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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은 시선의 회개로부터!(삼상 17:41-47 행 18:12-17 막 5:21-34)성령강림후 셋째 주일(6월18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06.16 03:42

1. 편협한 가치관과 시선의 회개

넷플릭스(OTT) 10부작 여성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 중 <사이렌: 불의 섬> 10부작이 있습니다. 무인도에서 여성 참가자 24명이 각각 4명씩 6팀으로 나누어 극한의 전략 게임을 펼쳐 승부를 보는 예능입니다. 참여 여성들은 군인, 경찰, 소방관, 운동선수, 스턴트맨, 경호원들입니다.

▲ <사이렌: 불의 섬>

첫 시작은 발이 푹푹 빠지는 뻘밭에서 길고 무거운 깃발을 메고 무인도로 걸어 들어갑니다. 여기서 도끼로 장작을 패서 불을 피우고 끄는 일, 땅을 파는 일, 몸싸움해서 상대방 기지의 깃발을 뺏는 경기 등을 펼칩니다. 이전에 나온 <강철 부대>와 비슷한 형식입니다. 그러나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나온다는 것이 다릅니다. 대중문화평론가 황진미 선생은 이렇게 분석합니다.

“참가자들은 직업의 명예를 걸고 승부에 임한다. 시청자는 참가자들의 행동에서 직업적 특성을 발견하며 재미를 느낀다. 가령 경찰팀은 사소한 것에서 정보를 얻는다. 어느 팀이 ‘선배’라고 부르고 어느 팀이 ‘언니’라고 부르는지 기억해서 어둠 속 상대를 구분한다. 소방팀은 사이렌 소리에 가장 빠르게 출동 준비를 마치고, 소방 호스를 잡으면 눈빛이 변한다. 군인 팀은 항상 남들이 보지 못하게 등을 돌리고 의논하면서 다른 팀의 정보를 캐기 위해 노력한다. 승리욕에 불타지만 협상에는 무능하다. 스턴트 팀은 힘들 때 구령이 ‘슛, 레디, 액션’이다. 운동팀은 역시 1 대 1로 붙었을 때 피지컬이 가장 좋다. 경호팀은 남을 지켜주고 보호하는 데 진심이다.”

▲ <골때리는 그녀들>과 <강철 부대>

과장해서 말씀드리면, 이 예능을 <강철 부대>의 아류라고, 혹은 <골때리는 그녀들>에서 여자들이 공을 찬다는 것을 남성 스포츠의 패러디인 양 히죽거리며 해설하던 개그맨 해설자 이수근의 눈으로 보다가 한 방 맞았습니다. 놀라운 시선의 전환입니다. 아니 시선의 회개라고나 할까요! 황진미 선생의 글이 그것을 확증해 줍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자는, 사람이 아니고 직업인이 아니고, ‘여자’로 특정된다. 남초 사회에 한두 명 끼어 있는 여성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 여자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으로 간주된다. 그러곤 성 역할이 부여된다. 성 역할에 맞게 행동하면 점차 입지가 좁아지고 어느 날 희롱이 찾아든다. 성 역할에 맞지 않게 행동하면 ‘여자도 아니’라며 비난이 들어온다. 직업 수행에서 그의 단점은 언제나 여자로 환원된다. 반면 성취는 예외로 해석된다. 동료들뿐만이 아니다. 현장에서도 ‘형사’가 아니라 ‘아가씨’로 불리고, 구조하러 간 소방관을 ‘여자’라고 못 미더워하는 일을 수없이 겪는다. 개인의 실수가 ‘여경’ ‘여소방관’의 무능으로 비칠까봐 몇 배나 노력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매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여성이 긴 머리에 긴 속눈썹을 타고나는 것이 아님에도 이것이 여성의 신체적 특징인 양 간주합니다. 따라서 여성의 신체는 언제나 관음의 대상이 됩니다. 카메라가 그것을 훑어댑니다. 그러나 장작을 패던 군인 팀 강은미 중사가 웃통을 벗어젖힐 때 그것은 관음의 대상이 아니라, 건강하고 효능감 있는 몸으로 보이고 호쾌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무슨 까닭인가요?

사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전향하고 바울이 되었듯이, 모든(아니, 기존 가부장제에 길들어진) 남성들은 <사이렌: 불의 섬>을 만나 시선의 회개가 필요합니다. 편협한 가치관을 불태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사는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세본문 말씀은 편협한 가치관에 물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구약 말씀에서 블레셋 사람 골리앗이 그렇습니다. 그는 다윗의 어린 나이와 용모를 업신여깁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갈리오 총독 역시 식민지 백성인 유대인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선교에 큰 도움이 되지만,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소와 회당장 소스데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나 몰라라 합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역시 바울을 해코지하려고 갈리오 총독에게 고소하고 뜻대로 되지 않자, 회당장 소스데네에게 폭력을 행사합니다.

복음서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받는 혈루병 여인의 간절한 마음을 읽어내지 못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왜곡된 시선과 편협한 가치관에 사로잡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회개는 시선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성령 충만은 우리의 시선이 제대로 회개할 때 이뤄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해야 할 시선은 무엇인가요? 바로 ‘무시하는 시선’, ‘나 몰라라 하는 시선’, ‘우매한 시선’입니다. 먼저 구약 말씀부터 볼까요? 무시하는 시선에 관한 말씀입니다.

2. 무시하는 시선, “내가 네 살을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 다윗과 골리앗

“블레셋 사람이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다윗에게로 점점 가까이 나아가니라.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삼상 17:41-44)

블레셋이 유다에 쳐들어왔을 때입니다. 블레셋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인 골리앗을 보고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두려워합니다. 마침 그때 싸움에 나간 형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려고 전장에 온 다윗이, 골리앗이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큰형 엘리압의 “네까짓 게 뭘 할 수 있는데?”라는 무시하는 시선과 꾸지람에도 불구하고(삼상 17:28) 마침내 사울 앞에 불려 나간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을 허락받고 싸우러 나왔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때 골리앗이 한 말입니다. 골리앗이 다윗을 무시하죠? 업신여깁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5-47)

다윗은 보이는 것에 미혹 당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영광을 중요시했습니다. 따라서 다윗의 시선은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결국 이 대결에서 다윗이 이깁니다. 이렇게 무시하는 시선은 실패하고,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시선은 승리합니다. 계속해서 사도행전 말씀을 볼까요? 나 몰라라 하는 시선입니다.

3. 나 몰라라 하는 시선,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행 18:12-16)

아가야는 현재 그리스 땅에 있는 로마제국의 한 주입니다. 이 지역의 수도가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입니다. 이곳에는 총독의 관저도 있습니다. 바울은 3년 정도 소요된 제2차 전도 여행의 절반 정도를 그리스 세계의 상업적 중심지이자, 우상숭배와 물질문명의 중심지였던 고린도에서 전도사역으로 귀중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고린도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과 그리스도인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습니다. 따라서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A.D. 51-52년) 바울을 고소합니다.

▲ 갈리오 가문(아버지, 갈리오, 세네카)과 바울

갈리오는 수사학자 안네우스 세네카의 아들이며, 철학자 세네카의 친동생입니다. 형 세네카는 네로 황제의 스승이기도 했는데, 네로가 젊었을 당시에는 ‘로마를 세네카가 다스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네로가 폭군이 되자 그를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아무튼 세네카의 동생인 갈리오는, 기록에 보면 매우 상냥하고 청렴결백했다고 합니다. 특히 형 세네카는 갈리오를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갈리오는 아가야 총독의 임무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가 세네카와 함께 네로를 제거하려고 했지만 발각되어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아무튼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으로 부임하니, 유대인들이 움직입니다. 일반적으로 총독이 부임하면 민심을 얻기 위해 민원을 많이 들어줍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것입니다. 그러나 갈리오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바울에 대한 고소를 기각해버립니다. 그 이유로 이 고소가 바울에 대해 부정하고 불량한 행동이 아니고, 유대인들의 언어(로고서)와 명칭(오노마)과 법(노모스)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에 대한 이러한 고소 기각은 아가야 지방에서만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갈리오가 로마의 총독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방의 총독들에게 선례가 됩니다. 가령 아가야 총독이 유대인들에게 유리하고 바울에게 불리한 판례를 남겼더라면 다른 지방에서도 계속 바울에게 불리한 재판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바울의 이방 지역 선교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갈리오는 그런 선례를 차단했습니다. 사건 자체를 기각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언어와 명칭, 법에 대한 문제는 너희들의 문제이지, 내가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 몰라라 하는 시선입니다. 사실 갈리오의 이러한 행보가, 앞서 말씀드렸지만, 그리스도교 선교 과정에 상당히 좋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결국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을 정죄하는 데 실패한 유대인들은, 바울 대신 유대인인 회장당 소스데네를 잡아 때립니다. 말씀을 볼까요?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행 18:17).” 회당장은 유대인의 회당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앞부분을 읽어보면,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 때, 회당장 그리스보가 바울의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행 18:8). 따라서 그리스보의 후임인 소스데네도 그리스도인이 되어 바울을 도왔을 것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소스데네는 배신자와 다름없으니 바울보다도 더 얄미웠을 것입니다. 갈리오 총독이 바울을 놓아주자 유대인들은 그 분풀이를 소스데네에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 몰라라 하는 갈리오는 이 일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나 몰라라 하는 시선이, 곧 방관자의 시선이 좋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우매한 시선을 볼까요? 복음서 말씀입니다.

4. 우매한 시선,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막 5:21-24)

예수께서 회장장 야이로의 어린 딸을 고치시기 위해서 길을 갈 때입니다. 큰 무리가 에워싸 밀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는 혈루증 여인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막 5:25-29)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이 나간 줄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우매합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막 5:30-31)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를 챗GPT와 대화하며 주석을 부탁해보니, 헬라어 원어도 분석해 설명해줍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쉬운 번역으로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로부터 떠났다는 것을 곧 스스로 알고 계셨습니다.”라고 번역해줍니다. 특히 ‘능력이 떠났다’라는 표현에 관해서도 물어보니, 챗GPT는 “예수님께서 일시적으로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거나, 특정 상황에서 능력이 작용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의미”라고 분석합니다. 곧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실 수 있었지만, 때때로 그 능력을 자발적으로 억제하거나 사용하지 않으셨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어떤 순간에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거나, 더 큰 계획과 목적을 위해 일시적으로 능력을 억제하신 것”이라고도 봅니다. 결론적으로 “능력을 사용할지는 예수님의 자유의지에 따라 달렸으며,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이루어졌다.”라고 챗GPT가 설명해주었습니다.

아마도 저는 예수님께서 혈루병 여인이 고통스러워하는 시선을 보셨고,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엇이라도 요청하기를 기다리신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에게 결국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아픈 이들을 받아주시고 구원을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마음, 은혜의 시선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의 편협한 시선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달리, 고통받고 있는 여인에 대한 감수성이 없었습니다. 단지 몰려드는 무리로 인해 신이 나고 흥분했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상황이나 고통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잘 아시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영국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1759)이라는 책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으로써, 정의를 ‘공감’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타인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상대의 입장이 되어 그 감정을 자기 일처럼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따라서 애덤 스미스의 생각은 개인의 삶에서든 공적 활동에서든, 아무리 ‘이성적 판단’을 해야 할 때라도 공감을 바탕으로 한 ‘도덕적 판단’이 발휘되어야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무리가 몰려오자 이성적 판단을 했지만, 예수님은 도덕적 판단으로 공감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처럼 우매한 시선이 아니라, 따뜻한 시선으로 여인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2-34)

예수님은 여인의 마음을 아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평안하여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회개에는 먼저 시선의 회개가 필요합니다. 내 생각을 바꾸기 위해 시선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공감, 약자를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는 마음, 내일이 아니라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대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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