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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착각내가 하는 일을 보라(사무엘기상 16:1-13; 마태복음서 11:2-6)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07.09 14:28
▲ Mattia Preti, 「Samuel Anoints David」 ⓒGetty Images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물어 보게 하였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가나안에 들어온 후에, 그들을 인도한 지도자들을 ‘사사’ 혹은 ‘판관’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오늘날의 왕이나 대통령과는 매우 다른 지도자였습니다. 평소에는 평범한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자기 일을 열심히 하다가, 이스라엘에 중요한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서 민족을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는 그 일을 마치고 다시 자기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이런 특별한 통치방식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던 경험에서 출발합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바로라고 하는 신격화된 왕, 그 왕이 행사하는 절대 권력의 폭력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왕정제도를 몹시 경계했습니다. 인간 왕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우리를 다스릴 수 있다. 우리를 다스리는 권력은 어떤 사람이 항상 독점하고 소유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야훼 하나님이 왕이시다’ 하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자꾸 주변 족속들이 침략해서 노략질을 하고 강탈을 해가자, 이스라엘도 이런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강력한 왕정제도를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생겨나고, 결국 왕정체제를 받아들여서 이스라엘에 왕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성서는 왕정과 왕권을 비판하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흔히 역사의 승리자들이 자기 좋은대로 역사를 평가하고 서술한다고 말합니다만, 성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왕정제도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뜻대로 역사가 이루어졌지만, 왕정을 도입한게 잘 한일이었다고 일방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서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성서는 왕정체제 아래에서 기록된 본문에서조차 왕들의 잘못에 대해서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백성들이 처음 왕을 세우겠다고 요구할 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사무엘상 8장 10절 이하를 읽어 보면 그 경고들이 나옵니다. “왕이 너희를 다스리게 되면 왕이 너희 아들들을 군대로 징발할 것이다. 딸들은 끌고 가서 요리 만들고 과자 굽는 일을 시킬 것이다. 너희 밭에 좋은 것들을 다 빼앗아 갈 것이다. 세금을 엄청나게 거두어 갈 것이다. 너희 종들도 데려가서 일을 시킬 것이다.” 이 경고는 지어낸 말이 아니죠? 이스라엘이 직접 경험한 일들입니다. 또한 인류 역사에서 지금까지도 계속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런 왕정제도가 이스라엘에게, 또 역사 속에서, 나쁘기만 한 것인가요? 우리나라 역사도 보면 나쁜 왕도 있었지만, 세종대왕 같은 왕은 태평성대 문화번영을 이루었습니다. 성서는 왕에 대해서도 두 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제시합니다. 왕이 백성을 억압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백성에게 평화와 번영을 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이야기와도 통합니다. 율법이 죽음을 가져올 수도 있고, 생명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때 왕과 왕이 죽음을 가져오고, 어떤 때 왕이 생명과 복을 가져오는가? 거기에는 단 하나의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왕이 하나님만 섬겼는가? 우상을 섬겼는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는가? 자기 힘만을 키우고 믿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를 읽어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왕은 곁에 토라를 두고, 하나님의 율법을 두고 항상 그것을 읽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라는 겁니다.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왕이 되는 것, 바로 그것이 열쇠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듯이 백성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런 때 왕은 백성에게 평화를 주는 하나님의 통치자가 됩니다. 인간의 욕망 아래 놓이면 율법도 정치도 죽음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닮으면, 그리스도를 닮으면, 율법도 정치도 생명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을 닮은 정치! 하나님을 닮은 경제! 하나님을 닮은 문화! 라야 만 생명정치, 생명경제, 생명문화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통치의 원리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의 정체가 있습니다.

2.

사울이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닮지 않고, 자기 자신의 모습대로, 인간의 추악한 모습대로 통치하자, 오늘 사무엘은 새로운 왕을 기름 부어 세웁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집에 가서 그 아들들 중에 다윗을 골라 기름을 부었습니다. 왕으로 낙점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아시지만, 사무엘이 다윗을 택할 때 그 기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용모나 신장을 보지 않는다. 나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 하셨습니다. 그의 외모나, 가문이나, 언변들 같은, 소위 요즘 말하는 스펙이 아니라 사람 됨됨이를 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인가를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그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닮아있다고 판단한 사람,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바로 이 다윗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저질러서는 안 되는 못된 짓을 많이 했는데도 먼 후대에서는 이상적인 왕으로, 성군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강대국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위기를 겪을 때,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의 상징으로 다윗의 아들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 옛날 다윗 같은 사람이 다시 나타났으면 좋겠다’ 하는 소원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메시아’는 ‘다윗’이다. 다윗 자손만이 메시아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이 보편화 되었습니다.

이런 신념 때문에 예수님 시대에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 자손이냐?” 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는 헬라어이고,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다.”라고 굳게 믿고 주장합니다. 비록 마태복음서 1장의 족보는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으로 적고 있지만, 실제 예수님은 나사렛 촌 동네의 가난하고 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유대인들의 눈에는 메시아감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에서도 예수가 메시아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 예수의 제자가 된 나다나엘은 어떻게 나사렛에서 메시아가 나올 수 있는가 하고 의문을 갖기도 했습니다.

“메시아가 누구냐?”만 가지고 씨름하면 그것은 이 세계를 불행하게 합니다. 그런데도 2000년 역사에서, 그리고 오늘날에도 ‘메시아가 누구냐’ 하는 것만 가지고 이 세계가 논쟁을 벌입니다. 이슬람교에서도 이 문제 때문에 서로 갈라지고 서로 폭력을 저질렀습니다. ‘이슬람의 지도자는 반드시 모하멧의 자손에서만 이어받아야 한다’는 파와 ‘아니다. 모하멧 자손이 아니라, 모하멧과 같은 인품과 자질이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는 파가 나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현실로 바꾸어 봅시다. 기업에서도 공직사회에서도, 선거를 해서 지도자를 선출할 때도 같은 문제에 부딪칩니다. ‘저 사람의 됨됨이가 어떤가? 저 사람이 지금 어떤 자질로 어떤 일을 하는가?’ 이것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지도자를 뽑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어느 지역 사람이냐? 부산이냐 대구냐 광주냐? 저 사람이 어느 대학 출신이냐? 서울대냐 연대냐 고대냐? 스펙이 어떻게 되냐? 자격증이 뭐 뭐냐? 무슨 고시를 패스했고 무슨 시험 몇 점을 받았냐? 저 사람 아버지가 누구냐? 어느 집안사람이냐? 현대가냐 삼성가냐? 저 사람은 누구랑 친하냐? 인맥이 얼마나 좋으냐?

겉모양을 보고 환경을 보고 조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을 보고 인품과 철학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되고 나라의 정치가 휘청거리게 된 것도, 근본적으로 다 이런 이유에서 발생한 문제 아닙니까?

3.

바로 성경은 이 모든 것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왕에게 기름을 붓는 사무엘에게 “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 겉이 아니라 사람의 속을 본다.”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말을 마태복음이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누가 메시아냐?”하는 문제를 “메시아가 무슨 일을 하느냐?”하는 문제로 180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예수께 묻습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 맞습니까?” 이 말은 “약속된 메시아가 예수님 당신입니까?”하고 묻는 말입니다. 왜 그러지요? 메시야가 와야 하는데, 구세주가 와야 하는데, 사람들은 누가 메시야인가?를 놓고 헛된 생각에 빠져버렸던 겁니다. “다윗왕의 후손이어야 해. 풍채도 좋고 용모도 빼어난 사람이지. 학벌도 좋고 가방끈도 길어야지. 서울대 나와야지. 박사학위도 있어야지. 어디 출신이야? TK? PK? 전라도? 광주? 그래 출신도 좋아야지!”

이게 무슨 소립니까?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안 보고,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인지는 안 보고, 엘리압이 멋지네, 아비나답이 그럴듯하네, 삼마가 훌륭하네 하면 무슨소용이냐는 겁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십니다. 다만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으로 보듯이 나는 병자를 고치고,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고, 절름발이를 일으켜 세우고,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한다.” “내가 하는 일을 보고서 믿어라(요14:11).”

예수님의 제자들은 비록 비천하고 무식했는지는 모르지만 아주 지혜롭고 날카로운 현자들이었습니다. “메시아가 누구냐?”를 “메시아는 어떤 일을 하는가?”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다윗의 핏줄이니, 베들레헴이니, 예루살렘이니 하는 말에 휘둘리지 않고, 비록 천한 나사렛 사람이지만 예수가 하는 일을 보고, 그가 하는 일이 하나님을 닮아있음을 보고, 예수가 메시아임을 알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메시아인 것은, 그가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도 아니고 그가 용모가 뛰어나서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지만, 그가 메시아인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어서도 아닙니다. 그가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다 보니까 십자가 위에 죽기까지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교리적으로만 생각하면 잘못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 맞지요. 하지만, 십자가의 죽음이 구원의 조건이라거나 구원의 대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에서의 속죄양처럼 ‘양을 바치면 죄를 씻어줄게’ 하는 그런 대속물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다보니, 끝까지 사랑하다보니 어느 샌가 자신이 죽어있었던 것입니다. 죽기까지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하고 또 사랑했던 것입니다.

4.

갈라디아서 5장을 보면 매우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뭘까요? 네, 성령의 열매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합니다. 당신들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옛날의 잘못된 삶을 벗어버리십시오.

“구원받았는데, 새생명 얻었는데, 그러면 됐지. 성령의 열매가 뭔 필요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백날 구원 받으면 뭐합니까? 구원받은 사람이 육체의 정욕과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원수맺음과 시기와 성냄과 분쟁과 분열과 질투와 술취함과 놀음과 향락에 빠져 있으면 됩니까? 그래도 ‘나는 구원받았어!’ 하면서 당당합니까? 그리스도가 메시아가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 구원하지 않고, 핍박하고 억압하고, 그렇게 살아도 됩니까? 그래도 하나님이 보냈으면 메시아입니까? 사울은 하나님께 기름부음받았지만, 그가 하나님의 일을 그만둔 순간, 그 기름부음은 하나님이 없던일로 삼아버리셨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들은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습니까? 성령이 바라시는 대로 살고 있습니까? 겉보기에만 그럴듯한 다윗의 형들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다윗처럼 속마음을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가꿔가고 있습니까? 삶 속에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까? 예수께서 메시아의 겉모습을 신경쓰지 않으시고, 과연 메시아의 삶을 사는 일에만 매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그리스도인 된 삶을 살고 있느냐는 겁니다.

성령으로 얻은 새 삶을 성령이 인도해 주시는 대로 살아갑시다. 성령의 열매를 맺어봅시다. 메시아가 무슨 일을 하는지 그 삶으로 보여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우리 삶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살자고 비통한 심정으로 간절히 애원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다윗의 핏줄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몸소 행하셨기 때문에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 그 분과 한 몸 되기 위해서 세례 받고 이렇게 교회로 모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그 위대한 메시아 공동체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보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도 세상을 향해 ‘우리가 하는 일을 보십시오’ 하고 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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