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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놓아버릴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착각물 위에 던진 빵(예레미야 32:6-15; 전도서 11:1)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08.19 20:52
▲ 예레미야가 토지 계약서를 넣은 항아리의 일종 ⓒhttps://www.thetorah.com/article/turning-jeremiahs-land-deed-into-an-oracle-of-hope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 전도서 11:1

1.

예레미야는 20년이 넘는 세월을 한결같이 유다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고, 진정한 애국자였지만, 자기 나라의 멸망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같은 동족으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비국민적인 이적행위자로 몰렸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고난당했습니다. 근위대 뜰 안에, 구덩이에 뎐져지기도 했습니다.

지금 바벨론의 군대가 유다를 포위하고 있는 중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도 유다 왕과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 입맛에 맞게 말하지 않는지? 왜 우리에게 ‘아무 일 없을 것이다. 다 잘 될 것이다’라고 좋게 말해주지 않는지 불쾌하고 괘씸할 뿐입니다. ‘혹시 바벨론과 내통한 간첩이 아니야?’ 하면서 의심하기까지 합니다.

나라의 미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 그 이후의 일을 묻고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하기는커녕, 오히려 핍박하고 가두는 것입니다. 예언자를 불러서, 하나님과 이야기 나누고 하나님께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의 통로를 꽉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모든 일을 예견하지도 못하고 예측하지도 못하고, 그저 ‘좋다. 좋다. 다 잘될 것이다. 걱정 없다’ 귀에 좋은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거짓예언자들을 곁에 두고 그들과 나라의 미래를 상의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받았잖아요? 탄핵심판 선고가 있던 날에도, 전 대통령은 자기 측근들과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탄핵심판이 분명히 기각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5단 케이크까지 준비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라를 망치는 길은 매우 쉽습니다. 듣기 좋은 말만 계속 들으면 됩니다.

2.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매우 혼란스러운 격변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 요시야는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했던 왕입니다. 나라를 바로 세워보려고 노력했어요. 새로운 제국 바벨론이 성장하면서 앗시리아의 힘이 약해지자, 앗시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앗시리아의 동맹군 이집트와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요시야의 아들인 여호아하스가 요시야의 뒤를 이었지만, 석 달 만에 이집트에 끌려가 버리고, 이집트는 그 형인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웁니다. 여호야김은 어쩔 수 없이 이집트의 속국 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벨론이 더 큰 세력으로 성장해서는 앗시리아를 멸망시키고, 이집트까지 견제하기 위해 이집트의 속국행세를 하고 있는 유다를 침공합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유다는 패배합니다. 여호야김은 속절없이 바빌론으로 끌려갑니다.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되는데, 여호야긴도 사십 일 만에 바빌론으로 끌려가고 이번에는 그 삼촌인 시드기야가 왕이 됩니다. 몇 년 사이에 유다는 왕이 다섯 번이나 바뀌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중입니다.

시드기야는 혼란에 빠집니다. 새롭게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바빌론 제국과 전통의 강자 이집트 사이에서 아무런 힘도 없는 조그만 나라가 어찌할 바 모르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이전 왕이었던 아버지와 형제들과 조카가 힘있는 제국들에게 무력하게 유린당하는 모습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나라를 지켜야만 한다는 사명감과, 동시에 자신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좌절감 사이에 갈등합니다.

그런 시드기야에게 성서는 끊임없이 말을 건넵니다. 이 모든 고난과 혼란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근본적인 물음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닥친 환란은 단순히 정치적인 일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계정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금 경고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드기야는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렇게 절박한 상황에 무슨 한가한 종교타령이냐? 지금 나라가 풍전등화에 있는데, 전쟁을 해야 하는 판인데, 어느 편에 붙어서 누구와 동맹을 맺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데, 한가롭게 정의니 평화니 사랑이니 따질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 힘이 세고, 누구의 군대가 강하고, 누구의 외교력이 누구의 정치력이 뛰어난지 저울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드기야는 고민 끝에 이집트를 선택합니다. 바벨론에 반기를 들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습니다. 그러면서 왕실예언자들을 불러다가 듣고 싶은 말만 듣습니다. ‘잘하셨습니다. 하나님말씀에 이집트가 우리를 살려준답니다. 우리는 멸망하지 않는 답니다.’ 그리고는 다른 말에는 귀를 닫아 버립니다. 그러다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맙니다.

3.

역사는 시드기야가 ‘정세판단을 잘못했다’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 힘센 앗시리아가 멸망당하는 것을 봤으면, 새로 뜨는 해 바벨론을 선택했어야 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지는 해인 이집트와 동맹을 맺은 것이 패착이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전혀 다른 말을 해요. ‘세계정세를 파악하고 누가 힘이 세고 누가 세상을 지배할 것인가를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하나님을 보고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느냐를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격동하는 세계의 풍랑 속에서, 무엇을 얻을까 무엇을 잃을까 고민하면서 주판알을 튕기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세계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길을 고민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놓고 고민하셨던 고민이 바로 그 고민입니다. 로마의 지배와 이스라엘의 독립, 제자들과 함께 이루어놓은 종교적인 공동체의 발전,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갈 새로운 종교, 이런 것들을 고민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내 삶이 그 구원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원대하신 구원사의 흐름 속에서 내 삶이 한 조각 당당하게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그것을 바라보셨습니다. 지금 내가 사냐 죽느냐 고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느냐를 고민한 것입니다.

지금 시드기야가 나라를 걱정한답시고, 실은 자기의 운명, 자기 측근들의 운명, 기껏해야 유다 백성의 운명, 그것도 지금 당장의 운명만을 걱정하고 있는데, 그런 걱정이 아니라, 온 생명을 위한 걱정, 지금뿐만이 아닌 영원한 순간을 위한 걱정, 내 삶이 사느냐 죽느냐를 초월한 걱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걱정, 그런 생각, 그런 고민을 하지 않으면 아무리 머리 굴리고 걱정해봐야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4.

사람들의 소원과는 달리, 이제 유다는 진짜로 멸망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모두들 이제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때에도 잔머리를 굴리는 사람은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사촌인 하나멜이 꼼수를 생각해 냅니다. 난리가 나기 전에 자기 모든 재산을 팔아서 그 돈을 들고 어디론가 안전한 곳에 가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난리통에 땅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사촌인 예레미야에게 그 땅을 팔려고 옵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고 고지식하게 하나님 말씀이나 하는 사람이니까 세상물정에 어두울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친척이니까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이 예레미야에게 있다는 것도 좋은 핑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오히려 이 일을 좋은 기회로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온 유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멜에게서 밭을 삽니다. 은 열일곱 세겔을 값으로 줍니다. 매매계약서도 쓰고 증인을 세우고 서명을 하고 봉인을 해서 항아리에 넣고 서기 바룩에게 주어서 보관하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모든 사람들이 듣는 앞에서 예언합니다.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지금 다들 난리통이라고 말하고 누가 밭을 사고 누가 집을 사겠느냐고 말하지만, 이스라엘에서 다시 땅을 사고 집을 사고 포도원을 사게 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예레미야의 행동은 이상합니다. 지금껏 이스라엘이 멸망당할 것이라고 예언해 왔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예레미야를 비웃고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진짜 멸망을 눈앞에 두게 되었으니, 우리 같으면 이럴 거 같아요. ‘그것 봐라. 내가 뭐라고 했느냐? 내 말 안 듣더니 꼴좋다’ 할 수도 있습니다. ‘빨리 집 팔고 땅 팔고 도망가라’ 조롱할지도 몰라요.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제 멸망 앞에 서게 된 사람들에게, 오히려 이 멸망을 딛고 일어설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멸망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딴소리, ‘희망’을 설교하는 겁니다. 지금 멸망하고 있지만, 우리가 이 멸망속으로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하나님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저급한 퇴행종교와의 결정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들으면 무언가 보상을 주고,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보상이 없다’ 하는 식의 기브앤테이크 종교가 아닙니다. 변덕스러운 우상들처럼 무얼 좋아하고 기뻐할런지 몰라서 그 백성들이 전전긍긍하며 온갖 좋은 것을 다 가져다 바쳐야 하는 그런 종교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끝없는 사랑으로 이 온 생명우주를 끌어안고 계신 분입니다. 그 사랑을 혼자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나님처럼 그렇게 위대한 사랑을 하도록 인도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온 생명이 서로를 사랑하고, 나와 너로 구분 짓지 않고, 커다란 하나의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도록 하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구원이라는 종교적 언어로 표현할 뿐입니다.

길고 긴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지금 온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몸부림치고 계십니다. 그 길에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그 길에서 하나님께 등 돌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로 되돌릴까 고민하십니다. 심판으로 위협도 하고, 은혜와 구원으로 다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알고 그 사랑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그 행동의 중심에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눈으로 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헛된 죽음입니다. 쓸데없는 희생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입니다. 예레미야가 밭을 사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5.

전도서는 이것을 ‘물 위에 던져버린 빵(전11:1)’이라고 표현합니다. “너는 네 빵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전도서 11장 1절의 말씀입니다. ‘도로 찾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본질입니다. 복음의 핵심입니다. 헛된 일이 아닙니다. 돌아옵니다. 돌아오되, 그것도 더 좋은 것으로 돌아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물 위에 던지고 나자,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강림으로 더 좋은 것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종말에는 하나님의 통치로 돌아오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나라와 인류의 미래, 세상의 정의와 평화… 그런 것들까지 생각할 만한 여유가 없다구요? 그럼 내 앞에 닥친 문제부터 생각해 봅시다. 다 던지고 주님 앞에 설 각오가 있습니까? 그만큼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의지할 믿음이 있습니까? 시드기야를 비판하고 하나멜을 욕할 만한 자격이 됩니까? 큰일은 고사하고 작은 일 앞에서도 아무것도 물 위에 던지지 못하고 내 손에 꼭 쥐고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복 주셔야 합니다’ 하고 생떼를 쓰고 있는 신앙은 아닙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썩어질 것을 물 위에 던져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썩지 않을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찾게 됩니다. 시드기야처럼 썩어질 것을 지켜보겠다고 전전긍긍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썩지 않을 것을 위해 지금의 삶을 던지고, 다만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예레미야의 사촌 하나멜처럼 없어질 것을 조금이라도 지켜보겠다고, 그것 붙들고 살아보겠다고, 땅을 팔고 현금 만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예레미야가 보여주는 것처럼,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헛된 것들을 다 끌어 모아서 쓸모 없어져 버릴 그 땅을 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날려버리라는 것입니다. 다 물 위에 던져버리고 보내버리라는 것입니다. 다 없애버리고 빈손으로 하나님께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 땅은 휴지조각이 되어 날아가 버리겠지만, 다 던져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존재가 되고,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무릎 꿇으면, 그때 주님께서 모든 것을 도로 찾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시는 것, 다시 찾게 하시는 것, 그것을 얻기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던질 것 다 던져버립시다. 저 강물 위로 표표히 떠내려가는 빵을 바라보면, 그러면 안타깝고 아쉽고 서운하지만, 그 아쉬운 마음 뒤에 ‘잘 되었다. 개운하다. 이제야 마음 편하다’ 하는 담담함과 함께, 눈을 돌려 주님의 뒷길을 더듬는 새 마음이 솟아날 것입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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