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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겔 23:1-10 살전 1:2-10 막 9:2-13)성령강림후 여덟째 주일(7월23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07.21 13:42

1. 푸틴 치하 러시아를 이해하는 세 가지 키워드

1990년 걸프전에 전투 지휘관으로 참여하였으며 트럼프 정부의 안보 보좌관으로 근무했던 전쟁 사학자인 H. R. 맥매스터가 쓴 책 가운데 『배틀그라운드』(교유서가, 2022)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에 걸맞게 현재는 물론, 언젠가 미국과 갈등을 빚거나 국제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러시아, 중국, 남아시아, 중동, 이란, 북한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최대 압박 외교 등 강경 정책을 편 인물로, 미국의 입장과 시각이 잘 반영되어 있지만, 전략적 자아도취에 빠진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여러 차례 각을 세우다가 1년여 만에 ‘트위터 해임’을 당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선입견을 버리고 보면 상대를 섣불리 타자화하는 대신, 미국의 국가안보와 관련한 주요 외교정책과 상대 국가의 현실에 대해 비교적 중립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 책에서 푸틴 치하의 러시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키워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실로비크’(silovik, 강한 사람들), ‘올리가르히’(Oligarch, 신흥재벌), ‘상트페테르부르크’입니다. 먼저 실로비크는 러시아어로 ‘강한 사람들’(strongmen)’을 뜻하는데, 이들은 푸틴과 마찬가지로 케이지비(KGB), 군대, 경찰 같은 정보 공안기관 출신 인사들을 뜻합니다. 우리로 치면 검찰 공화국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푸틴 시대 러시아는 “케이지비 요원 출신들의 새로운 천국”이 되었습니다. 가령 푸틴이 대통령에 선출되기 전까지 4%에 불과했던 정부 내 케이지비 요원 비율이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 무려 58.3%까지 치솟았습니다(지금 대한민국도 검찰 출신이 정부 내는 물론, 중요한 공공 단체에 들어간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로 올리가르히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및 그 외 과거 동유럽 지역의 경제를 장악한 특권계층을 말합니다. 대부분 소련 공산당 관료 출신이거나 그들의 지원을 받은 사람들로서 거대 재벌로 성장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 올리가르히는 현대 러시아의 초창기 기득권 계층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푸틴은 집권 초기 올리가르히 세력을 대거 숙청함으로써 국가 경제의 정상화와 민심을 동시에 얻을 수 있었습니다(우리나라로 치면 군사정권의 비호를 받은 재벌 대기업을 개혁한 것입니다).

세 번째로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Petersburg)는 말 그대로 ‘성 베드로의 도시’인데,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도시입니다. 푸틴의 고향이죠? 이 말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러시아 초창기 기득권 계층이었던 올리가르히는 푸틴과 협력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배임이나 횡령 혐의로 체포되거나 심한 경우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푸틴은 이들의 빈자리에 이른바 ‘대통령의 사람들’로 채웠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이었습니다(우리는 강남, 경상도라고 할 수 있겠죠?). 한때 러시아에서는 이곳 출신이면 글만 읽을 줄 알아도 고위직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20년 넘게 러시아를 통치하며 대통령의 사람들로 정・재계를 채워 온 푸틴입니다. 이렇게 내부적으로 독재 체제를 강화한 푸틴이 이제 외부적으로 러시아를 강화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물론, 지정학적 위치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지금 대한민국도 푸틴의 길로 갑니다. 비록 1년이지만 푸틴의 20년 세월과 맞먹습니다. 나라가 작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험한 것은 그 마지막에 전쟁이 있다는 것입니다.

검찰과 독점 재벌, 그리고 이들에 기생하는 언론, 그리고 경상도의 무지한 카르텔이 러시아를 본받습니다. 소련의 핵물리학자로 1975년 소련에서 인권 향상을 위한 운동을 전개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지식인이자 인권운동가였던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국의 국민조차 존중하지 않는 국가가 어떻게 이웃 국가들을 존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렇습니다. “자국의 국민조차 존중하지 않는 국가가 강한 이웃 국가들은 왜 그리 존중하는가?”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전형적인 사기꾼 기질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자기 백성을 존중하지 않고 이웃 강대국을 의지하는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약 말씀이 그렇습니다. 사마리아라 불리는 북 왕국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으로 불리는 남 유다의 타락을 에스겔 선지자는 행음하는 한 어머니의 두 딸로 비유합니다. 이들이 행음하는 대상은 바로 주변 강대국 앗수르와 바벨론, 애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중동 지역 팔레스타인에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 남북은 각각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이들과 동맹을 맺었으며 종교적으로는 우상들을 들여와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행위를 자행했습니다. 결국 그 마지막은 강대국에 의해 멸망 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동북아에 있는 한반도의 남북도 같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로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님을 소망의 인내로 기다립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제대로 서면 됩니다. 강자에겐 강하고 약자에게 한없이 약했던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으면 됩니다. 이렇게 한국교회가 아니, 우리가 모두 참된 예수님의 제자, 나아가 제대로 된 종교의 기능을 회복할 때 한반도에 참된 평화가 임할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서 말씀은 참 종교의 기능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구약 말씀을 볼까요?

2. 오홀라, 오홀리바, 심판받다!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두 여인이 있었으니, 한 어머니의 딸이라. 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어렸을 때에 행음하여 그들의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나니, 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겔 23:1-4)

이름이 ‘나의 장막’이라는 뜻의 첫째 오홀라는 앗수르인과 연애했습니다. 이 비유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라는 강대국에 의지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이것을 이스라엘이 행음한 것으로 표현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오홀라가 내게 속하였을 때에 행음하여 그가 연애하는 자 곧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사모하였나니, 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준수한 청년이요, 말 타는 자들이라. 그가 앗수르 사람들 가운데에 잘생긴 그 모든 자들과 행음하고 누구를 연애하든지 그들의 모든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혔으며 그가 젊었을 때에 애굽 사람과 동침하매,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으며 그의 몸에 음란을 쏟음을 당한 바 되었더니, 그가 그때부터 행음함을 마지아니하였느니라.”(겔 23:5-8)

따라서 하나님은 오홀라가 앗수르와 연애하므로 앗수르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과하게 이야기하자면, 북한을 중국과 러시아의 손에 넘기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러므로 내가 그를 그의 정든 자, 곧 그가 연애하는 앗수르 사람의 손에 넘겼더니, 그들이 그의 하체를 드러내고 그의 자녀를 빼앗으며 칼로 그를 죽여 여인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그에게 심판을 행함이니라.”(겔 23:9-10)

오늘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에스겔은 동생인 오홀리바에 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오홀리바는 그 이름의 뜻이 ‘그녀 안에 나의 장막이 있다’라는 뜻인데, 그녀도 앗수르와 연애를 합니다(겔 23:11-12). 그리고 이후에는 갈대아, 곧 바벨론과 연애합니다(겔 23:13-14). 결국 하나님은 갈대아와 연애한 오홀리바를 갈대아인에게 넘기십니다(겔 23:16-21).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는 것입니다. 지금 남한이 일본과 미국과 연애하면, 결국은 일본과 미국의 손에 넘기신다는 의미일까요?

앞서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말, “자국의 국민조차 존중하지 않는 국가가 어떻게 이웃 국가들을 존중할 수 있겠는가?”를 인용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자국의 국민도 존중하지 않는 국가가 강한 이웃 국가들은 왜 그리 존중하는가?”를 물었죠? 바로 오 홀리어와 오홀리바의 모습입니다. 지금 한반도의 북쪽은 핵과 미사일을 의지하고, 남쪽 역시 강대국의 핵항공모함과 핵잠수함을 의지합니다.

전국적으로 폭우로 인한 인명 피해가 극심한 6월 19일 부산 해군작전사령부 부두에 미국 핵 추진 탄도유도탄잠수함 ‘켄터키함’이 입항했습니다. 이 잠수함은 개당 5t이나 하는 핵미사일 24발을 탑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1,600배나 되는 위력을 자랑합니다. 사정거리는 1만 2천km로 북한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까지 공격할 수 있는 미사일입니다. 지금 한반도 남과 북은 이렇게 전쟁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남북 모두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강대국을 의지하며 같은 민족끼리 싸우려고 전쟁을 준비합니다. 기가 막힙니다.

▲ 6월 9일 부산 해군작전사령부 부두에 입항한 미국 핵 추진 탄도유도탄잠수함 ‘켄터키함’에 탑승한 대통령

그러나 서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러한 절망 가운데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서면 됩니다. 오늘 서신서에 나오는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로,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님을 ‘소망의 인내’로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데살로니가 지역뿐 아니라,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3.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

“우리는 언제나 여러분 모두를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의 믿음의 활동과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꾸준한 희망을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택해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살전 1:2-4)

▲ 마게도냐와 아가야 위치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합니다. 늘 기도할 때 데살로니가 교회를 빠뜨리지 않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그리스 반도는 크게 북부와 남부로 나누어집니다. 그리스의 북부를 마게도냐라고 부르고 남부를 아가야라고 부릅니다. 데살로니가는 그리스의 북부 곧 마게도냐의 행정수도이고 남부 아가야의 수도는 고린도입니다. 데살로니가는 항구 도시로 바울 당시에도 20만 명이 살던 대도시였습니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과 실라는 이곳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17:1-9).

바울은 이 회당에서 연속 3주 동안이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를 살펴보면 바울이 그때 전한 말씀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바울은 아마도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에 관해 말씀을 선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고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뜨거운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그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이 그저 말만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굳은 확신으로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여러분을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많은 환난 중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을 가지고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뿐만 아니라 주님까지 본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에 있는 모든 신도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으로부터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방에 두루 퍼져나갔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하느님을 잘 믿고 있다는 이야기가 사방에 널리 퍼져나갔으니 그 이야기는 더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살전 1:5-8)

이렇게 데살로니가 교회의 뜨거운 신앙이 그리스 각처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의 신앙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칭찬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우리가 여러분에게 갔을 때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또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려서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는지는 오히려 그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날을 여러분이 고대하게 되었다는 것도 그들이 널리 전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장차 닥쳐올 하느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내 주실 분입니다.”(살전 1:9-10)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의 신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장차 닥쳐올 하느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내 주실 분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고대입니다. 그렇습니다. 한반도의 전쟁 위기는 그리스도의 평화로 막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들고일어나야 합니다. 강대국을 의지하지 말고, 민족끼리 서로 소통하라고 외쳐야 할 것입니다. 원수가 되었던, 에서와 야곱도 다시 만나 화해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4. 민족해방론자 모세, 민중해방론자 엘리야를 넘어 예수의 십자가 구원은?

이를 위해 교회는, 종교는 제 기능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교회의 참된 기능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막 9:2-6)

제자들과 높은 산에 올라간 예수님이 변형이 되어 그 옷에 광채가 납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의논합니다. 바로 변화산 사건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킨 지도자요(민족 해방자),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을 아합과 이세벨의 손에서 지켜낸 인물입니다(민중 해방자). 이때 베드로는 황홀경에 빠져 이 높은 산에 초막 셋을 짓자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산에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민족과 민중 해방을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뜻일까요? 계속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막 9:7-10)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에 관해 이해하지 못합니다. 메시아의 정체성에 대해 그저 민족을 해방하고, 민중을 해방하는 것에 매몰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넘어서섭니다. 인류의 평화, 인류의 구원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바로 십자가임을 보여주십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이러한 뜻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니 모세의 사명은커녕, 엘리야의 사명도 깨닫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왔으나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다고 책망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막 9:11-13)

지금 모세와 같이 민족을 위하는 지도자, 엘리야와 같이 백성을 위하는 참된 지도자가 없습니다. 제대로 된 교회와 교인도 없습니다. 민족을 사랑하고 백성을 위하는 교회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참된 제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하는 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만이 희망입니다. 정말 제대로 된 교회와 교인을 세워야 이 나라와 민족에, 미래가 있을 것입니다.

5. 비 개신교인들의 개신교 호감도 6.8%(불교 32.9, 가톨릭 29.9)!

▲ 한국인의 종교 생활과 의식조사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는 2012년부터 5년 주기로 ‘한국인의 종교 생활과 의식조사’를 2023년 1월 진행해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 생활과 의식조사』(대한기독교서회, 2023)를 발간했습니다.

조사 결과 종교가 있다고 답한 이는 36.6%에 그쳤습니다. 2017년 사상 처음으로 무종교인이 과반인 53.4%를 차지했는데, 이번엔 63.4%로 더 늘었습니다. 종교를 갖지 않는 이유로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28.1%)보다 종교에 관한 관심이 없어서(39.7%)라고 답한 비율이 높다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애정이 있어야 비판이라도 하는데 지금은 아예 무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개신교인 가운데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지 않는 ‘안 나가’ 성도인 일명 가나안 교인은 1998년 11.7%에서 시작해 올해 29.3%로 늘어났습니다. 코로나 이전인 2017년과 견주어도 6% 포인트 증가했고, 2012년과 비교하면 비율상 3배나 증가한 것입니다. 이들이 가나안 성도가 된 이유로는 31.4%가 ‘얽매이기 싫어서’, 18.0%는 ‘코로나19 때문에’, 15.8%는 ‘목회자들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가 있어서’, 11.0%는 ‘교인들이 배타적이고 이기적이어서’라고 답했습니다.

비 개신교인의 종교별 호감도의 경우는, 물론 예상은 했지만 놀랍습니다. 질문은 이렇습니다. “본인이 믿고 있는 종교를 제외하고 다른 종교의 호감도는 어떤가?”를 조사한 결과, 비 개신교인들은 호감 있다(매우+어느 정도) 답변으로 불교(32.9%)를 첫 순위로 꼽았습니다. 이후 가톨릭(29.9%), 유교(11.3%)가 뒤를 이었고, 개신교(6.8%)와 샤머니즘(3.9%)은 동격 수준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코로나19 당시, 개신교의 감염증 대처와 연관이 있다고 리포트는 말합니다. 개신교인은 코로나19 때 개신교가 대처를 잘했다는 응답이 30.7%, 보통은 31.3%, 대처를 잘못했다가 33.1% 순으로 답했습니다. 그러나 무종교인은 개신교의 코로나19 대응에 대해 2.9%만이 잘 대처했다고 답했습니다. 보통은 18.9%였고, 무려 65.6%가 대처를 잘못했다고 응답했습니다.

개신교가 코로나19로 가장 타격을 입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개신교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팬데믹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 10:26).” 불의한 개신교, 타락한 개신교의 민낯을 코로나19가 벗겨주었던 것입니다.

이제 코로나19 대응을 잘했던 2.9%의 교회가 그나마 교회에 신뢰를 가진 6.8%의 사람들과 정말 제대로 된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아니 제대로 된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그때 한국교회에 미래가 있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 남부산용호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가 되고, 제대로 된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지역과 부산 남구, 부산지역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현재의 위기에서, 또한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질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충성, 봉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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