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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키는 근본적인 법칙선을 행하며 평화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베드로전서 3:8~17)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3.07.05 01:54

베드로전서는 박해서신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정한 박해의 국면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이 환영받지 못하는 로마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서신입니다. 말하자면 당시 지배적인 사회질서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공동체의 질서와 가치관이 긴장하고 있는 정황 가운데서 기록된 서신입니다.

서신은 그 서두에서 수신인을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종말론적 믿음 안에서 땅 위에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를 지닐 수도 있지만, 일차적으로 그 수신인들의 실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파라코이)은 로마의 시민권자도 아니지만 전적으로 떠돌이 나그네는 또한 아닙니다.

그러니까 ‘체류중인 나그네들’ 또는 ‘거류민’을 나타냅니다. 이들은 그 불안정한 지위 때문에 늘 의심을 받아야 했고, 미심쩍은 종교를 갖고 있다는 낙인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불안한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었지만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귀속감을 확실히 갖고 있는 이들이 그 수신인들입니다.

수신인들의 그 성격 때문에 베드로전서는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당대의 지배적 사회질서를 넘어서는 급진적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긴장 가운데서 풍요로운 신학적 해석의 유산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본문말씀은 서두(8~9절)에서 매우 긍정적인 언어로 신도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삶의 자세에 관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한 마음을 품으며, 서로 동정하며, 서로 사랑하며, 자비로우며, 겸손하십시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복을 빌어 주십시오. 여러분으로 하여금 복을 상속받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8~9). 여기에 이어지는 시편의 말씀(10~12절)은 이 교훈의 의미를 더욱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서두의 이 교훈은 모두 긍정적인 언어로 되어 있는데, 이 교훈들은 각기 다른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공동체 내적 차원과 공동체 외적 차원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한 마음을 품으며, 서로 동정하며, 서로 사랑하며, 자비로우며, 겸손하십시오.” 이 말씀은 주로 교회공동체 내의 덕목을 일러줍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복을 빌어 주십시오.” 이 말씀은 주로 교회공동체 외부 사람들과의 관계를 겨냥한 덕목입니다.

물론 어떤 차원에서 받아들여도 좋은 말씀이지만,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처해 있는 구체적인 상황을 유념할 때 그 겨냥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중요한 사실은 그 교훈들이 구별된 별개가 아니라 상호간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교회공동체 내에 주는 교훈의 의미를 새겨볼까요? 한 마음을 품고, 서로 동정하고, 서로 사랑하며, 자비를 베풀며, 겸손하라는 것은 인격적인 존중을 동반한 사랑의 공동체로서 성격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한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뜻을 같이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획일적인 일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제자매로서 영적 교류를 나누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사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서로 동정한다는 것은 서로의 어려운 처지를 헤아리며 공감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것을 뜻하며 그 안에서 사람들끼리 연대하는 것을 뜻합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서로를 아끼는 관계를 말합니다. 형제자매애(필라델포이)는 여기서 유일하게 쓰인 개념으로 교회공동체의 이상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말하는 덕목의 핵심으로서, 서로 돕고 섬기는 사랑의 유대로서 세상의 질서와 대비되는 교회의 이상을 나타냅니다.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을 말합니다. 특별히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대할 때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겸손해야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를 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를 낮추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다고 여기며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사실상 더 이상 부연설명이 필요 없는 덕목들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처해 있던 박해의 상황에서 그 의미를 새기자면, 험한 세상을 이겨낼 힘을 교회공동체 안에서 가질 수 있도록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온전한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세상을 이겨낼 힘을 얻고 세상에 희망의 빛을 주라는 교훈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교훈의 말씀은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겪고 있던 박해의 상황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당대 사회에서 의심을 받고 질시를 당하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상태가 어땠을까요? 울분에 싸여 있거나 원한의 감정에 사무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의 마음에 적의가 없을 수 없었습니다. 분노로 가득 차 있을 수도 있고, 화로 가득 차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 상태에 놓여 있는 이들에게 서신은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복을 빌어 주십시오. 여러분으로 하여금 복을 상속받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이 서신을 보내고 있는 사도가 어찌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처해 있는 상태를 몰랐을까요? 어찌 그 마음에 공감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지금 서신을 보내고 있는 사도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며 오히려 복을 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Henryk Siemiradzki, 「Nero watching how a captive Christian woman is killed in a re-enactment of the Greek myth of Dirce」 (1897) ⓒPublic Domain

이 말씀은 세상을 바꾸는 근본적인 힘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해 주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던 사랑의 공동체로서 교회공동체 안에서 지켜져야 할 덕목은 세상에서도 연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분노를 가라앉히고 체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분노와 울분을 더 적극적인 삶의 태도로 전환하라는 뜻입니다. 인간관계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거기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어지는 시편의 말씀(10~12)은,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찾고 추구할 것을 역설합니다. 앞에서의 권면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어지는 권면의 말씀을 가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본분은 평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 평화는 갈등과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일상의 삶의 평화를 뜻합니다. 모든 사람이 정의롭고 평등하고 자유롭고 품위있게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 방법은 대화를 나누며 교감하며,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며, 용서하고 관용을 베푸는 것입니다. 서두의 권면은, 이 시편의 말씀으로 다시금 그 의미가 증폭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13절 이하)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겪고 있는 상황을 보다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긍정적인 언어로 교훈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열심으로 선한 일을 하면,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 바로 이 대목에서 서신을 보내는 사도는 낙관적인 기대와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선으로 갚는 사람을 누가 해하겠느냐고 말합니다. 결국 악을 행한 상대도 그 마음을 알아주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사도가 현실을 모르고 천진난만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구체적 상황, 구체적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선으로 갚는 사람이 현실적으로 겪는 고난의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난의 의미는 수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런 것처럼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의를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겪는 현실을 말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서 고난을 겪는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정의를 위한 결단을 요청하는 것이며, 그 결단에 따른 삶 자체로 그 고난을 극복하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굴종의 삶이 아닌 적극적 자유의 삶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서신은 매우 일관되고 강건합니다.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며, 흔들리지 마십시오. 다만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 그러나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답변하십시오.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그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여러분의 선한 행실을 욕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헐뜯는 그 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14~16).

선을 행함으로써 악에 맞선다는 것은 어려움을 견뎌내고 이겨낼 줄 아는 용기, 부당하고 불의한 상황에 맞설 수 있는 있는 용기, 진리를 따라 사람들을 짓누르는 권력자들과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을 뜻합니다. 그 믿음과 용기를 지니고 선한 양심으로 나아갈 때 정의로운 행동, 선한 행동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을 역설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17). 이 말씀은 의미심장합니다. 단순한 수사가 아닙니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낫다’는 것은, 엄연한 인간 실존을 말합니다. 선과 악이 뒤엉킨 현실에서 어떤 길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 길에서도 저 길에서도 난관은 존재하는 법입니다. 그 가운데서 어떤 길이 과연 가치 있는 길인지, 이 마지막 말씀은 새삼 환기하고 있습니다.

한 없이 긍정적인 교훈으로 일관하는 말씀과 현실적인 고난을 언급하는 말씀 사이에는 단절이 있고 긴장이 있습니다. 논리 그 자체로는 앞뒤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것은, 현실의 고난이, 현실의 불이익이 진정한 의를, 진실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말씀은 이렇게 집약됩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세상의 원리와는 달리 오히려 악을 선으로 갚는 가치의 전도를 동반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 삶으로 일관할 때 세상은 변화될 것이다. 사람들도 마침내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삶의 과정에서는 여전히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고통이 따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그런 상황을 경험하고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 해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희망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베드로전서의 수신자인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것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사실 때문에 심각한 박해를 겪거나 위협을 겪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이 땅에서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누리는 혜택과 영향력을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아는 기독교인들과 교회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향한 세상의 비방이 오히려 일면 정당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말씀의 뜻은 더 이상 무용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말씀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길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과는 다른 그리스도의 삶의 길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 뿐 아니라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으며 오히려 복을 비는 삶입니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법칙이라는 것을 본문말씀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을 뛰어넘고 우리의 상식지평을 뛰어넘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우리가 부단히 추구해야 할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해 절반의 열매를 누리고, 또 한해 절반을 위한 삶의 농사를 시작하는 맥추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예비하는 소중한 푯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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