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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다른 차원의 감사 세 가지!(대상 21:1-8 롬 15:14-21 막 7:31-37)성령강림후 다섯째 주일/맥추감사주일(7월2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06.30 14:17

1. 전혀 다른 차원의 감사 세 가지!

오늘은 상반기 감사절인 맥추감사절입니다. 돌이켜 보면, 코로나 팬데믹 이후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경제와 정치 상황에, 또한 한국 교회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돌아보면, 전혀 감사의 조건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감사는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세본문 말씀은 감사의 조건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감사를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2023년 반년을 돌아봅니다. 우리는 언제 감사를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을 때? 건강을 주셨을 때? 자녀가 잘되고 복 받았을 때? 오늘 세본문 말씀은 이와 다른 차원의 감사를 이야기합니다. 먼저 구약 말씀에서 다윗의 감사는 자신의 오만을 깨닫게 해주셨을 때 감사했습니다. 앞으로 말씀을 살펴보면 아시겠지만, 다윗은 주변 나라들인 모압, 암몬, 블레셋, 아말렉 등을 정복하여 이스라엘 왕국을 확장하였습니다. 이렇게 나라의 기초가 튼튼히 서자 오만하여 인구조사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자신의 오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합니다. 이때가 감사의 시작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자신은 남의 터 위에 교회를 건축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복음의 일꾼으로 동역자를 존중할 때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동역자가 있음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감사의 확장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서 말씀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께 데리고 나온 이들에 관한 말씀인데, 이것은 병든 자를 위로하고 예수께 인도할 때 나오는 감사입니다. 좋은 일, 선한 일을 할 때의 감사이며 이웃 사랑의 실천에서 나오는 감사로, 감사의 완성입니다. 이렇게 오늘 상반기 감사절인 맥추감사절을 맞아 감사의 전혀 다른 차원을 깨닫고 2023년 남은 반년도 감사하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감사의 시작, 자신의 오만을 깨닫게 해주셨을 때 감사!

구약 말씀을 볼까요? 본문 말씀은 다윗의 인구조사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다윗이 요압과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이스라엘을 계수하고 돌아와 내게 보고하여 그 수효를 알게 하라 하니, 요압이 아뢰되,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 배나 더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이 백성이 다 내 주의 종이 아니니이까? 내 주께서 어찌하여 이 일을 명령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하시나이까 하나, 왕의 명령이 요압을 재촉한지라.”(대상 21:1-4a)

사실 이러한 인구조사 이면에는 다윗이 하나님보다 군사력을 더 의지했다는 것을 엿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습니다. 선견자 갓에 의해 세 가지 형벌이 예고됩니다(대상 21:9-10). 첫째, 3년간 흉년과 기아에 시달릴 건지, 둘째, 3개월간 전쟁에서 패배하고 학살을 당할 건지, 셋째, 3일간 전염병에 시달릴 건지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벌이나 모두 가혹했지만, 다윗은 세 번째 벌이 가장 피해가 적을 것 같아 그것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 3일간 7만 명의 백성이 전염병으로 죽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전체 백성의 5%를 넘는 엄청난 대재앙이었습니다.

▲ 다윗의 인구조사

그런데 이것은 사탄이 다윗을 충동하여 인구조사를 하도록 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충동’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사(נָסָה)라는 말로, ‘시험하다, 기만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어떨 때 사탄·마귀가 우리를 기만하고, 시험할까요? 힘들고 어려울 때인가요? 아니면 성공하고 잘 나갈 때인가요? 신앙인 대부분은 힘들고 어려우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성공하고 잘 나가면 저 잘났다, 오만해집니다. 따라서 시험은 잘 나갈 때 찾아옵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드디어 요압이 떠나 이스라엘 땅에 두루 다닌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요압이 백성의 수효를 다윗에게 보고하니,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백십만 명이요. 유다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사십칠만 명이라. 요압이 왕의 명령을 마땅치 않게 여겨 레위와 베냐민 사람은 계수하지 아니하였더라.”(대상 21:4b-6)

요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인구조사를 시행합니다. 따라서 요압은 레위나 베냐민 지차 사람은 조사하지 않습니다. 사실 모든 통치의 기본은 상황 파악입니다. 따라서 백성의 수를 아는 것이 통치와 정책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것을 문제 삼았을까요? 통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백성들의 숫자를 센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다윗의 사건은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두고두고 교훈이 되어 인구조사를 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합니다. 가령 17, 18세기경 영국에서 인구조사를 하려고 하자, 본국은 물론 북미 식민지에서도 국민이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또한 1755년 영국 의회에서 인구조사를 위한 법안을 검토하자, 극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신에 저항한다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 일을 악하게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십니다. 말씀을 볼까요? “하나님이 이 일을 악하게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대상 21:7-8).”

잘못은 다윗이 했는데, 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합니다. 그렇습니다. 왕이 잘못하면 통치자가 제대로 잘하지 못하면 결국 고생은 백성이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오만의 탑을 쌓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회개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자신의 죄를 자복합니다. 많은 사람이 오만하고 교만하여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에 빠져 살아갑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오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즉시 회개합니다. 여기서 전혀 다른 차원의 감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자신의 오만을 깨닫고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아니면 다윗의 경우와 같이 우리의 오만으로 우리 자신을 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 사람, 가까운 사람을 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오만을 깨닫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3. 감사의 확장, 동역자가 있음에 감사!

두 번째 감사의 차원은 동역자가 있음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감사의 확장입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본문 로마서 말씀 뒷부분부터 보겠습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5:20-21).”

바울이 3차례에 걸쳐서 예루살렘에서 지금의 알바니아 지역인 일루리곤(‘기쁨’이라는 뜻으로 마케도냐 북쪽 아드리아 바다 동쪽에 위치)까지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롬 15:19). 이때 바울은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는다는 전도 신념이 있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집을 지을 때는 터를 닦고 그 위에 집을 짓습니다. 그런데 누가 집을 짓기 위해 터를 닦아 놓았는데, 다른 사람이 집을 짓는다면, 그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다른 사람이 이미 복음을 전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긴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거나 가르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 가운데 대형 교회들의 전도 방식과 다르죠? 대형 교회는 어떻습니까? 대형 마트나 재벌 대기업처럼 작은 구멍가게나 조그마한 회사들을 흡수하듯이, 개척교회나 작은 교회의 훈련된 이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하는 짓이 신천지와 똑같죠? 그러면서도 바울의 전도를 설교하고 선포합니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습니다.

로마 교회는 사도들이 직접 참여하지 않고 세워졌습니다. 팔레스타인이나 소아시아(오늘날 튀르키예), 그리스 반도 등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교회입니다. 사실 로마에는 전리품이 된 노예들과 출세를 위한 귀족들, 생업을 위한 이민족들, 도시의 유혹에 끌린 많은 젊은이가 모였는데, 그 가운데 그리스도교인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이방인의 종교에 관대했습니다. 따라서 클라우디오 황제(A.D. 41-54) 이전까지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안에서 유대교인들과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 다툼이 끊이지 않았기에 관원들의 눈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유대인들이 소란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결국 클라우디오 황제 때, 로마 관원들은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인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로마시에서 추방하게 됩니다(행 18:2).

다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서, 바울은 이렇게 로마에 세워진 교회에 자신이 가서 복음을 전하거나 가르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그 내용입니다. 그러나 로마 교회 교인들과 바울의 교리 일치를 위해 로마서를 쓰기는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을 이방인을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예수의 일꾼이라고 합니다. 본문 말씀 앞부분을 볼까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4-16)

▲ 일루리곤 위치

그리고 바울은 이 모든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이라고 합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 15:17-19)

바울은 로마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동역자가 있음에 감사합니다. 이것은 감사의 확장입니다. 감사의 조건의 ‘나의 문제 해결’에서 ‘너의 존재가 있음에 감사’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4. 감사의 완성, 병든 자를 위로하고 예수께 인도할 때!

세 번째 감사의 차원은, 감사의 완성으로 좋은 일, 선한 일을 할 때입니다. 이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막 7:31-34)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에서 나오셔서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열 개의 도시)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을 때였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자(κωφὸν καὶ μογιλάλον)’는 누구인가요? ‘귀먹은’이라는 말, 카폰은 콮토(κόπτω)라는 ‘타격을 입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따라서 카폰의 뜻은 타격을 받았기에 ‘막힌, 봉쇄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대 상황에 예민하지 못해 적응하지 못하고 무딘 것을 뜻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바보겠죠?

▲ 에바다, 열리라!

‘말 더듬는 자’인 ‘모길라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모기(μογι, 힘들다, 어렵다)와 라론(λάλον, 말)이 합쳐진 말로 말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누가 바보의 말을 들어줍니까? 그래서 바보는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사람, 곧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이를 사람들이 데리고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라고 외치십니다. 곧 “열리라!”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 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막 7:35-37)

그렇습니다. 못 듣는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사회 시스템이 열려야 합니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할 수 있도록 언로를 열어줘야 합니다. 이것이 확장된 감사의 완성입니다. 오늘 이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이들이 바로 아름다운 감사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 곧 도덕성에 기초합니다.

5.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독일의 역사학자이자 근대 사학을 확립한 레오폴드 폰 랑케의 말입니다. “국가의 흥망성쇠에 여러 가지가 있다. 군사력, 경제력, 영토 크기, 그리고 도덕적 에너지이다. 그러나 그 중 으뜸은 도덕성이다.” 잘 아시다시피, 랑케는 엄밀한 사료 비판에 기초를 둔 근대 역사학을 확립한 대표적인 실증사학자입니다. 세미나 방식을 고안해 지금도 대학원 수업의 정규적인 틀로 정착해 있죠?

물론 랑케는 당시 프로이센의 역사학자로서 정치사에만 관심을 두고, 정부의 공적 기록만 연구하여 역사를 서술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한계 내에서 랑케가 추구한 것이 바로 주관적 판단 없이,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밝히는 객관성이었습니다. 따라서 역사가는 ‘자아’를 소거해야 하며 현재의 관심과 감정을 역사에 주입하는 것은 역사학의 수행을 방해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카(Edward H. Carr, 1892-1982)는 약간 관점이 다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역사가는 사실만을 추종하는 노예도, 사실을 입맛대로 주무르는 주인도 아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 영화 <부당거래>의 대사

아무튼 국가의 흥망성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도덕성이라고 말하니,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선한 일을 할 때의 감사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착한 사람’이 바보가 되는 세상입니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부당거래>(2010)에서 검사로 나오는 배우 류승범이 경찰들과 실랑이를 벌이며 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이 말을 저는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좋게 대해주면, 호의를 받는 상대방이 그 호의가 자신의 권리인 줄 안다.”라는 말로 해석해 봅니다.

결국 착하게 살면 손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랑케의 말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래할 새로운 세상’은 다를 것입니다. 그것은 도덕적인 삶이, 또한 윤리적인 가치관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숨겨진 진실임을 깨닫는다면 머지않아 도래할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오늘도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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