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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절망적이나, 참 생명은 어디에나 있다!(렘 25:1-11 고전 9:1-14 막 8:22-26)성령강림후 여섯째 주일(7월9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07.06 22:47

1. 러시아 이동파 미술의 힘!

예술목회연구원(원장 심광섭 교수)이 매월 1회씩 온라인으로 개최하는 ‘예술신학 콜로키엄’이 있습니다. 한국 신학과 기독교를 예술과 접목하고, 예술 안에서 농익은 신학을 맺고 싶은 열망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원장인 심광섭 교수님은 연구원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삶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 예악(禮樂)이라면 복음은 문화와 예술로 생성하고 표현되어야 한다. 문화와 예술로 충분히 분해되고 녹아들어 다시 새로운 창작으로 표현되지 못한 복음은 관념이거나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과 같다.”

2020년 9월부터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줌으로 진행된 예술신학 콜로키엄이 지난 2023년 6월 26일 33회를 맞이했습니다. 참석 인원은 평균 25명, 60명에 이른 적도 있었습니다. 미술 분야가 가장 많았지만, 시, 음악, 가요, 여가, 연극, 영화, 조각과 건축, 정원, 예술과 영성, 춤 그리고 미학 등 다양한 예술 분야를 다루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제가 3년 전인 2020년 9월 콜로키엄의 첫 시작을 “신학과 영화의 만남”으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원래는 서울의 한 세미나 공간에서 시작하려고 했는데, 그때 제가 서울 올라가려고 했을 때, 코로나 상황으로 대면 모임이 불가하여 온라인 줌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계속해서 온라인 세미나로 진행되어 전국에 있는 많은 목회자나 신학 교수, 그리고 예술에 관심 있는 분들이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이나 미국, 독일, 스위스 등 외국에 계신 분들도 함께 할 수 있어서 오히려 더 풍성하고 알찬 세미나가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분들을 만날 수 있는 모임이라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 예술신학 콜로키엄 포스터

아무튼 지난 33회는 갤러리 까르찌나의 대표인 김희은 관장님이 ‘러시아 미술과 영성’에 관한 발표가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샤갈이나, 말레비치(절대주의), 칸딘스키(뜨거운 추상)의 나라로만 알았던 러시아 미술을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이동파’ 작가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이동파는 ‘이동전람파’라고도 하는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에서 탄생한 유파로, 러시아의 모든 민중에게 예술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주기 위해 여러 도시로 옮겨 다니며 전시회를 연다는 취지에서 ‘이동파’라는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미술계의 ‘민중 속으로(Going to the People)’, 러시아어로는 ‘브나로드 운동’을 펼친 유파로 평가됩니다. 이들은 당시 러시아 사회의 문제와 현실을 회화에서 다루었습니다. 따라서 반체제적인 성격을 띠고 아카데미즘의 권위주의에 대항하였니다. 이후 이동파는 러시아 혁명(1917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이반 크람스코이, 일리야 레핀, 바실리 수리코프 등이 있습니다.

오늘 세본문 말씀은 계속해서 가난한 민중들에게 베푸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지금이 성령강림절기라 그런지, 성령의 치유 역사가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러시아 이동파의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림을 통해 민중의 아픔에 동참하고 새로운 세상을 예술로 꿈꾸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예술’은 ‘예수’와 만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서 말씀은 벳새다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 이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늘 예수님은 이렇게 병들고 지치고, 고난과 가난에 찌든 사람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꼬임에 넘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 말씀은 이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역한 목이 곧은 백성들인 이스라엘의 멸망에 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서신서의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오해하고 비판합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확신하며 그 위기를 극복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세본문과 관련되는 러시아 이동파 화가의 그림을 보며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먼저 복음서 본문 말씀부터 볼까요?

2.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막 8:22-26)

벳새다는 ‘어부의 집’이라는 뜻으로 요단 동쪽, 갈릴리 바다 북동쪽에 있는 어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빌립과 안드레, 베드로의 고향입니다(요 1:44, 요 12:21). 예루살렘과 가버나움을 제외하고 다른 어떤 지역보다 복음서에 많이 나오는 지명입니다. 그런데 이곳 벳새다에서 사람들이 눈이 먼 사람 한 명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안수하지만,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안수하시자 그제야 눈먼 사람이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 뱃새다 위치

따라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능력에 의해 단 한 번의 안수로 질병이 낫기도 하지만, 점진적인 방법으로 치유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예수님의 두 번의 안수는 주께서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벳새다 맹인의 믿음 부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결국 믿음이 부족한 이스라엘 민중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꼬임에 빠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동의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끝내 배반한 것입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화가이자 러시아 상징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니콜라이 게(Nikolai Ge)의 <진리란 무엇인가?>(1890) 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키아로스크로(chiaroscuro) 기법, 곧 ‘명암법’으로 그려진 것입니다. 명압법은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고자 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감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과학적 조형 의식에 기반을 두고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에 의해 완성이 된 것입니다.

사실 명암법을 잘 활용한 이들은 렘브란트(Rembrandt)나 카라바지오(Caravaggio)입니다. 이들의 그림은 빛과 어둠의 대조적인 설정을 통해 극적인 효과를 연출합니다. 니콜라이 게의 작품 <진리란 무엇인가?>도 키아로스크로 기법으로 그려졌는데, 빛과 그림자를 대비하여 선과 악을 표현합니다.

▲ 니콜라이 게 <진리란 무엇인가?>(1890)

사실 키아로스크로는 주로 어두운 배경에 밝은 주제를 표현하거나, 밝은 배경에 어두운 주제를 표현함으로써 선과 악, 양과 음 등의 대립적인 요소를 강조하지만, 니콜라이 게의 작품에서 “그리스도는 어둠에 갇혀 신음하는 러시아 민중, 즉 선하고 도덕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자를 대변하고, 극단적 이기심으로 자신의 안위 만에 급급한 기득권층을 빌라도로 표현(갤러리 카르찌나 김희은 대표)”한 것입니다. 선과 악을 어둠과 밝음으로 교차 대조하여 명징하게 그 의미를 드러냅니다. 김희은 대표는 니콜라이 게가 톨스토이의 사상을 지지했다며 <진리란 무엇인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둠 속에서 두 손이 포박된 예수처럼 진리와 양심을 외치는 자는 외롭고 힘들 수밖에 없다. 차갑고 어두운 현실 속에 내팽개쳐질 때가 많다. 바로 진리와 선은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와 선을 향해 끊임없이 정진해야 올바른 진실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찾아야만 참다운 진리가 될 수 있음을 빌라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빌어 분명하게 전한다. 그러므로 진리를 향해 정진하는 삶이 고독하고 힘들더라도 게을리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톨스토이의 가르침이며 니콜라이 게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지금 어둠 속에서 두 손이 포박된 예수처럼 진리와 양심을 외치는 자가 힘든 세상입니다. 그리고 거짓과 불의를 일삼는 자가 밝은 태양 아래 빛을 받고 있습니다. 기막힌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당당해야 합니다. 참과 진리를 위해 싸우는 우리는 예수의 제자, 아니 작은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3. 순종하지 아니하여 모든 땅이 폐허가 되리라!

▲ 바실리 푸키레프 <불평등한 결혼>(1862)

다음 그림은 바실리 푸키레프(1832-1890)의 <불평등한 결혼>(1862) 입니다. 칠십 살은 넘어 보이는 노인과 손녀뻘 되어 보이는 여린 소녀가 백 년을 함께 살자고 가약을 맺고 있는 그림입니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은 남자가 금방 핀 한 떨기 꽃 같은 예쁜 여자 옆에 서서 결혼의 촛불을 밝힙니다. 쭈글쭈글한 남자는 제일 좋은 양복을 입고 반짝반짝 광을 낸 블라우스 리본으로 한껏 멋을 부렸습니다. 가슴에는 황제에게 하사받은 황실 훈장을 다는 센스도 잊지 않습니다. 알코올에 찌든 것일까, 너무 어여쁜 신부 모습에 수줍은 것일까,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늙은 남자는 곁눈질로 가련한 소녀를 힐끔거리고 있습니다.

백옥같이 빛나는 하얀 드레스에 우아함과 순수함까지 차려입은 청초한 여자는 ‘행복, 순결, 반드시 행복해집니다’라는 꽃말을 지닌 은방울꽃을 가슴에 달고 머리에는 아직 피지도 않은 은방울꽃 화환을 예쁘게 쓰고 축 늘어진 힘없는 손을 어렵게 내밀어 결혼반지를 끼려고 합니다. 밤새 울어 퉁퉁 부은 두 눈은 초점을 잃고 바닥을 헤매고 있습니다. 이미 포기한 맘이야 붙들어 맬 수 있지만,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애써 참으려는 그녀의 울음이 눈 주위로 붉게 일어나고 앙다문 양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습니다.

금실 은실로 겹겹이 수놓은 사제복을 휘황찬란하게 차려입은 사제는 구부정한 허리를 똑바로 펴지도 못하고 어린 신부의 미래를 옭아매려 허겁지겁 매달리고 있습니다. 늙은이와 소녀를 엮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노파는 이 결혼이 허사가 되진 않을까 노심초사 노려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의 인연에 더 얻어낼 것은 없는지 주름진 싸늘한 눈을 희번덕이고 있습니다. 특히 신랑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하객 4인방은 늘그막에 횡재한 친구가 심히 못마땅한 듯 보입니다. 배가 아파 견딜 수가 없습니다. 늙은이들의 심통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그들의 뒤틀린 시선이 그림 전체를 건조하게 만들고 얼굴에 진 주름만큼이나 겹겹이 한숨을 자아내게 합니다.

그런 그들을 그림 한쪽에서 팔짱 낀 채 우울하게 바라보는 이가 있습니다. 은방울꽃의 어린 신부와 나란히 서면 딱 어울릴 법한 턱시도의 젊은 남자는 푸키레프 자신이라고 합니다. 빚을 갚지 못하는 농노의 어린 딸을 선뜻 자신의 노리개로 취하고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한 재력으로 포장하는 현실을 작가 자신이 비통한 얼굴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가는 그림 한쪽에 야멸차게 자리 잡아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참담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조용히 호통치고 있는 것입니다(그림 해설, 김희은의 소곤소곤 러시아 그림 이야기 ⑩바실리 프키레프 ‘불평등한 결혼’ 참조). 저는 그림의 프키레프가 유다 멸망 당시의 예레미야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구약 본문 말씀을 볼까요?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원년에 유다의 모든 백성에 관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선지자 예레미야가 유다의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말하여 이르되, 유다의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 왕 열셋째 해부터 오늘까지 이십삼 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꾸준히 일렀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렘 25:1-3)

목이 곧은 백성들의 불순종의 역사입니다. 이러한 불순종은 끊임이 없습니다. 선지자를 보내도 귀를 기울여 듣지 않습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해도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일으킵니다. 앞서 복음서 말씀에서 예수님을 배반했던 당시 유대 민중들의 조상이 바로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배반하는 목이 곧은 불순종의 역사는 구약과 신약에 면면히 이어져 옵니다.

오늘 구약 본문 말씀은 당시 고대 근동 지역에서 바벨론이 앗시리아를 무찌르고(B.C.612),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 군대를 격퇴하고(B.C.605) 패권국가가 된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가 이러한 바벨론에 대항하게 되면 결국 멸망하고 70년간 포로살이를 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끊임없이 보내셨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 너희는 다른 신을 따라다니며 섬기거나 경배하지 말며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써 나의 노여움을 일으키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해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써 나의 노여움을 일으켜 스스로 해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5:4-7)

결국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보라! 내가 북쪽 모든 종족과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주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을 놀램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어지게 하리니,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렘 25:8-11)

▲ 러시아 혁명 이후 각국의 공산당 결성

바실리 푸키레프의 <불평등한 결혼>도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 당시의 분위기와 같은 분위기입니다. 결국 볼셰비키 혁명(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나 제정 러시아의 황제(차르)를 몰아내고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세상을 건설했지만, 결국은 오늘날 푸틴같은 독재자가 차르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이스라엘의 오만하고 불평등한 사회도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서 심판하신 것입니다.

서신서의 바울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의 세 차례 전도 여행 중 가장 큰 성과를 얻은 교회는 아테네 밑에 있는 항구도시 고린도 지역에 세워진 고린도 교회입니다. 사실 바울은 전도 여행 중에 그리 기대하지 않았던 도시가 고린도입니다. 왜냐하면 2차전도 사역의 마지막 종착지이자 반환점으로 찾아간 곳이 항구도시 고린도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배를 타고 에베소를 거쳐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울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도사역의 마지막 종착지이자 반환점으로 찾아간 고린도에서 바울은 아주 큰 하나님의 역사를 만나고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귀한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4. 복음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니콜라이 야로센코 <삶은 어디에나>(1888)

마지막 그림은 니콜라이 야로센코의 <삶은 어디에나>(1888) 입니다. 그림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시베리아로 유형 떠나는 죄수 수송 열차가 간이역에서 잠깐 정착하는 동안 기차 창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즐기며 빵조각을 비둘기에게 나눠 주는 가족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원래 야로센코는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소설에 깊은 감동을 하여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사람은 사랑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 존재하는 사랑 때문에 행복해진다. 그러므로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다.”

따라서 야로센코는 <삶은 어디에나>를 통해 진정한 사랑의 정의를 화폭에 담고자 했습니다. 결국 러시아 차르에 반대해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정치범들의 열차 안에도 삶이 생명이 있음을, 형극의 수형 길 앞에서도 잠깐의 햇볕을 즐기며 새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나눠줄 수 있는 여유가 있음을, 많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사랑의 실천이 아님을, 빵 조각을 나눠주는 고사리손을 통해 일깨워줍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빛날 수 있고 가난할지라도 풍요로운 영혼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엄마의 품에 안겨 미소 짓는 아기의 천진한 얼굴에서 우리는 순수의 절대 정의를 읽을 수 있으며, 혹한의 현실 앞에 굴하지 않고 찰나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혁명가들의 풍요로운 영혼을 통해서 미래의 희망찬 역사를 점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삶은 어디에서나 아름답게 빛날 수 있으며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삶에 겸손하고 진지하며 작은 사랑일지라도 실천할 것을 이 그림은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에 허덕이지 말고 현실에 발을 디디고 겸손하게 살아라, 어떤 척박한 상황에도 삶은 존재하는 것이니, 세상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라, 삶의 궁극적 목적은 화려함에 있지 않고 진솔한 모습으로 현실을 대면하며 작은 실천을 이뤄갈 때 빛을 발할 것이라고 그림은 오늘 우리에게 속삭여줍니다. 그리고 바울은 바로 그것이 복음이라고 말해줍니다. 말씀을 볼까요?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 9:11-14)

물론 앞선 말씀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정통성을 변호합니다.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모든 합법적 자유를 절제하였으며 한 영혼이라도 구원시킬 수 있다면 어떤 고난도 수용할 것이라는 복음의 열정을 언급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할까요? 사실,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에서 심혈을 기울였던 도시는 그리스 곧 헬라 문명의 중심지 아테네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종교심이 아주 풍성했기 때문입니다. 배움에 대한 열심도 대단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진리에 대한 그리고 참에 대한 탐구심이 대단했습니다. 언변도 좋았고 학식도 높았습니다. 거기다가 남의 이야기를 경청할 줄 아는 신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복음 전도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특히,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논쟁에서 오히려 조롱을 당하고 공격을 당합니다. 결국 아테네에서는 아레오바고 관리자였던 ‘디오누시오’라는 사람과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그리고 무명의 한 사람 외에는 전도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전도 여행의 종착지로 찾아간 고린도에서 바울은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울의 기억 속에 있는 고린도 교회는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에 있어서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이 풍족한 교회’이며 ‘어떠한 은사에도(사랑, 봉사, 가르침, 예언, 방언, 방언 통역 등) 부족한 것이 없는 아주 알차고 튼튼한 교회’였습니다. 물론 교회 재정도 아주 넉넉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고린도 교회가 바울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큰 상처와 염려를 안겨주게 됩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사람을 따르는 분파주의였습니다. 파당을 짓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열매로 주어진 온갖 언변과 지식의 풍족함이 오히려 공동체의 독이 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은총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은사도 역시 독이 됩니다. 남의 은사를 깔보고 자기 은사만이 최고라고 자랑하는 독선이 교회 공동체를 더욱 갈라지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개척하고 그들과 함께했던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게다가 이제는 바울의 사도권까지 의심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이렇게 반론합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고전 9:1-7)

더 나아가 바울은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며 소는 짚을 먹어야 한다. 곡식을 못 먹게 망을 씌우면 안 된다(신 25:4)라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고전 9:8-10)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보았을 때 아마도 자신의 선교 사명이 열매 맺지 못해서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의심하고 복음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미웠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은 절망적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야로센코의 작품은 오늘 우리에게 “삶은 어디나, 누구에게나 있다고, 삶의 빛은 어디에나 존재한다고!”라고 속삭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삶은 절망적이나, 참 생명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소가 짚을 먹듯이 복음의 일꾼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비록 배신의 계절과 고통의 시간이 닥쳐올지라도 믿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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