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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바이를 댈 수 없다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계(로마서 5:1~11)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3.07.18 23:44

사도 바울의 서신 로마서는 어느 대목을 보더라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때그때 교회의 문제 상황에 대처하여 해답을 모색한 다른 서신과 달리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모두 동원하여 자기 생각을 일관된 논지로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말씀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설파하고 있는 대목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를 가장 함축적으로 말하고 있는 말씀이라 해도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이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분의 삶과 죽음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 말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비로소 이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믿는 것이 과연 사람들에게 어떤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 힘주어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의 요체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바로 앞의 말씀(4:25)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 앞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은 표본으로 아브라함에 관해 이야기했던 바울은 여기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시고,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4:25)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었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났다는 명제는 전통적으로 대속론의 근거가 되어 왔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죄인을 대신해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 덕분에 처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면 감격할 뿐 아니라 감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나아가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면하게 해 주신 분의 숭고한 뜻을 따라 그 뜻을 실현하는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속론의 효과가 이렇게 귀결된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대속론은 오용되어 왔습니다. 일종의 주술적 효과를 지닌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였으니, 우리에게 더는 죄가 없다는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찰적이며 실천적인 삶으로 인도하기보다 주술적인 안도의 세계로 인도하였습니다. 그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 자신에게는 물론 살고 있는 세계 안에 그 어떤 변화가 없어도 그저 안주하는 삶을 정당화해주었습니다. 저마다의 주관적 믿음만 강화해줄 뿐 아무런 변화 없는 인간, 아무런 변화 없는 세상을 정당화하는 편리한 도구로 오용되어 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이 그렇게 현실을 정당화는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은 전혀 새로운 사건, 곧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세계를 향한 출발점입니다. 본문말씀은 그 진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먼저 믿음으로 이르게 되는 삶의 궁극적 목적을 선포합니다. 믿음은 곧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삶의 의미와 궁극적 목표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평화는 단지 마음의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뜻하며, 또한 동시에 땅 위에서 이뤄져야 할 현실을 뜻합니다. 믿음은 바로 그 궁극적 목적을 향한 출발점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개역성경). 이 말씀은 그저 고상한 도덕률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형성하는 평화는, 지금 주어진 세계와의 타협적인 평화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주어진 세계에서 갈등을 야기합니다. 환난은 그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러나 그 환난은 인내를 낳습니다. 인내는 그저 참는 것이 아니라 악에 대항하는 용기를 뜻합니다. 거기에서 고매한 인격이 형성됩니다. 연단, 곧 단련된 인격입니다. 이는 희망의 근거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당대 그리스적 논법과 개념에 따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나는 인간을 이렇게 해명합니다.

믿음을 가진 인간은 새로운 주체로서 새로운 인간입니다. 성령으로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입니다(5:5).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자기 한계를 완전히 초월하여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 새로운 인간의 삶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 새로운 인간의 탄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아니라 죽음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보편사적인 사건으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봅니다.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랑을 나타내신 사건으로 봅니다.

그 사건을 대속론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잔인한 하나님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법도 하지만, 말씀의 초점은 하나님이 아들을 죽이기로 예정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도 깨닫지 못했던 진실을 예수님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데 말씀의 참뜻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처해 있는 상황을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야 비로소 인식하고 살아갈 방도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 Titian, 「The Carrying of the Cross」 ⓒPublic Domain

오늘 우리에게 아리송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어땠을까요? 사실은 사도 바울 당대의 사람들에게도 금방 이해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이, 인간의 죄를 온전히 드러나게 하는 사건이고, 그런 의미에서 역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사건이었다는 것은 당대 사람들에게 황당한 이야기였습니다.

바울이 예수의 죽음을 인간 구원을 위한 보편적인 사건으로 이해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이 율법을 따르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자기 의를 비판한 것은 단지 유대인만을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한 표본으로서 유대인을 겨냥한 것뿐이지, 사실은 또 다른 형태로 그 자기 의를 내세우는 그리스인을 비판하고 있으며, 나아가 모든 인간의 자기 의를 비판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경험하고 있던 세계에 대한 인식, 곧 로마세계에 대한 인식을 보여줍니다. 예수의 죽음은 바울이 경험한 그 세계와 떼어놓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예수가 단지 유대의 율법을 어겨 돌에 맞아 죽었다든지, 아니면 로마제국에 무장봉기를 일으켜 처형당했다면 어땠을까요? 유대의 율법을 어겨 죽었다면 그와 상관없는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로마제국의 지배에 군사력으로 항거했다면 당연한 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특정한 체제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그 죽음이 보편적 성격을 지니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사건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그저 진실을 선포했고 사랑을 실천했을 뿐인 그분이 로마의 정치범으로 처형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 사건을 바울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을 나타낸 사건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저 변방의 한 사내가 죽은 사건을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얼마나 황당해 했을까요? 그러나 바울에게는 그 ‘황당함’이 더 없이 좋은 빌미였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일개 촌부의 죽음이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사형집행인이었던 총독 빌라도마저도 이유를 알 수 없어 하면서도 결국 죽음에 이르도록 충실한 집행자 역할을 맡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죽음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거기에서 모든 사람이 그 죽음에 연루되었다는 진실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그 세계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그 죽음과 연루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단지 사랑을 이뤘을 뿐인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 체제의 현실, 바로 거기에 어떻게든 모든 사람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고난을 겪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른 사건의 보편적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은 그 체제 자체, 그리고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입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사건이 되는 것은,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모두 예수를 죽게 만든 죄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알아야 그로부터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곧 구원의 가능성으로 직결됩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나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사악한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선하고 의롭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무고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체제에 연루되었다고 하면 억울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의 의미를 새기는 바울의 선포는, 인간 스스로의 실존을 밑바닥 근원의 차원에서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인간의 삶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깨닫고 진정으로 새로운 인간으로서 새로운 세계를 희망하고 살도록 일깨웁니다. 그것은 인간의 무력함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가능성에 인간 스스로를 내맡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는 사람만 알고 있을 뿐 그 밖의 사람들은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한 사건을 환기하며, 그 사건이 지니는 인간 위기의 상황과 인간 가능성의 상황을 동시에 통찰하고 그 보편적 의의를 역설합니다. 이로써 바울은 인간에게 나락에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전망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역설하는 진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예민한 감각으로 스스로의 삶과 세상의 현실을 돌아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이루는 평화를 추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믿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삶과 죽음으로 그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궁극적 목적은 단지 마음의 평화로 그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거듭나는 인간, 진정으로 정의로운 세계를 통해 구현되는 평화입니다.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5:3~4)

이 말씀의 의미를 거듭 새기기를 바랍니다. 강요된 세상의 거짓 평화를 넘어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번거롭고 성가시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악에 대항하며 버티는 힘을 더해줍니다. 이로써 인간은 스스로를 아무렇게나 내맡겨버리지 않고 단단한 주체로 단련됩니다. 그 가운데 희망을 굳게 붙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인격수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세계에서 어떤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삶의 태도를 익히는 한편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심하지 않고 우리의 적극적 의견을 펼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 믿음으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펼치며 희망을 주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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