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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다는 착각어디에 무엇을 넣습니까?(누가복음 21:1-4)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06.25 00:21
▲ William Teulon Blandford Fletcher, 「The Widow’s Mite」 ⓒhttps://artuk.org/discover/artworks/the-widows-mite-52728

1.

프랑스의 소설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느 날은 커다란 보아뱀이 코끼리를 삼키고 있는 그림을 그려서 어른들에게 보여줍니다. 무섭지 않냐고 하자 어른들은 ‘모자’가 뭐가 무섭냐고 합니다. 소설책에는 실제 그 그림이 실려 있습니다. 매우 유명한 그림입니다. 제가 보아도 그냥 중절모처럼 보입니다. 소설을 읽으니 ‘그 안에 코끼리가 들어있구나’ 할 뿐입니다.

어른들은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느니, 차라리 지리나 역사에 관심을 가지라’고 충고합니다. 그 누구도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화가라는 꿈을 포기합니다.

‘나’는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서 세계 여기저기 안 가본 곳이 없이 돌아다닙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사막에 불시착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한 어린아이를 만나게 됩니다. 이 아이가 바로 어린왕자입니다. 주인공은 비행기를 수리하는 동안 그 아이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이 아이에게 어린 시절 그렸던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려주자, 대번에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작가는 이 어린왕자의 시선을 통해 본질을 잃어버린 세상, 형식과 포장에만 치우지는 세상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눈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보이지 않는 본질을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보이는 우상을 섬기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보이는 세상의 나라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삶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보이는 물질에 가치를 두지 않고 보이지 않는 가치를 추구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본질은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진리가 존재하지 않아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진리를 볼 능력이 없어서 우리가 못 보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올바로 보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알려줍니다. 모자처럼 생겼으나 그것의 본질이 모자가 아니라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오늘 복음서의 말씀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서기관이요 다른 한 사람은 과부입니다. 서기관과 과부를 등장시켜서 그들의 행위를 대조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길고 어렵고 복잡한 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짧고 단순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서기관처럼 되지 말고, 과부처럼 되어라.’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과시욕과 사기 행각을 공개적으로 비난합니다.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인 서기관들은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치장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윗자리에 앉아서 높임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사람들을 돌보는 대신 그들의 재산을 탈취했습니다.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좋아합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흰색의 아마포로 된 긴 옷을 입었습니다. 이 옷은 예배 때 입는 것으로 본래는 하나님에 대한 봉사와 헌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옷의 길이를 늘이고 옷 술을 길게 하여 풍채와 권세의 위세를 강조했던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으로 인해 존경을 표하게 되는 옷인데, 그들은 그 거룩한 옷을 자신의 허영심과 과시욕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켜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모습을 가리기 위해서 입는 종교적인 의복을 오히려 인간의 모습을 치장하기 위한 도구로 삼아버린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인사 받는 것과 회당에서 잔치자리에서 상석에 앉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맺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들어가 홀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오히려 사람들 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서 자신들이 인사받기를 즐겼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영광과 존경을 마치 자기에게 바치는 것인 양 우쭐대며 으스댔던 것입니다.

이들은 기도마저도 사람들 앞에 내세우는 자랑거리로 삼았습니다. 수많은 기도문들을 길게 외우면서 자신의 경건함과 종교적 열심을 과시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면서 진실되게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와, 역시 기도 참 잘한다’ 라고 감탄하고 있을 옆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쇼에 불과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오히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일을 하는 도둑이요 강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이들이 어느 누구보다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리고는 가난한 한 과부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헌금함에 자신이 지닌 동전 두 닢을 넣은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과부의 두 렙돈이 가장 귀한 헌금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신앙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서기관들을 겨냥해서 말하십니다. 너희들의 눈으로 보자면 가장 별볼일 없어 보이는 이 과부가 하나님께 칭찬받을 사람이라고 말하십니다. 당신들의 눈에는 하찮은 헌금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가장 귀하다고 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모습 속에서, 진정으로 귀한 신앙을 발견하고 계신 것입니다.

외형을 중시하고 드러나는 것을 중시하고 포장과 형식을 중요시하는 눈으로 보면 그저 모자에 불과하지만, 그 중심을 바라보면 커다란 코끼리가 그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그 코끼리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저 ‘어떤 멋진 모자를 쓸까?’ 하는 고민이나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대비해서 말씀하신 서기관과 과부, 이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유, 자유입니다. 자신을 과시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대접받고 싶어 하고, 자기보다 더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의 것도 자기 손에 넣고자 하는 서기관들의 모습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들은 명예에 권위에 물질에 묶여있습니다. 명예라는 모습에 묶여있어서 자신이 명예롭지 못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권위에 묶여 이어서, 권위 없는 상황을 감내하지 못합니다. 항상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고 명령해야 합니다. 물질에 묶여있어서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반면에 가난한 과부는 자신이 지닌 것을 모두 바치면서 온전히 자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과 만나며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당장의 먹고사는 일에서까지 자유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잘까 고민하는 초라하고 궁핍한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이 모든 것을 초월하고 극복한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많이 가지게 되면 더욱 풍요롭고 행복하고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장 풍족하고 풍요로운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오늘 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가진 것이 없어서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멀쩡한 음식물이 쓰레기가 되어 버려집니다. 멀쩡한 제품이 철이 지났다고 유행이 아니라고 새 것이 생겼다고 버려지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무언가를 더 손에 넣어야 한다는 강박적 소유욕에 시달립니다. 가진 것이 적어서 불행하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무언가 가지고 있으면, 내가 가지고 있다고 끊임없이 자랑해야 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난한 과부는 결코 궁핍하고 불쌍하고 초라하고 비참한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오히려 그런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입니다. 먹고 사는 일에 속박당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구속당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아무 후회나 마음의 거리낌 없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긴 옷을 입어야 비로소 얼굴을 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누추한 옷을 입고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해 명예로운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야 비로소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도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아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칭찬과 명예를 사모하면서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고 상석을 차지해야 자존감이 세워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낮은 자리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더라도,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수치를 당하고 무시를 당해도,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삶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 유려한 말솜씨를 뽐내면서 사람들 앞에서 유창한 기도를 줄줄줄 해대야 자신의 신앙을 안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도 모르게 골방에 숨어들어가 하나님과 단둘이 대면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믿음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다른 이의 가산을 삼키는 도둑질을 강도짓을 할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강도당한 이를 성심껏 섬겼던 사마리아 인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조용히 나누어 줄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모습 속에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신앙의 깊이를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 아래 감추어진 참 진리를 보시는 하나님께서 보아주심을 믿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세상을 향해 보여주어야 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보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야하는 우리의 숙명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숙명을 아름답게 살아내는 가난한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

과부가 헌금을 넣고 있는 헌금궤는 연보궤(1)라고 번역되는데, 특별히 여기에 모인 헌금은 대개 성전 유지와 빈민 구제에 사용되었습니다. 과부와 고아를 위해 나그네들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나병환자를 구제하는 데에 사용했습니다.

성서의 율법의 두 가지 큰 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사랑하는 일과 이웃 사랑하는 일에 헌금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가는 한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넣어 또 다른 가난한 이를 구제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제의 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이 오히려 나서서 구제의 주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구원을 베푸는 사람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바로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손만 벌리고 있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넙죽 받아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가진 것으로 서로를 구원하도록 이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사를 넘치게 베푸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서로에게 나누면서 서로를 구원해 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으로 이웃을 살리고, 이웃의 가진 것으로 내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평화는 서로가 서로를 돌볼 때 이루어집니다.

룻의 이야기에 바로 그런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나타납니다. 남편과 아들을 잃고 고향에 돌아온 나오미, 시아버지와 남편을 잃고 어머니를 따라 어머니의 고향에 온 룻, 둘은 먹고 살 방법이 막막합니다.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두 과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룻은 다른 사람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 연명하러 밭에 나갑니다. 그 곳에서 친족인 보아스를 만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대로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게 됩니다.

룻기는 단순히 심성도 착하고 신앙심도 좋은 며느리가 부유한 남편을 새로 만나 행복하게 살게 되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닙니다. 성서는 룻의 이야기를 통해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율법의 두 가지 큰 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이웃사랑의 실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사회적 제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인 약자들을 보호하는 규정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 아닙니다. 힘 있는 자가 자신의 힘을 마음대로 과시하며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약자는 자신의 힘이 약하여 도태되고 버림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 있는 자는 반드시 자신의 힘으로 약자를 도와야 하는 나라입니다.

밭을 소유한 사람은 과수원을 소유한 사람은 반드시 수확할 때에 약자들을 위해 이삭을 남겨놓아야만 하며 열매를 남겨놓아야만 합니다. 한 번 수확한 곳을 뒤돌아 봐서도 안 됩니다. 내 능력으로 거둔 것이지만 그 것은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이웃의 몫이 들어있습니다.

주인 된 자로 종을 마음대로 부려서는 안 됩니다. 그를 위해 쉼을 제공해야 하며, 정한 기간이 되면 그를 자유인으로 해방해야 합니다. 정당하게 돈을 빌려주었더라도 그 돈을 꾸어간 이가 가난한 사람이면 그에게 돈을 갚도록 혹독하게 재촉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아무 담보 없이 꾸어주고 기한 없이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심지어는 가축과 땅에게도 쉼을 주어야 하고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켜주어야 합니다.

공평과 정의를 이루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당신의 백성에게 명령하신 일입니다. 신명기 24장은 이러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시스템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룻기는 바로 이 시스템으로 인해 가난한 자가 구원을 얻는 실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씨 좋은 한 부자의 개인적인 선행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가난한 자가 구원을 얻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법칙을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룻기의 마지막에는 이 이야기와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족보가 등장합니다. 룻에게서 이어지는 혈통을 통해 다윗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 다윗의 가문을 통해 예수님이 태어납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족보를 나열하면서 굳이 룻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위대한 왕 다윗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든 것도 바로 이런 이웃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도 그 근본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실천 하나하나를 통해 그 토대가 놓여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5.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기관의 모습과 가난한 과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인들에게 어떤 모습의 신앙인이 될 것이냐고 묻고 계십니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신앙생활 하고 있냐고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헌신한다고 하면서 헌금함 속에 무엇을 넣고 있냐고 묻고 계십니다. 나를 돋보이게 할 일을 위해, 나를 사람들 앞에 드러내 줄 것을 위해, 나의 신앙을 치장하기 위해 힘쓰고 있지 않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삶의 모든 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곳에 아낌없이 내어 놓을 수 있냐고 묻고 계십니다. 이웃을 살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구원하는 길에 헌신하겠냐고 묻고 계십니다. 내 모든 것으로 이웃을 섬기는 일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겠냐고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시는 그 길에 함께 하겠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미주

(1) 여인의 뜰(성전 앞에 위치) 주변을 따라 3면 벽에는 13개의 연보궤(헌금함)이 준비되어 있다. 각각의 연보궤는 유대인의 신년인 나팔절에 부는 양각 나팔(숫양의 뿔)처럼 돈을 넣는 입구는 좁고 밑바닥은 넓었다. 13개의 연보궤는 각각 용도가 다르다. 1·2번 연보궤는 성전에 바치는 성전세를 넣었다. 3·4번은 번제와 속죄제로 비둘기를 바치는 여인들이 그에 상당한 돈을 넣었다. 5번은 제단에서 사용되는 목재, 6번은 분향단의 향, 7번은 성전에서 사용되는 금잔, 8번은 남자의 속죄제, 9번은 속건제, 10번은 비둘기, 11번 나실인의 서원, 12번 나병환자의 치유, 13번은 기타 자원헌금과 관련된 헌금을 넣었다고 한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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