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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착해야 하느니라!”(옵 1:10-14 딤전 3:8-13 막 10:17-27)성령강림후 열째 주일(8월6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08.04 02:59

1. 인간 중심적 구원과 하나님 중심적 구원?

복음주의 계열에 가장 유명한 한국인 신학자가 있습니다. 미국 풀러 신학교를 은퇴한 김세윤 교수입니다. 복음주의의 장점은 말씀에 기초한 복음을 중시하고 순수한 신앙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는데, 복음만 강조하고 문화를 등한시하거나, 신앙의 실천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김세윤 교수는 이 둘을 조화시키려고 합니다. 따라서 복음주의가 강조하는 칭의, 곧 순수한 신앙에 성화의 측면, 곧 신앙의 실천을 연결합니다.

이것은 복음주의가 하나님 사랑만 강조하고 인간 사랑을 인본주의로 경계하는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따라서 그나마 깨어있는 복음주의자로 김세윤 교수는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결합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복음과 문화의 결합, 의인과 성화의 결합입니다. 김세윤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복음을 받아서 우리가 의인이 되는 일은 세례 때 선포됩니다. ‘당신은 의인이고(칭의) 거룩한 자(성화)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입니다.’ 이렇게 선포됩니다.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세례만이 끝이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구원이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종말의 때에 심판으로 완성될 때까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그게 인간 중심적 구원이 아닌, 하나님 중심적 구원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중심적 구원과 하나님 중심적 구원론을 비교합니다. 이것은 인간 중심적 구원론이 하나님 중심적 구원론에 인간 중심을 설정한 오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인류 전체, 피조물 전체의 구원이 아니라, 한 개인의 실존적인 영역에 가둬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이기적이고 편협한 까닭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버린 원인입니다. 특히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하여 혐오하고 증오했던 바탕이 바로 이러한 인간 중심적 구원론입니다.

2. 올바른 구원론과 성화론

김세윤 교수는 일부 몰지각한 복음주의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으면 거기서 끝이라고 생각해 윤리와 도덕마저 간과하던 일부 잘못된 믿음에 맞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생각하는 하나님 중심 구원론의 의미를 지속해서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누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으면 끝이라고 했나요? 그리고 그 말이 나온 맥락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오히려 구원받은 사람의 새로운 삶이 복음의 진정한 시작 아닌가요?

물론 한국교회의, 루터의 칭의론에 대한 오해, 칼뱅의 예정론에 대한 몰지각 등을 지적한 말이긴 합니다만, 잘못된 복음주의의 폐해가 여실히 드러난 한국교회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내용이 기사화되고, 러한 생각이 논의된다는 것, 그 자체가 아직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신앙과 신학 수준이 밑바닥이라는 뜻은 아닐까요? 안타깝습니다. 그나마 김세윤 교수의 말 가운데 다음 한마디는 들어볼 만합니다.

“구원을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보면,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인류를 아담적 숙명, 즉 죄와 죽음의 통치 아래 두지 않으시고 사단의 통치에서 건져내셔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노예나 상전이나 차별 없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선포하고 사단의 잔여 세력을 소탕 중이란 이야기가 곧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사단의 잔여 세력은 누구인가요? 여기서 복음주의는 늘 형이상학으로 넘어갑니다. 구체적인 이 땅의 적 그리스도를, 사탄의 권세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야만 교회가 성장하고, 사람이 몰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김세윤 교수는 『구원이란 무엇인가』(두란노, 2023)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주의자로서는 대단한 발전입니다.

▲ 김세윤 박사와 『구원이란 무엇인가』 표지
“오늘 교회가 이 가르침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땅 밟기 같은 무당 짓거리하러 돌아다니지 말고, 사탄의 영의 지배를 받아 허위로 ‘자유’, ‘정의’ 등을 외쳐 대며 국민을 속여 권력을 잡고서는 국민을 억압하고 불의를 자행하는 독재자들, 자기 편의 죄는 없애 주고 반대편이나 약자들의 없는 죄는 조작하는 검사들과 판사들, 진실을 왜곡하는 기사들로 국민을 오도하여 정의와 화평을 파괴하는 기자들, 불량 상품으로 국민의 피를 빨고 그들의 안녕을 해치는 악덕 기업가들 등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이제껏 사탄의 종노릇 하며 거짓과 불의와 악행을 저지른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순종하게 해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와 행복을 우리 사회에 증대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교회가,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군대로서 싸워야 할 진정한 영적 전쟁이며,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현재적 실현의 모습인 정의와 평화와 행복이 넘치게 해야 합니다.”

복음주의권에 그나마 상식 있는 신학자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복음주의권 교회가 몇이나 될는지! 지금 대한민국 교회 대부분을 보며 드는 생각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렇게 올바른 구원론과 성화론에 관한 말씀, 곧 참된 신앙의 의미와 그 실천에 관한 말씀입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은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와 구원과 영생에 관해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킨 이 의로운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떠나갑니다. 신앙의 실천에서 무너진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과 서신서의 말씀은 성화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약 말씀은 형제를 돌보지 못했던 에돔 족속의 멸망을 소개하고 있고, 서신서 말씀은 성화 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집사의 직분에 관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 모두 성화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3. 영생의 길은?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 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막 10:17-20)

▲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

예수님께서 길에 나가셨을 때, 한 사람이 달려와 예수님께 영생의 길을 묻습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아, 이 사람은 매우 배려심 많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선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는 계명의 말씀을 어려서부터 다 지킨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1-22)

아무리 선하고 계명을 다 지킨다고 해도, 재물을 더 사랑하면 구원과 영생의 문은 그에게 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막 10:23-25)

낙타(κάμηλος)든 밧줄이든(κάμιλος), 바늘귀(ῥαφίδος)든, 바늘문(ῥαφίς, 통행금지 때 성문을 나서야 할 사람들을 위해 만든 작은 문)이든, 밧줄로 바늘귀를 통과하든, 낙타가 바늘문으로 나가든 둘 다 어렵습니다. 거의 불가능합니다.

▲ 1800년대 예루살렘 시온문의 바늘문, 그리고 성문이 다 열렸을 때 모습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뿐인가요? 그리고 가난의 정도는 어느 정도인가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출신을 보면 그리 부유한 편이 아닙니다. 이런 제자들도 다 놀랐다고 하니, 예수님의 말씀이 매우 충격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6-27)

사람으로는 할 수 없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무슨 말씀인가요? 당시 배경을 조금 살펴볼까요? 베드로를 비롯한 당시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부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부자는 천국에 간다.”라는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어떤 사람이 병이 든 것은 바로 그 집안, 혹은 그 사람의 죄 때문이다.”라는 생각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니, 그럼 도대체 누가 천국에 갈 수 있단 말인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능력으로는 욕심 때문에 자신의 부를 나눠주거나 베푸는 것이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이러한 나눔과 베풂을 실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지갑을 열게 하고,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구하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혼자 독불장군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나누고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공동체가 건강해집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부자에게 이러한 나눔과 베풂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해 실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4. 착하게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진화심리학적으로 인간은 집단 내에서 힘을 합쳐 다른 집단을 공격하여 이긴 부족이 살아남았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그렇습니다. 폭력과 전쟁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타락한 우리 인간은 이러한 싸움의 과정에서 쾌감을 느끼도록 진화해 왔습니다. 초등학교 가을운동회 청백전 때 왜 그리 투쟁심이 솟았는지, 반 대항, 혹은 교회 대항 축구 경기나 체육대회는 매우 치열합니다. 또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지난 대통령 선거에는 왜 그리 관심이 많았는지, 모두 진화심리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고 협력할 때 즐거움을 느끼도록 진화됐습니다. 따라서 싸움을 통해 최강 제국을 세워 온 인류의 역사는 항상 그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성경 속 제국의 역사를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최근 우리 사회는 이렇게 더불어 사는 삶, 공감이 무너지고 차별과 혐오, 폭력과 증오의 감정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터넷과 SNS가 이러한 공감과 더불어 사는 삶을 무너뜨리고 투쟁 쾌감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극우든 극좌든 극단적인 유튜버가 계속해서 살아남는 방법, 현재 한국 정치가 양극단으로 치닫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진화의 산물입니다. 이렇게 SNS부터 현실 정치까지 ‘공감’과 ‘소통’이 아니라, ‘공격’과 ‘혐오’를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협력과 공감이 마지막에는 승리합니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인간을 보아도 인간이란 수십억 개의 세포가 연합된 다세포 생명체이기에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협력으로 구성된 인간 존재 자체입니다. 우리 기장 교단 오산 임마누엘장로교회의 주용태 목사님이 쓴 책이 있습니다. 『착하게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따뜻한 힘의 원리』(트러스트북스, 2023)라는 책입니다. ‘착함’이라는 거대한 물줄기가 이루는 굵은 흐름을 주목하고 우리에게 착하게 사는 것이 맞다고, 틀린 것이 아니라는 위로를 던져줍니다. 주용태 목사의 말입니다.

▲ 주용태 목사와 책 『착하게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표지
“‘착한 사람과는 절대 결혼하지 마십시오. 착한 사람은 죄인입니다. 호구, 이 사회의 천덕꾸러기입니다.’ 우연히 보게 된 유튜브 영상의 내용에 내 귀를 의심했다. 어떻게 저런 말을 버젓이 할 수 있지? 댓글들을 살펴보니 더욱 놀라웠다. 수많은 사람이 맞장구치며 동의했다. ‘정말 그래요! 저도 많이 당했어요, 결혼 완전 잘못했어요. 제 남편은 사람은 착한데 답답하고 무능해요.’ 정말 이 말들이 사실일까?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세대의 영웅들을 생각해보라. 김연아, 유재석, 손흥민, 김연경, 박항서 감독… 착한 사람들이 성공 반열에 오른다. 그들에게서 조금의 악의라도 엿보였다면 그처럼 큰 대중의 호응이나 인기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착하지 않은 행동 때문에 자기 분야에서 퇴출당한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영화감독, 유명작가, 운동선수, 정치인, 유명 배우 등이 한순간 저지른 잘못 때문에 낙인찍혀 사회에서 퇴출되었다.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우리는 이 엄청난 변화를 실감하고 그에 맞춰 살아야 한다. 물론 착한 사람이 모두 잘되고 성공하지는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착하지 않으면 성공도 없다. 성공은커녕 착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착한 사람이 손해를 보고, 못된 사람이 잘나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이유는 ‘당장 보기에’ 그렇기 때문입니다. 결국 착한 사람과 못된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기간’입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착한 사람이 불리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착한 사람이 성공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중을 보지 않고 당장 좋으면 다 좋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착한 사람은 늘 손해 보고 악한 사람은 늘 이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터넷과 SNS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정치와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공격’과 ‘혐오’를 부추기는 이들이 잘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공감’하고 ‘소통’하고 ‘배려’하고 ‘연대’하는 이들이 이깁니다. 이것은 진화심리학의 관점만이 아니라, 역사의 교훈이며 성서의 진리이기도 합니다.

착하지만 바로 그 착한 것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 착해서 손해만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착한데도 일이 잘 풀리지 않아 힘들어하는 사람들, 착한 것을 약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심지어는 착하기 때문에 인생을 비관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진정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착하게 산 것이 비록 손해를 본 듯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손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번 외쳐볼까요? “우리 모두 착하게 삽시다!” 그러나 오늘 구약 말씀은 이렇게 착하게 살지 않는 한 민족의 멸망을 보여줍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5. 네 형제에게 행한 포학으로 영원히 멸절되리라!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옵 1:10-11)

잘 아시겠지만,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손이 에돔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방랑할 때 도와달라는 청을 단호히 거절했고, 그 뒤 이스라엘이 이방 국가들에 침략을 당하여 고통을 받던 시기에도 에돔은 이스라엘을 돕기를 거절했습니다. 이러한 완고함 때문에 에돔은 오바댜의 혹독한 저주를 받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의 대적이었던 에돔에게 임할 멸망을 예고합니다. 형제의 나라인 이스라엘의 고난을 즐거워하고 이방과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한 에돔의 죄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네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원수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니라.”(옵 1:12-14)

쉽게 말해 개인도 그렇지만, 한 민족도 한 나라도 착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착하게 살지 않으면 멸망 당할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오늘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의 직분자인 집사를 세울 때 착한 것에 중점을 두라고 권면합니다. 디모데전서 말씀을 볼까요?

6. 모든 일에 충성된 자, 착하게 삽시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 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 3:8-13)

바울은 디모데에게 직분자들에게 기능적인 능력보다는 고매한 신앙 인격을 강조합니다. 정중해야 합니다. 한입으로 두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술꾼이 되어서도 안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깨끗한 양심, 곧 착해야 합니다. 그리고 참된 믿음의 비밀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고매한 신앙 인격의 핵심이 바로 ‘참함’입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착한 사람들이 모여야 합니다. 아니, 악한 사람이라도 교회를 다니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착해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수십 년 동안 했는데도 착하지 않고, 시기심 많고, 이기적이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고집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는 사람이 교회의 직분자가 되면 그것은 교회가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회개하고 빨리 착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착함을 실천함으로 의인과 성화를 이루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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