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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양식을 비같이일용할 양식(출애굽기 16:1~18)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3.07.25 23:48

출애굽기(Exodus)는 그 이름이 함축하듯 매우 극적인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제국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사람들이 자유를 향하여 탈출한 사건은 그 자체로 극적입니다. 하지만 출애굽기는 그 단순명쾌한 사건 하나를 극적으로 전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자유를 향한 여정이 어떤 것인지 아주 세밀하게 통찰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장대하면서도 세밀한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극적인 사건 안에서 펼쳐지는 인간 삶의 실존적 정황을 그 어떤 이야기보다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에게 스스로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성서 가운데 가장 빛나는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말씀은 이른바 ‘만나와 메추라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헤맬 때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어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 주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줬다는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16장 전반에 걸쳐 드러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황을 잘 들여다보면, 인간의 실존적 정황을 분명하게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는 동안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세월을 살았습니다. ‘노예’라는 말 자체가 더 이상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자유나 권리가 있을 턱이 없고 그저 말하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히브리 노예들은 주전 12세기경, 오늘날까지 그 유적이 남아 있는 람세스를 건설하는 데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적어도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겪은 고통은, 성서가 전하고 있는 그대로였습니다. 오늘날 첨단의 중장비들이 동원되는데도 커다란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는 인간들의 말할 수 없는 수고가 따릅니다.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는 고대의 상황에서 거대한 건축물을 지었을 때 거기에 동원된 사람들이 어떠한 처우를 받았을까 하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만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을 못 이겨 울부짖었고, 그 울부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께서 마침내 모세라는 지도자를 보내 그들을 이집트에서 탈출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해방시켜 준 하나님께 감격하였고 그 기쁨을 절절하게 노래했습니다. ‘모세의 노래’(15:1~18)와 ‘미리암의 노래’(15:21)는 그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그 지도자들만의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인도를 따라 나선 모든 히브리 백성의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해방자 야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합니다. 그 어떠한 역경이 와도 자신들을 고난의 현실로부터 해방시켜 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릴 것 같은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본문말씀은 이와 전혀 다른 분위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난 지 한 달이 지나고 두 번째 보름을 맞이한 시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사자 모세와 아론 앞에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는데, 그 기쁨과 믿음이 어디로 갔는지 이제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두 달도 안 되어 광야 생활의 고달픔에 지쳐 버렸습니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님의 손에 넘겨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16:3). 역경 앞에 나약해지는 인간의 상황을 말합니다. 안락을 위해 자유를 팔아먹는 인간의 정황입니다.

이들이 이집트에 있을 때 말 그대로 ‘고기 가마’를 옆에 두고 배불리 먹고 살았을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요즘 스태미너 식품으로 새삼스럽게 인정받는 마늘의 원산지가 나일강 유역인 까닭에, 아마도 이집트의 노예들에게 그 마늘을 먹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들이 변변한 음식을 먹어가면서 노동을 했을 리 없습니다.

중세 유럽에서도 농민들은 겨우 하루에 풀죽 한 그릇 정도밖에는 먹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먼 옛날로 갈 것도 없습니다. 제 어린 시절에 보면 우리 어머니들이 벽이나 방 도배를 할 때 쓰고 남은 풀죽이 아까워 버리지 않고 먹고 한 끼를 때우는 경우도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삼시 세끼 풍요를 누린 것은 아주 짧은 역사 안에서의 경험일 뿐입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변변한 음식을 먹어가면서 살았을 리 만무합니다.

그럼에도 이집트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한 것은 해방을 향한 여정을 고달프게 느끼는 이스라엘 백성의 환상이요 착각일 뿐입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유가 속박당할 때는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치지만 정작 자유를 얻고 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거꾸로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누군가의 속박을 받으려 합니다. 뭔가 자기 마음껏 해보려고 애를 쓰다가도 정작 그 기회가 왔을 때, 부딪히는 어려움 때문에 하고자 했던 일을 실행하지 못하는 인간 삶의 한 단면입니다. 이집트의 고기 가마는 바로 그 퇴행을 상징합니다. 가나안 복지를 향해, 해방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우리 모든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원망하며 탄식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어떻게 하셨을까요? 언제나 인간에게 결단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지만, 오늘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시고 있다는 점입니다. 빵과 고기, 곧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십니다. 이 사실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절대적 궁핍의 상태에 빠져 있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백성들에게 무조건적인 금욕이나 절제를 명하지 않습니다. 몸을 지닌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고기 가마라는 허상을 그리며 하나님의 길에서 돌아서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일용할 양식이자 동시에 생명의 양식이었으며, 육의 양식이자 동시에 영의 양식이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신 이 사건 가운데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신비한 비결이 담겨 있습니다. 이 점이 더더욱 흥미롭습니다. 이 이야기는 육신의 양식이자 동시에 영의 양식, 땅의 양식이자 동시에 하늘의 양식을 한꺼번에 누리는 비결을 담고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민수기(11:4 이하)는 만나에 물린 백성에게 고기를 제공하는 뜻에서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다고 합니다. 출애굽기의 본문말씀은 메추라기에 대해서는 간략히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만나에 대해서 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만나는 서리처럼 보이기도 하고 싸라기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고수 풀(미나리과에 속하는 풀)의 씨앗과 같이 생겼고, 그 맛이 꿀을 섞은 과자와 같다고 합니다(16:31). 백성들이 “이게 뭐냐” 곧 “만 후”라고 한 데서 만나라는 말이 생겼다고 성서는 전하고 있습니다(16:15).

▲ James Tissot, 「The Gathering of the Manna」 (1896-1902) ⓒWikipedia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식구 한 명에 한 오멜씩 거두라고 했습니다. 한 오멜은 2.3리터, 또는 1되 2홉 정도 되는 분량입니다. 백성이 그 명을 따라 거두어들이니, 개중에는 많이 거두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두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제 각기 먹을 만큼만 거두어들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만나의 신비, 일용할 양식의 신비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부족하지 않을뿐더러 남아도는 것 또한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어지는 말씀(16:19 이하)은 더 상세하게 말합니다. 그것을 더 많이 거두면 썩어서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났다고 합니다. 축적된 물질의 부패, 그것에 기초한 인간관계의 타락을 말합니다. 만나 이야기는 혼자만의 욕망 충족을 위해 양식을 쌓아둘 때 그 양식은 부패해버리고 마는 이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용할 만큼 양식을 나누라는 이야기요, 나아가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그것을 필요에 따라 나눌 줄 아는 진정한 물질의 주인으로 살아가라는 것을 일깨웁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필요를 충족하는 삶의 진실을 알면 인간은 더불어 충분히 자유를 누리며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만나 이야기는 출애굽 여정의 한 에피소드로 그치지 않습니다. 만나가 함축하는 일용할 양식은 성서를 꿰뚫는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께서는 주의 기도(마태 6:9~13, 누가 11:2~4) 가운데서 일용할 양식의 충족을 중요한 기도제목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 노동자의 비유(마태 20:1~16)가 필요의 충족을 임금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 역시 일용할 양식의 의미를 환기합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사람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고(마태 14:13~21, 마가 6:30~44, 누가 9:10~17, 요한 6:1~14) 나아가 스스로를 생명의 양식으로 말씀하신 것(요한 6:22~59)은, 일용할 양식의 충족을 위한 나눔의 기적을 일깨운 것이자 동시에 그 삶을 사람들 가운데서 이루신 당신의 삶의 의미를 일깨운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과 영원한 생명의 양식의 의미를 결부시키고 있는 것은 영적인 삶 자체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삶 가운데 구현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만나 이야기, 곧 모두가 함께 누리는 일용할 양식의 충족이 갖는 의미는, 오늘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경제생활의 원칙과 더불어 행복한 인간 삶의 길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의 충족으로서 만나 이야기는 경제생활 법칙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교훈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실로 엄청난 상상력과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요체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유산을 모두가 공평하게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타적 소유로 누군가에게는 넘쳐나지만 누군가에게는 결핍의 고통이 주어지는 현실이 용인되어서는 안 됩니다. 누구에게든 넘쳐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물질의 향유가 경제의 제일법칙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능력이나 업적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이 필요를 충족하며 삶을 향유하는 것입니다.

인류사회는 부의 불평등 곧,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여러 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가장 오랜 동안 지속하는 형태 가운데 하나가 자선과 시혜입니다. 많이 누리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위해 베푸는 것입니다. 그 다음 상호부조 내지는 공공부조 형태가 있습니다. 서로 힘을 모아 필요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업적주의에 따른 보상의 원칙이 확립되었습니다. 능력만큼 일하고 기여한 만큼 받는 방식입니다. 사회보험이 그 형태입니다. 요즘 논란이 되는 실업급여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국가가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 일하면서 기여한 몫을 절박한 필요에 따라 되돌려 받는 것입니다.

2022년 고용보험기금 결산을 보면 사용자와 노동자가 기여한 몫이 16조원 가량이고, 재정 전입금은 1조3천억원 정도입니다. 그나마 코로나 위기로 긴급 투여한 까닭에 그 비중이 조금 늘었을 뿐입니다. 그런 것을 두고 실업급여를 ‘시럽급여’라고 폄훼하며 줄이겠다고 국가가 왈가왈부해서는 안 됩니다. 업적주의 원칙, 기여의 원칙마저 부정하며 국가가 노동자의 돈을 강탈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업적주의가 최상의 방식은 아닙니다. 이미 주어져 있는 공유자산을 분명히 확인하고 이를 함께 나눠야 한다는 인식이 오늘날 확산되고 있습니다. 기본소득이 그 예입니다. 자연적인 부와 역사적인 지식, 그리고 정보 자산은 마땅히 공유되는 것이고, 이로 인한 부는 함께 나누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는 일용할 양식의 충족으로서 만나의 정신, 곧 하나님의 정의를 오늘의 시대 가운데 구현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일용할 양식의 충족으로서 만나 이야기가 함축하는 더욱 중요한 진실은, 그것으로 진정한 인간 삶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 때문에 허덕여야 할까요? 다 먹고사는 것으로 허덕이고 있습니다. 절대빈곤의 상황에서는 그럴 수 있지만, 이토록 풍요로운 세상에서 어째 사람들이 그렇게 허덕여야 할까요? 삶의 질서가 서로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짜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기대합니다. 적절히 일하고 적절히 쉬며 적절히 문화생활을 향유하고자 기대합니다. 모두에게 기본적인 필요가 충족된다면, 인간이 단지 먹고사는 문제에 몰입하여 아웅다웅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아주 다양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는 가운데 기쁨을 누릴 수 있고, 그야말로 작은 행복으로 만족할 수도 있고, 나아가 더욱 창의적인 발상으로 놀라운 일들을 만들어내고 기쁨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영적으로 고양된 삶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일용할 양식, 만나가 충족된다면 인간의 가능성은 훨씬 고양될 수 있고, 더욱 고상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만나 이야기 가운데서 그 진실을 깨닫고, 희망을 지니기를 바랍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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