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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이 아닌 구원을 전하는 이말 못하는 파수꾼(에스겔 3:17-21)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3.05.14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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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20 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21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에스겔 구성

부활절 여섯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그 고난을 이겨내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늘 기억하시기 바라고, 부활 사건이 우리에게 전한 소망을 날마다 품고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에스겔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약간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로 보이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사명을 주셨는지, 우리는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할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보통 에스겔 전체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1-3장은 에스겔의 소명기사이자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부분입니다. 4-24장은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 선언이고 25-32장은 열방을 향한 심판 선언입니다. 마지막 33-48장은 에스겔이 품었던 소망과 회복의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조금 더 크게 구분하자면, 1-3장은 소명 기사이고 4-32장은 심판의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33장 이후는 회복과 구원의 선포입니다. 아마도 2장 10절에서 두루마리에 적혀있다고 말한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4-32장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성 속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심판 선언이 시작되기 직전인 3장과 심판의 내용이 끝난 33장에는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똑같은 내용이 오늘 본문과 33장에 나타납니다.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우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의 내용을 앞뒤로 감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하나님의 심판을 전달할 사명을 부여받게 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파수꾼

예언서에서 파수꾼의 이미지가 나타나는 것은 에스겔 뿐만이 아닙니다. 파수꾼의 역할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지만, 이사야, 예레미야와 하박국에서도 파수꾼의 이미지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파수꾼은 적의 침입을 경계하며 알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언서에서는 꼭 그런 의미로 파수꾼의 이미지가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하박국의 경우에는 파수꾼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진 않지만, 자신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고 말합니다.

하박국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께 드렸던 자신의 질문에 무엇으로 대답하실지를 기다립니다. 하박국은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예언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때를 기다릴 뿐이고, 이 기다림을 위해 파수꾼처럼 지키고 서 있겠다는 표현입니다.

이사야 21장에 나타난 파수꾼도 적의 침입을 경계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적 바벨론을 파괴하셨음을 전달받고 이를 이스라엘에 전할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경계하는 사람의 이미지보다는 승전고를 울리는 역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적의 침입을 경계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 6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파수꾼을 세우셨고 그들의 나팔 소리, 적의 침입을 알리는 소리를 듣게 하셨으나 이스라엘은 이 소리 듣기를 거부하였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예레미야가 가장 파수꾼에 걸맞는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경우 파수꾼이 경계하는 것은 적의 침략이라기보다, 사람들이 죄에 침식되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파수꾼으로 세워진 이들은 죄를 경계합니다. 그리고 죄악에 찬 상황을 경고하며 알립니다. 예언자의 모습과 잘 어울리는 예시입니다.

에스겔에서 사용된 파수꾼의 이미지는 예레미야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저희가 읽은 바와 같이 하나님의 파수꾼은 악인과 의인을 향해 죄를 경고합니다. 그리고 죄인은 돌이키도록 이끌고, 의인은 죄를 짓지 않도록 권면합니다.

심판을 전하지 못하는 파수꾼

그런데 이후에 나타나는 심판의 내용들을 통해 보았을 때, 에스겔은 죄악을 경계하는 파수꾼만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이들을 경계하며 경고하는 파수꾼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 아이러니가 생깁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향한 바벨론의 침략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에스겔은 하나님의 심판을 경계하는 파수꾼이 됩니다. 이미 닥쳐온 심판을 이스라엘에 경계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셨음에도 또 파수꾼을 세우셨다는 점으로 인해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회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파수꾼을 세우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 다음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파수꾼으로 세우신 에스겔이 말할 수 없도록 만드십니다. 파수꾼이긴 하지만 적의 침략을 경고할 수 없는, 말 못하는 파수꾼이 된 것입니다.

앞서 에스겔 33장에 파수꾼 이야기가 똑같이 반복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33장에서 파수꾼 이야기가 반복된 후, 에스겔이 예루살렘의 함락 소식을 전해들었다는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이는 시드기야 왕 때에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된 때를 의미합니다.

에스겔이 예루살렘 성전 함락 소식을 전해들은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입을 여십니다. 그리고 그가 제대로 파수꾼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십니다. 이런 점을 보았을 때, 앞서 말한 하나님은 구원을 더 바라신다는 해석보다는 하나님의 심판은 결국 피할 수 없다는 해석이 맞는 것 같이 보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는 결국 심판을 받게 되어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파수꾼을 세워주셨다 하더라도 벌을 피해 갈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에스겔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 에스겔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에스겔의 구조를 통해서 보았을 때, 전반부는 심판 선언이고 후반부는 구원과 회복의 소망입니다. 전반부에서 파수꾼의 사명을 받았을 때, 에스겔은 말할 수 없는 파수꾼이었습니다.

후반부에 들어서며 에스겔은 다시 파수꾼의 사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할 수 있게 된 에스겔이 전한 것은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구원과 회복의 소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파수꾼은 죄악을 경계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살아가지 않도록 경계하며 경고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말, 그가 전해야 하는 말은 심판이 아닙니다. 구원입니다.

이를 조금 바꿔서 말하자면, 파수꾼이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차이로 볼 수 있습니다. 파수꾼은 분명 죄를 경계하며 죄를 경고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가 사용할 언어는 심판의 언어가 아니라 구원의 언어입니다.

가장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면, 과거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가르칠 때, 가장 많이 사용된 방식이 겁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장난치면 하나님께 벌 받는다. 나쁜짓 하면 지옥간다. 이런 방식으로 겁을 주며 아이들을 교육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이런 이야기에 상당히 겁을 냅니다. 그래서 교회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따른다던지, 예배 시간에 예배에 집중하던지 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자라감에 따라 점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살다보니 딱히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심판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처음부터 잘못된 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전할 것은 심판보다는 구원과 소망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소망을 품도록 가르쳤어야 합니다. 또 그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여주었어야 합니다. 소망을 품고 살아가기에 날마다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어른의 모습을 삶으로 가르쳤어야 합니다.

이번 주일이 어버이 주일이기에 아이들의 예를 들었습니다만, 꼭 아이들이 아니더라고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성도들입니다. 우리도 에스겔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파수꾼의 사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 선포할 이야기는 구원과 기쁨의 소식, 소망의 소식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활의 소망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세상에 보이며 전해야 합니다.

심판이 아닌 구원을 전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우리 앞에 놓여있음을 전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그 구원받은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세상 속에서 그 은혜를 받고 있음을 드러낼 수 있는 복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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