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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새롭고이 밤이 지나면(예레미야애가 3:1-24; 로마서 7;15-25)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08.06 01:19
▲ Maerten de Vos, 「Jeremiah with a yoke on his neck」 (1643) ⓒRijksmuseum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애가 3:21-24)

1.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기원전 7세기 요시야 왕 때부터 이스라엘이 바빌로니아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예레미야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순간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어머니 뱃속에 생기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선택하고 구별해서 예언자로 세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그러하듯이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예언자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일방적인 부름은 단지 예언자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이 자리에 나와 예배드리고 있는 이 순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름입니다. 물론 자기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나의 선택과 나의 결단에 의해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이제와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일방적인 손길에 의해 끌려온 사건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의 고백이고 그것이 신앙의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선택’이라고 하지 않아요. ‘소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부름받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나의 결심과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심과 결정이고 그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축복된 부름 앞에서 ‘나는 아직 어리고, 말도 할 줄 모르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그 부르심을 거부합니다. 그에게 주어질 사명이 무엇일지 예레미야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전 수많은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예레미야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어떤 삶인지를 예레미야는 알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어떻게 살았는지, 엘리사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았고, 이사야가 아모스가 호세아가 어떻게 살았는지 다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그 사람들이 어떻게 고난을 당했으며 어떻게 핍박을 받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어 그 말씀을 선포하게 되면, 자기에게 어떤 운명이 닥쳐올지 예레미야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감히 그 부름을 거부합니다. ‘하나님 나는 말도 잘 할 줄 모르고, 아직 어리니 다른 사람을 쓰십시오.’

이스라엘에 선지지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이미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많이 있었습니다. 왕실에 고용되어서 왕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는 조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왕실선지자, 궁전선지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이 아니라, 왕이 즐거워하는 대로, 왕의 생각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왕의 하수인들이었습니다. 가짜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포장을 하고서는 자기들 원하는 대로 자기들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말들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도 그렇다고,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하나님도 기뻐하신다고, 그렇게 거짓을 말하면서 부정한 권력에 빌붙어 살았던 것입니다.

지금 나라가 망하게 될 위협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 잘 살아 왔다. 하나님이 우리를 칭찬하신다. 그러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이집트에 도움을 청하고 다른 나라에 도와달라고 하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진짜로 해주신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이 듣고 싶었던 말이었습니다. 특별히 왕이 권력자가 듣고 싶었던 말입니다.

그런 거짓 선지자들이 바스훌이나 하나냐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담대하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하는 말은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왕에게 아부하는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의 진짜 말씀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등 돌리면서 살아왔는데,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이 가당키나 합니까?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이 가당키나 합니까?

먼저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살려달라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이집트가 수많은 병거를 몰고 우리를 도우러 와도, 이집트까지 멸망당하고 맙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 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피눈물 나는 선포입니다.

2.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볼까요?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예레미야에 가깝습니까? 바스훌이나 하나냐에 가깝습니까? 

로마서를 보면 바울이 율법과 복음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음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킨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고, 그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믿으면 됩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율법에 연연하고 율법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하고 율법 때문에 이웃을 정죄합니까? 그러지 맙시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사실은 우리가 율법에 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사실은 율법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생긴 것 자체가 그렇게 생겨 먹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예외가 아니어서 바울 자신도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유명한 자기고백을 합니다. 이건 바울 개인의 고백이 아니라, 바울의 입을 통해서 고백하는 우리 인류의 고백이고 온 우주의 고백입니다. 이런 말입니다.

“내 안에는 죄가 자리 잡고 있어서 악이 자리 잡고 있어서, 내가 선을 행하려고 해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내가 속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법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내 안에 다른 법이 있어서 하나님의 법을 막아섭니다. 이 죄의 법이 하나님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나를 포로로 사로잡아서 마음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탄식합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에서 건져주겠습니까?’ 내 힘으로는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법을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은 뼈저리게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바스훌이나 하나냐가 특별히 악랄한 악의 화신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죄의 법에 사로잡혀버린 연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우리도 다 그렇습니다. 예레미야 같은 영웅이 되지 못하는 한낱 보잘것없는 사람들에 불과한 겁니다.

이 법이 우리 인간 개개인의 마음에만 있는 것일까요? 예레미야가 맞서 싸웠던 거짓 선지자들은 바로 우리 역사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법입니다. 가룟 유다를 사로잡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넘긴 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세계 구원역사를 맞서 대항하고 있는 죄의 법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대결하는 치열한 격전지입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치열하게 싸우는 중입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하는 내 마음을 죄의 법이 붙들고 놔주지 않습니다.

어찌나 그 힘이 센지, 매일매일 하루를 마감하며 자리에 누울 때면, 우리는 죄의 법에 굴복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주님 앞에 사죄의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나 그 힘이 센지, 하나님 다스리시는 이 역사마저도 죄의 법에 굴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뉴스를 장식하는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죄의 법은 오늘도 의기양양하게 웃음 짓고 있습니다. 어찌나 그 힘이 센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마저 그 죄의 법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붙잡혀가고 맙니다.

3.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추어진 대반전의 드라마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이 땅을 사로잡고 있는 죄의 법, 온 인류를, 내 삶을 내 영혼을 붙들고 있는 죄의 법이, 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거꾸러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바로 그걸 보여줍니다. 죄의 법이 이 땅을 주름잡고 있어서 예수님마저 십자가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십자가에 예수님마저 패배한 것 같지만, 실은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우리는 바벨론에 멸망당해야 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은 바벨론에게 굴종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온 세계를 호령하는 바벨론도 하나님의 섭리 아래, 하나님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바벨론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바벨론을 도구 삼자는 겁니다. 회개하는 기회로 삼자는 겁니다.

오늘 함께 읽은 예레미야의 애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몽둥이에 얻어맞았지만, 빛도 없는 캄캄한 곳을 지금 헤매고 있지만, 흉폭한 사자와 곰에게 당한 것처럼 내 몸이 다 찢어졌지만, 죄의 법이, 사탄의 세력이, 악의 세력이 하나님을 이기고 승리한 결과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길로 일어난 것이다. 나에게 고난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시다.’

조국이 멸망당하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패배하고 하나님이 악의 세력에게 무릎 꿇는 절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음이로다. 주님의 사랑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긍휼이 크도다. 주님은 나의 모든 것이요, 나의 희망이로다.’

그러고 보니 바울의 절망스러운 자기고백도 마침내 희망으로 끝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게 됩니다. 바울은 비참한 사람이라고 한탄하고 나서는 곧바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고 나를 포로로 옭아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는 이미 해방되었고, 하나님의 법에 속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법이 이끌어가는 세상이지만, 죄의 법이 힘쓰는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법이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지만, 실은 하나님의 법이 승리했고, 육신의 법이 죄의 법이 패배했다는 것을 예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아무 두려움 없이 십자가를 지십니다.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어디 한 번 그렇게 되는지 보자. 네가 이기고 내가 지는지 한번 보자. 하나님의 섭리가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내가 이 땅에 증거 해야겠다. 그러니 어서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봐라.’

유월절 만찬을 나누면서 자신을 팔아넘길 작정을 한 가룟 유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유다는 예수님이 건네신 빵조각을 받고는 곧 밖으로 나갑니다. ‘하라면 못 할 줄 알아?’

그러자 복음서는 말합니다. ‘때는 밤이었다.’ 자기들 멋대로 하는 세상이 이어집니다. 칠흙같은 밤이 지배합니다. 그리스도를 팔아넘기고, 거짓예언으로 히히덕거리고, 율법을 손에 쥐고 흔듭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주름잡습니다. 그렇게 온 세상은 캄캄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밤이 지나면 비로소 아침이 찾아옵니다. 그 깊은 밤이 지나야 비로소 아침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그 밤을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밤을 돌파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밤을 초월해야 합니다.

4.

십자가를 먼저 짊어져야 비로소 부활이 옵니다. 골고다에 먼저 올라가야 비로소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먼저 멸망해야 비로소 해방이 옵니다. 죄의 법에 굴종해야 하나님의 법이 구원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레미야와 같이 주님을 나의 모든 희망으로 삼는 신앙이 되길 기도합니다. 바울과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그 은혜를 감사하는 신앙이 되길 기도합니다. 그 굳은 신앙으로 이 깊은 밤을 통과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찬란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아침을 소망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법과 마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세요. ‘넌 나를 이길 수 없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봐라. 지금은 네가 힘센 것 같지만, 나를 이긴 것 같지만, 결국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따르고, 하나님 품에 안겨서 너를 이겨낼 거다’

이렇게 당당하게 선포하고, 실로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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