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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현존은 혐오 속에 계시지 않는다두려움을 넘어서는 사랑의 복음(요한1서 4:16~21)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3.06.14 01:20

성서의 메시지가 ‘사랑’으로 집약된다는 것은 기본상식에 해당합니다. 조금 풀어 이야기한다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집약되고, 다시 풀어 이야기한다면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구현될 때 그 사랑이 온전히 구현된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말씀인 요한1서가 강조하는 사랑의 메시지는 새삼스러울 것 없이 지당한 말씀인 셈입니다.

특별히 요한서신은 사랑의 사도로 알려진 요한의 입장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저자가 동일인물인지는 검토의 여지가 있지만, 요한복음서와 요한서신은 동일한 공동체의 유산이라 여겨도 무방합니다. 일관된 사랑의 메시지는 사도의 인격적 특성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공동체의 특성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막 유대교 공동체에서 쫓겨난 신생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 요한 공동체는 제도와 교리로 규율되는 조직교회로서 면모보다는 직접적인 대면관계로 맺어지는 친밀한 공동체를 지향하였습니다. 요한복음서와 요한서신에서 일관된 사랑의 메시지는 그 공동체의 지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찌 보면 그 사랑의 메시지를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본문말씀은 사실 특정한 맥락을 갖고 있습니다. 어느 때 말해도 좋은 말씀을 그저 단순하게 반복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배경에서 딱 필요한 말씀으로서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맥락이 뭘까요? 요한1서는 공동체 안에서 한 부류가 떨어져 나간 가슴 아픈 현실을 배경으로 합니다. 떨어져 나간 이들이 누구였을까요?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사실, 곧 그리스도가 실제 사람이 되셨다는 진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2:19, 4:2~3). 영지주의적 가현설이라고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누린 육신의 삶은 허깨비에 불과하고 그저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요한1서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을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시인하는 영은 다 하나님에게서 난 영입니다”(4:2).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삶을 긍정하며 그 삶 가운데서 보여주신 사랑을 하나님을 아는 길로 말하고자 하는 분명한 의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그 의도 가운데서 다시 한 번 사랑의 의미를 역설합니다. 사랑의 메시지를 특별한 맥락 가운데서 더욱 생생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말씀을 다시 환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았고, 또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4:16)

“사랑을 통해서만 절대적 존재가 상대적 존재에 말을 거신다.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아들로 껴안으신다”(賀川豊彦). 사랑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 되고, 사람과 사람이 하나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계속해서 선포합니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이 점에 있으니, 곧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담대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또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4:17~19).

사랑 가운데 하나님께서 현존하시고, 그 가운데서 비로소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함으로써 사랑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그 사랑은 매우 구체적인 효과를 동반합니다. 두려움을 넘어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 안에서 자신감 있는 삶을 뜻합니다. 부모로부터 지지를 받는 아이, 주변 사람들부터 지지를 받는 사람이 자신감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쉽게 경험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대로 그대로 살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목적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 안에서 자신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의 기도와 그대로 상통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15).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되는 곳은 지상에서의 삶입니다.

그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사람들이 사랑에 감화될 때, 사람들이 서로 사랑할 때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것에 대해 무슨 부연설명이 필요할까요? 다만 그 사랑으로 극복되는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헤아려 볼 필요는 있습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을 뜻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 앞에 설 때 두려움을 갖는 것은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경외감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거리감이기도 합니다. 성서는 그 경외감에 대해 한편으로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그런데 본문말씀은 사랑 안에서 그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껴안으시는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자식이 부모를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관계입니다. 때로 두려울 수도 있지만, 부모와 자식 사이 관계의 바탕은 사랑의 유대입니다. 본문말씀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두려움이 사라지는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래서 본문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4:19~21).

▲ 타자를 혐오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르짖는 곳 가운데 하나님의 현존은 없다. ⓒGetty Images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그 진실을 알 수 있을 따름입니다. 본문말씀은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쫓아낸다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동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다른 어떤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 안에서 그 진실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이 땅 위에서 사랑을 이룸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하나 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영적 지혜가 따로 있거나, 어떤 은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모든 은사를 뛰어넘어 가장 소중한 사랑을 역설한 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세계 안에서 사람들의 실상은 어떨까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진정으로 두려움을 넘어서고 있을까요? 서로 신뢰하고 사랑함으로써 두려움을 넘어서고 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으로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두려움에 근거한 것입니다. 오늘 많은 교인들은 천당과 지옥 사이의 불안감과 두려움으로 신앙생활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일종의 강박관념이 되어 있고, 신앙생활이 일종의 아편이 되어 있을 뿐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두려움이 일상화되어 있는 삶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쉽사리 그 누군가를 적으로 돌리고 악마화합니다. 우리 사회의 차별과 혐오는 위험한 수위에 이르고 있습니다.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광범위한 적대감과 맞닿아 있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혐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 등이 그 구체적 목록입니다.

반이슬람을 포함한 타종교에 대한 혐오도 심각합니다. 대구에서는 무슬림들이 조그마한 예배당을 짓겠다는데, 그 앞에서 돼지고기를 구워먹고, 돼지머리를 올려놓는 만행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그런 일이 벌어져서야 되겠습니까? 차별금지법이 어째서 그렇게 두려운 대상이 되어버렸을까요?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마태 7:12).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지워져버린다면, 그 삶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구원을 갈망한다는 사람들이 무엇이 두려워 그렇게 강퍅하게 행해야 합니까? 사랑의 복음이 실종된 교회의 현실입니다.

오늘 사람들의 삶이 팍팍해지고, 언제든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두려움을 갖게 된 까닭은 사회적 소수자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내 몫을 빼앗아가기 때문이 아닙니다. 불공평한 사회구조 탓에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이 고단해지는 것입니다. 그 현실을 외면하고 엉뚱하게 자신과 다른 부류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며 다른 사람을 악마화하고 적대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 나라의 정치와 종교는 길을 잃었습니다. 혐오와 배제의 논리를 극복하고 갈등을 조정하여야 할 정치는 오히려 혐오와 차별의 논리에 편승하여 혐오의 정치로 치닫고 있고, 두려움에 기생하는 종교는 특정한 사람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불행한 모습입니다.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두려움을 몰아내기보다는 그 두려움을 끊임없이 양산해내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해법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우리 사회의 해법은 사랑을 구현하는 데 있습니다.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누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평범한 사람 모두가 스스럼없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 있는 사회를 형성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책임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현해야 할 그리스도인에게는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길입니다. 일찍이 문익환 목사님은 “정의는 사랑의 사회적 번역”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정의를 이루는 것이 우리 사회에 신뢰하고 사랑을 나누는 인간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 진실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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