간의 대화 관련 책 3권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이 예수의 신성 부정에 초점을 맞추고 예수를 격하시키는 경향이 있으나, 비정통적인 경전은 사뭇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슬람 경전인 꾸란 외의 이슬람 복음서를 보면, 예수가 금욕주의자이면서 예언자적인 스승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이슬람의 신비주의자이며 철학자인 이븐 아라비(Ibn Arabi)는 예수님을 ‘성자들의 봉인자’(The seal of Saints)라고 높였고, 무함마드 이후의 가장 위대한 이슬람교도라고 일컬어져 온 신학자로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 사상가 알 가잘리(Al-Ghazali)는 예수님을 엄격한 윤리적 가르침과 신비적 교훈을 제시하는 이로 설명하였습니다.

만약 이같이 자신의 종교 안에 다른 종교의 영적 스승을 무한한 존경과 헌신, 사랑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이들을 발굴하여 조명한다면 종교 간 공존을 도모할 수 있는 모범적인 사례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의 본질은 자기 비움이자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이명권 대표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종교는 자기 비움이며 나눔이고 공동체적 사귐이다.” 그렇습니다. 가령, 노자의 비움의 ‘허(虛)’와 석가의 비움의 ‘공(空)’의 사유 역시 자기 비움과 자기 부정의 사유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그리스어로 ‘비움’을 뜻하는 케노시스이며 이슬람에는 파나(fanā, 無)와 바카(baqā, 존재)가 같은 개념입니다. 곧, ‘자기 비움’이야말로 모든 종교가 만나는 지점입니다. 이러한 자기 비움의 예시에 관해 이명권 대표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꾸란의 중심에는 ‘라 일라하 일랄라(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가 있습니다. 절대자에 대한 복종이지요. 예수도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될 수만 있으면 이 쓴 잔을 내게서 거두어 달라’고 거듭 기도한 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절대적 복종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비움이 외적으로 나타날 때, 방랑설교자 예수가 창녀와 죄인들과 함께 밥상공동체를 열어나간 것이며, 무함마드가 자기 비움이라는 알라의 깊은 뜻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 기도와 자선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종교적 원체험’은 어떻게 변질하여 갔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명권 대표는 “교리적 문제보다는 신앙공동체 추종자들이 문제이다. 그들의 이해관계 등에 따른 자의적 해석이나 판단 때문에 애초의 정신이 변질하여 갔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제2의 예수와 무함마드로 신자들이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언급할 것은 이명권 대표가 침묵의 중요성에 관해서 한 말입니다.

“(모든 종교는) 신비주의, 그리고 침묵에서 다 만납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언어로 표현해낼 수 없는 저 너머의 세계가 있습니다. 분석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도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라고 했죠. 침묵에서 다 만납니다.”

또한 17개 이슬람 국가들을 순례하고 쓴 책, 『신의 정원에 핀 꽃들처럼: 신학자 현경이 이슬람 순례를 통해 얻은 99가지』(웅진지식하우스, 2011)에서 현경 교수는 “정작 이슬람에서 애정 결핍증이 많이 치유됐다.”라고 합니다. 개신교 진보신학계의 명문인 미국 뉴욕 유니언신학대학에서 아시아계로선 최초로 종신교수가 된 현경 교수는 달라이 라마가 주축이 된 종교 간 세계평화위원회 자문위원이기도 하고, 틱낫한 스님과도 친분이 두텁습니다. 기독교 신학자일 뿐 아니라 환경·평화운동가이기도 한 그는 때론 불교 명상 수행자가 되고, 샤머니즘의 무희가 되기도 할 만큼 종교 간 벽을 오히려 해방의 디딤돌 삼아 뛰어넘었습니다.

하지만 현경 교수조차도 본격적인 이슬람국가 순례에 나섰을 때는 주위에서 모두가 안전을 우려했습니다. 2001년 뉴욕에서 9·11 공격 이후 주요 방송들은 이슬람에 대해 일부다처제이며, 명예살인을 하고, 겉만 종교지 속은 테러리스트라고 떠들어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종교 간 벽을 줄넘기하듯 넘어온 그도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 현경 교수와 『신의 정원에 핀 꽃들처럼』 표지

그러나 현경 교수는 2006년 9월부터 2007년 8월 말까지 1년 동안 이슬람 17개국 순례를 떠났습니다. 그는 이슬람교도 여성 200여 명과 만나고 돌아와 5년의 집필 끝에 585쪽의 두꺼운 책을 펴냈습니다. 그 책이 바로 『신의 정원에 핀 꽃들처럼』입니다. 서구 사회가 그토록 타자화하는 이슬람 순례를 통해 현경 교수는 내면에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요? 이슬람에서 애정 결핍증이 많이 치유되어 이제 두려움이 은혜로 바뀐 그는 서구 사회의 심장부인 뉴욕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자로 오히려 이슬람교도 전사처럼 서구의 편견과 도그마에 맞서고 있습니다. 현경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서 핵무기를 가장 많이 가진 나라는 미국이고, 살아 있는 사람의 머리 위로 핵무기를 던진 유일한 나라도 미국인데, 자기들만이 핵무기를 가질 수 있고, 이슬람권은 아무런 도덕적 판단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매도하고 악마화하는 것에 대해 이슬람권 전체가 한을 가지고 있다. 상대를 타자화하고 악마화해 전쟁을 부추겨야 유지되고 성장하는 무기업체들로부터 우리가 잘 아는 미국의 주요 정치인들이 정치자금을 받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현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모질게 다루는 것에도 분노합니다. 현경 교수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짐승처럼 다루는 것에 대해서도 이슬람교도 모두가 자기들의 문제로 아픔을 느끼고 있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이슬람교도의 아픔에 공감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이슬람 제도에 관해서도 쉽게 설명해줍니다.

“터키(튀르키예)나 튀니지 같은 상당수 이슬람 국가가 법적으로 일부다처제를 금하고 있고, 일부다처제도 남편이 전쟁에서 죽어도 다른 남자의 첩이나 정부가 아닌 정식 부인이 돼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한 배려로부터 출발했던 것이다. … 코란(이슬람 경전)엔 여성들의 재산권이 보장돼 있다.”

자신의 할리페(‘세상에 온 이유’라는 뜻의 이슬람 용어)에 관해 현경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여성만이 아니라 남녀노소, 동물들과 식물들까지 모두가 자기답게 살며 자기의 꽃을 피우도록 돕는 것이다.” 이렇게 종교 간 소통으로 편견을 넘고, 헝겊으로 아름다운 조각보를 만들고, 상처로 영롱한 진주를 만드는 ‘귈렌아이(현경 교수의 터키식 이름으로 웃는 달이라는 뜻)’의 눈길이 비추는 곳엔 어디나 아름다운 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웃는 달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실 때 하늘 한복판에서 빛을 비출 것입니다. 이렇게 마지막 종말 신앙의 단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5. 인자가 구름 타고 오시어 택하신 자들을 모으리라!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막 13:14-17)

부활 신앙, 곧 종말 신앙의 마지막 단계는 이슬람 지역이 아니라, 유대에 있는 자들이 산으로 도망가야 할 것입니다. 물론 지붕 위에 있는 자, 밭에 있는 자,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모든 자에게도 화가 있을 것입니다. 종말은 그리스도교인이나 이슬람교인이나 그 누구에게든 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일이 추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만일 주께서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셨느니라.”(막 13:18-20)

이렇게 종말의 마지막 문이 열립니다. 무덤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때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인자가 오는 것을 보리라.”(막 13:21-23)

인자가 오시면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입니다. 자기 비움의 화신으로 이 땅의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 밥상공동체를 열어가신 예수님께서 교리의 차원이 아니라, 사랑의 차원에서 그의 택하신 자들을 불러 모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막 13:24-27)

▲ 장 쿠쟁 2세의 <최후의 심판>(16세기)과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1534~154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께서 구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실 때까지 또한 택하신 자들을 사방에서 모으실 때까지 종말 신앙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악한 자들을 멸하시고, 지금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강림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지금, 여기서 자기 비움을 실천하고, 고등 종교이면 모두 가지고 있는 거룩한 ‘종교적 원체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러한 채움과 동시에 자기 비움과 나눔의 삶을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부활신앙, 종말신앙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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