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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부활 후 현실(스바냐 3,1-5; 고린도후서 4,16-5,5)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3.05.10 23:11
▲ John Singer Sargent, 「Frieze depicting the Prophets Zephaniah, Joel, Obadiah, and Hosea」 ⓒBoston Public Library

스바냐는 그 연대가 알려진 몇몇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예레미야와 함께 요시야 시대에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예레미야처럼 그도 예루살렘을 비판하지만 예레미야와는 결이 조금은 다릅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마치 구원과 안전의 보증인 것처럼 여기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지만(렘 7; 26장), 스바냐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지배층의 불의에 간결하게 언급하고 심판을 강조합니다.

이 예언자들의 활동을 보면, 요시야 시대에 대한 궁금증은 커지기만 합니다. 그는 다윗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히스기야(왕상 18,5)와 함께 그런 자가 없었다는 평을 들었습니다(왕상 23,25). 그럼에도 양자 모두 그 끝은 사뭇 비극적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하는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다스리던 때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대로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에 똑바로 세우려고 개혁을 했고, 이는 크게 기억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심판선언은 두 사람 모두에게서 그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예레미야는 요시야가 개혁을 하기 이전부터 활동했고 스바냐는 추정컨대 개혁 이후에 예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두 사람 모두 요시야의 개혁에 직접적인 개입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궁중 예언자는 훌다였던 것 같습니다(23장).

성전에서 법전을 발견한 뒤에 이 책과 관련하여 야훼께 물을 때 요시야는 대신들을 훌다에게 보냅니다. 이로써 시작된 개혁의 깊이와 너비 그리고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에 대한 좋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예려미야와 스바냐의 심판예언이 그치지 않은 것은 개혁이 미완이었거나 기대만큼 철저하지 못했을 수 있겠습니다. 그만큼 개혁은 어렵고 또 철저하다는 말을 덧붙이기는 더더욱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스바냐는 남아있는 바알들, 그러니까 아마도 개혁 이후에도 여전히 숭배되고 있을 바알들을 언급하며 하나님이 그것들을 그 제사장들(그마림)을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에는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월성신을 숭배하는 자들도 있었고, 야훼께 예배하며 야훼께 맹세하되 밀곰(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또 야훼를 배반하고 야훼를 차지 않는 자들도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아예 다른 신을 믿는 자, 다른 신과 야훼를 혼합해서 믿는 자, 야훼를 떠닌 자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도 개혁도 충분치 못했다고 할 수 있고, 개혁이 개인의 신앙에까지 미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태를 향해 스바냐는 야훼의 날 곧 심판을 선언합니다. 개혁이 못바꾼 것을 예언자의 심판 선언은 바꿀 수 있을까요?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걸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나비으로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억압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야훼의 법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야훼의 법을 지키는 이유는 그 법에서 해방을 찾고 그 법이 실현되기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들을 억압하는 권력층들에게서는 조금이라도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고위층들이나 법관들뿐만 아니라 예언자들이나 제사장들도 다를 것이 하나 없습니다.

백성들을 약탈하기에 여념이 없는 지배층들과 그들에게 빌붙어 그물 챙기기 바쁜 종교 권력자들입니다. 세상은 달라진 것 하나 없으니 개혁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개혁은 표면적인 제도 개선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내면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엉망인 현실 속에 하나님이 안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운 세상의 질서를 보존하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이 자연의 질서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할 수 없습니다(전 3,11 참조).

하나님은 자기를 기억하고 그의 법을 지키는 피압박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야훼를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그리하면 하나님은 심판으로 이 세상을 심판해도 그들만은 살리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자들입니다. 억압당함으로 고통당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그들이 닥치고 있는 현실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 때문에 하나님에게 희망을 두고 그의 말씀대로 살려하기 때문입니다. 억압당하고 빼앗긴 삶이지만 그들에게서 그 어떤 권력도 그 어떤 폭력도 앗아갈 수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희망입니다. 그 희망으로 그들이 견딜 뿐만 아니라 그 희망 속에 하나님이 새로운 미래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은 상황이 많이 달라져서 그 구분이 조금은 더 어렵게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배층의 행태는 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 교묘하고 더 악랄하고 더 끈질기고 더 세부적이 되었습니다. 한 지역 한 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그 세상에서 일하고 계시며 지금도 그와 함께 미래를 만들어갈 사람들을 찾고 남겨두셨습니다. 그들 가운데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주님이 계시기에 예전의 그들과 같지는 않습니다. 그들도 그 소망을 갖고 있었지만 예수를 통해 그 희망은 희망 이상의 확실한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누르고 있는 현실의 짐들이 아무리 많고 무거워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부활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미래의 사건만이 아닙니다. 미래로부터 오는 그 사건은 오늘 우리를 해방시키고 다시 살리고 있습니다. 절망과 죽음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가도록 우리를 이끄는 선한 힘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아니오 하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한 우리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에게 두려움되고 마지막을 알리는 경고가 될 것입니다.

스바냐가 약자들에게 선언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확인된 미래가 이 땅에서 또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것이 되기를 빕니다. 새세상의 희망이 도피처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힘이 되고 내일을 오늘로 바꿔 살게 하는 지혜가 되기를 빕니다.

세상의 무거운 짐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누른다 해도 두려워하거나 떨지 맙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탄식하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위로의 싹을 틔우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희망을 따라 기쁨 넘치는 삶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감사하며 넉넉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함께 삶을 나누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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