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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의 소식이 산을 넘고 달려오니 불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나 1:15-2:8; 벧전 4:12-19; 막 11:12-14, 20-26)성령강림후 열 둘째 주일(8월20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08.18 00:55

1. 쿠르스크 지방의 종교 행렬

▲ 일리야 레핀 <쿠르스크 지방의 종교 행렬>(1880~1883)

19세기 말 러시아 최고의 ‘리얼리즘화가’로 러시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초를 연 선구적인 작가 일리야 레핀(Ilya Yefimovich Repin, 1844-1930)의 <쿠르스크 지방의 종교 행렬>(1880~1883)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레핀은 톨스토이와 더불어 러시아 국민이 국보로 여기는 예술가로 세밀화(miniature), 인상주의, 성화(聖畵) 등의 다양한 장르로 작품을 남겼습니다. 레핀의 작품에 공통으로 표현된 세밀한 표정과 찰나의 순간 등을 역동적인 구조로 표현한 작품들을 보면 디지털시대인 현대 화가들이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그려도 쉽지 않을 만큼 뛰어난 작품들이 많습니다.

<쿠르스크 지방의 종교 행렬>의 상황은 ‘쿠르스크의 성모’라는 이콘화(성상화)를 코레나야 수도원(Korennaya Monastery)에서 쿠르스크 시내로 옮기는 행사입니다. 이 행사 행렬에는 이콘화가 실린 화려하게 장식된 꽃가마를 어깨에 얹은 수도사들을 선두로, 농민들, 거지, 장애인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뒤를 따르고 있고, 경찰부터 군인, 귀족 등 중요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평론가가 이 그림을 이렇게 평합니다.

“이 그림은 다양한 러시아 사회의 구성원들이 먼지가 풀풀 나는 헐벗은 풍경을 가로질러 불편하게, 하지만 끊임없이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아무도, 심지어는 화가 자신도 볼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림을 세밀하게 보면, 꽃가마를 진 수도사들은 마치 술 취한 사람들같이 무심하고 흐리멍덩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림의 한 가운데는 화려한 의례복을 갖춰 입은 사제가 혼자 걸어가는데, 시선은 그림을 보는 관중을 힐끗 바라보면서 손으로 자신의 금발을 넘기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엄숙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행사가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입니다. 

왼쪽에 말을 타고 있는 경찰 앞으로 수도사들이 손을 마주 잡고 군중들이 가마에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맨 앞 수도사는 목발을 짚고 있는 장애인이 가마 쪽으로 가는 것을 지팡이로 막고 있습니다. 행렬 중간중간 꽃가마 뒤쪽에 하얀 유니폼을 입은 기마군인 하나가 행렬을 방해하는 듯한 사람에게 회초리를 크게 휘두르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사제는 종교적인 엄숙과 상관없이 직업화, 혹은 교권화되었고 수도사는 흐리멍덩하고 군인과 경찰은 군중을 폭력으로 다스리고 성모 마리아의 이콘화를 따르는 농민과 거지, 장애인들은 희망 없는 세상에 성모를 의지하려 행렬을 뒤쫓고 있습니다.

사실 이 종교 행렬은 기쁨의 행렬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행렬입니다. 그러나 본질이 퇴색되고 형식만 남으니, 이렇게 의미 없는 안타까운 행렬이 된 것입니다. 수도사와 사제, 곧 종교와 군과 경찰, 곧 국가 권력이 제 역할을 못 하니, 그렇습니다. 따라서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소식은 다름 아닌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의 멸망 예언입니다. 남유다 입장에서는 광복의 소식입니다. 그리고 앗수르 입장에서는 <쿠르스크 지방의 종교 행렬> 그림처럼 종교와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멸망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복음서 말씀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를 저주한 예수님의 말씀인데,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불시험을 극복해야 합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광복의 소식이 산을 넘고 달려오고 있으니 불시험과 고난을 이상히 여기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먼저 구약 말씀부터 볼까요? 쉽게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2. 희소식을 전하는 발길이 산을 넘고 넘어 달려온다, 광복의 소식을 안고 온다!

“희소식을 전하는 발길이 산을 넘고 넘어 달려온다. 광복의 소식을 안고 온다. 유다야, 축제를 마련하여라. 서원 제물을 바쳐라. 그 못된 자들은 모두 없어졌다. 다시는 너희 가운데 얼씬도 못 하리라. 침략자가 너를 치러 올라온다. 파수꾼아, 성루에 올라가 눈에 불을 켜고 길을 지켜보려무나. 허리를 질끈 동이고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어 싸워보려무나. 야곱의 포도덩굴, 그 이스라엘의 자랑을 적들은 짓밟고 털어갔었다. 그러나 야훼께서 그 포도원을 다시 일으키시리라.”(나 1:15~2:2; 공동번역 나 2:1-3)

지난주에 8・15 광복절이 있었는데, 야훼께서 광복의 소식을 안고 산을 넘어 유다를 향해 달려오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로부터의 광복인가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바로 앗수르로부터 남유다의 광복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나훔서는 요나서와 짝을 이룹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습니다. 북 이스라엘을 무너뜨린 앗수르의 수도가 니느웨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처음에는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갑니다. 자기 민족을 괴롭히던 앗수르를 심판하지 않으실까 봐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이후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길에 풍랑을 만나고 물고기 배속에 갇히는 등 우여곡절 끝에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러자 니느웨 백성들은 회개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신(요 4:1-2) 하나님의 성품을 요나가 이렇게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불의한 자들에게도 회개하면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 이후 약 100년이 지나 나훔의 시대로 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나훔은 요나와 마찬가지로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예언을 선포합니다. 이때는 요나 당시 회개한 앗수르인들은 다 사라지고, 진실한 회개 운동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시 니느웨 사람들은 잔인한 정복 전쟁과 주변국에 대한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곧 남 유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마침내 예루살렘까지 포위하였습니다. 이러한 끔찍한 고통의 시대에 나훔이 나타나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 요나와 나훔

“적의 억센 용사들이 자주 갑옷을 입고, 붉은 방패를 들고 마구 쳐들어오는데 기마들은 미친 듯이 날뛰고 병거의 바퀴는 불이 나게 돌며, 거리를 누비는구나. 횃불처럼 번개처럼 이리 번쩍 저리 번쩍 광장을 치달린다. 정예부대를 앞세워 거꾸러지면서 돌격한다. 벼락같이 성벽에 들이닥쳐 화살막이를 벌여놓는다. 마침내 강을 낀 성문들이 열리니 대궐은 수라장이요, 여신상을 들어내어 포로처럼 끌어가는데 시녀들은 가슴을 치며 비둘기처럼 구슬피 흐느끼는구나. 니느웨는 물이 빠지고 있는 웅덩이 같아, ‘멈추어라, 멈추어라.’ 하고 소리치나 아무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나 2:3-8; 공동번역은 2:4-9)

요나를 통해 은혜와 자비가 넘치는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했다면, 나훔을 통해서는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십니다. 요나의 때에는 니느웨가 회개의 선한 열매를 맺었을 때는 비록 그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나훔의 때에는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한 니느웨는 멸망하게 됩니다. 결국 주전 612년, 나훔의 예언이 기록된 지, 이십 년도 채 지나지 않아, 바벨론 제국의 침략으로 앗수르는 완전히 멸망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난공불락의 수도였던 니느웨가 망한 것입니다. 그리고 1842년, 고고학자들이 이라크 모술에서 앗수르의 잔해를 발견함으로써 그 흔적이 발견되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악인은 멸망합니다. 선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반드시 망하는 것입니다.

▲ 모술 지역과 오스틴 레이어드의 <니느웨 유적 복원도>(1853)

오늘 복음서 말씀이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를 저주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열매(fruit)는 과실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넓게는 땅의 소산물이나 가축의 새끼로도 표현이 됩니다. 또한 사람의 말이나 행실 등을 뜻하기도 합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3.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막 11:12-14)

▲ 열매 없는 무화과를 저주하시는 예수님

베다니에서 나오신 예수님께서 시장하셨습니다. 멀리 무화과나무가 있는데 잎사귀 외에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열매 맺을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때는 언제인가요? 이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때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베다니에서 하룻저녁 유하신 그다음 날입니다(마21:1-17). 마지막 고난 주간의 둘째 날 아침에 다시 성으로 들어가실 때(마 21:18) 무화과나무 곁을 지나가시며 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유월절 며칠 전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하루 전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죠? 유대인의 유월절은 양력 3월 말이나 4월 초순입니다. 그리고 무화과는 3월에 잎이 나서 6월에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지금은 무화과 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화과는 죄가 없습니다. 열매 맺을 때가 아닌데, 열매를 내놓으라 하니, 오히려 이것이 억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제대로 보려면, 오늘 본문 사이에 있는 성전 정화 사건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는 날 아침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고 성전에 들어가 정화를 하신 후에(막 11:15-18), 다시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시 무화과 나무 앞을 지나갈 때, 베드로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예수님께 왜 저주하셨는지 질문합니다. 무화과나무 사건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이틀에 걸쳐 진행되는 동안 그사이에 성전 청소 사건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일단 이후 본문 말씀을 볼까요?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0-23)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무화과나무 사건은 별개의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예수님의 의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막 11:17).”라고 예언서(사 56:7, 렘 7:11)를 인용하여 말씀하시며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믿음에 바탕을 둔 능력 있는 기도에 관해 말씀하심으로 무화과나무 사건을 결론지으셨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 11:24-25)

그렇다면 무화과 나무 사건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보시면서 열매 없는 성전 제사와 종교 행위를 저주하셨던 것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나 성전을 장사치의 소굴로 만든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모두 앞서 말씀드린 러시아의 <쿠르스크 지방의 종교 행렬>의 종교지도자들과 같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루살렘 성전 정화사건 이후, 주 수입원이 사라진 대제사장들과 그 무리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잡아 죽일까 공모하게 됩니다. 예수님 역시, 무화과나무 사건 이후 줄곧 바리새인, 사두개인, 헤롯당, 대제사장 등과 논쟁을 벌이며 그들의 위선과 가식을 지적하고 야단치셨습니다. 이렇게 고난 주간 한 주간 내내 예수님은 형식적인 기복신앙으로 바뀐 이스라엘의 영적 무지 상태에 대해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가식적인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성전 파괴를 예언한 것입니다(마 24:1-2).

그 결과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과 결탁한 헤롯당 정치인들과 로마 권력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믿음에 바탕을 둔 능력 있는 기도는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고, 단지 형식적이고 문자적인 율법 준수와 성전 제사에만 매달려 있는 당시 유대교는 더 이상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율법의 형식이 아니라, 선한 열매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한 열매야말로 믿음의 기도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예수님께서 올바른 소리를 하시자, 모든 종교인이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베드로는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여기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4.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여기지 말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 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2-14)

베드로 사도는 고난받는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이 아니라, 우리의 악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보입니다. 베드로도 그것을 알고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5-16).”

이어서 베드로는 마지막 심판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7-19)

성도 여러분! 심판이 어디에서 먼저 시작되죠? ‘하나님 집에서’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이후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우리 성도들이 먼저 받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연단 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면 우리는 심판을 피할 수 있지만, 우리가 믿음을 저버린다면 불시험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니느웨가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와 예루살렘 성전이 바로 그렇습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 서리요(벧전 4:11)?”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구원을 받기 위해 이토록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면 마지막 심판의 때에 믿지 않는 자들은 얼마나 더 큰 고통을 겪게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통은 장차 믿지 않는 이들이 당할 고통의 예고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미래가 심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들에 대하여 불쌍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성도들답게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동시에 부지런히 선을 행하며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들을 영원한 죽음의 고통에서 건져내는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끝까지 순종하신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 뜻대로 고난받으며 선을 행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마지막 구절에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 다가오는 불시험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최선을 다해 믿음으로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고 또 실천함으로 이 심판의 때를 넘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광복의 소식이 산을 넘고 달려오는 것을 듣고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를 꿈꾸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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